딸의 아토피 극복기 2

딸의 아토피 극복기 2

2020-05-23 0 By worldview

월드뷰 05 MAY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글/ 조혜경(소설가)


의사 뒤를 쫓아다니며


그 날 아침 식탁에 앉아 밥 먹는 딸의 얼굴이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엄마 좀 쳐다볼래?”

“왜? 이상해?”

“…아니… 이뻐서…”

“헐~”

딸로부터 학교에서 중간에 문자가 왔다.

<엄마, 얼굴 좀 이상해. 화끈거려>

<엄마가 지금 학교로 갈까?>

<아니>

야간자율학습까지 끝내고 밤늦게 돌아온 딸의 얼굴은 다시 열꽃이 번진 것처럼 붉게 변해있었다. 다시 그런 얼굴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태연한 척 말했다.

“내일 병원에 가자. 이 정도면 금방 다시 가라앉을 거야.”

다음 날 아침 딸은 일단 학교로 가고, 나는 기다렸다 병원으로 전화했다.

“아, 오늘은 원장님께서 ○○동 병원에서 진료 보세요. 예약은 그쪽 병원으로 직접 전화하셔야 돼요.”

○○동 병원으로 찾아갔다. 의사는 돋보기로 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완치됐었는데… 다시 시작이네. 접촉 물질이 뭔지 찾았어요?”

고개를 갸웃한 채 처방전을 입력하는 의사에게 내가 말했다.

“아니요, 아직 모르겠어요. 그런데 얘가 고2라 학교에서 중간에 나오기가 힘들어요. 약을 며칠 분 더 주시면 좋겠는데요.”

“안 됩니다. 이런 약은 경과 봐가면서 처방해야 해서요. 삼 일 분 먹고 다시 봅시다. 주사 맞고 가라. 그리고 뭔가 원인 물질이 있어요. 그걸 찾아서 접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딸은 학교로 다시 들어가고, 집에 돌아온 나는 딸 방으로 들어가 서서 방의 모든 물건을 다시 탐색하기 시작했다. 책상, 책장, 이불, 곳곳에 배치된 숯, 벽지…. 이사 전과 후를 비교할 때 달라진 것은 벽지밖에 없으므로 벽지가 가장 의심스러웠지만, 이미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다고 생각해서 방심했던 것일까? 나는 딸 방과 딸의 동선을 따라 새집증후군 제거제를 거의 한 통 다 뿌렸다.

그렇게 부산을 떨며 병원에 다녀왔건만 저녁에 돌아온 딸의 얼굴은 별로 나아져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 병원에 다녀온 날(한 번의 주사와 두 번의 약 복용으로) 좋아져 왔던 것을 기대했던 나는 날카로운 돌이 하나 날아와 박히는 듯 속이 아리고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딸의 얼굴이 더 어두워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삼 일 분의 약을 다 먹어도 이제 5 정도밖에 좋아지지 않았다. 예약 전화를 하자 이번엔 원장님이 이웃 도시 ☆☆에서 진료를 보는 날이라고 했다. 나는 아이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 병원엔 나만 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원장님께 여쭤보겠다며 다시 온 전화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환자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고는 약 처방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이 함께 ☆☆시로 갔다. 의사는 여전히 좋아지지 않은 딸의 얼굴에 이번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주사 맞고, 약국에서 약을 한 봉지 먹고 학교로 왔다.

그렇게 강남으로, ○○동으로, ☆☆시로 딸과 나는 그 의사가 가는 대로 따라다녔다. 맑고 뽀얀 피부로 만들어주었던 분이기에 이 의사만이 살길이라 믿었다. 딸의 얼굴은 주사 맞고 삼 일 약 먹고, 주사 맞고 삼 일 약 먹으면 조금 가라앉았다가 다시 시작되기를 반복했다.

4월 중순의 어느 날 약이 떨어졌는데, 딸은 수행평가 때문에 학교에서 나올 수가 없다고 하고, 주말을 앞두고 있어 이틀이나 약을 안 먹으면 확 심해지지 않을까 나는 조바심이 났다. 이미 경험한 최악의 상태로 될까 무서웠다. 어떻게 약을 구하지? 강남의 피부과는 애걸해도 소용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지인 중 약사는 없고…. 나는 용기를 내 동네 약국에 강남 피부과의 처방전을 들고 갔다. 사정 얘기를 하면 똑같은 약은 없어도 비슷한 약이라도,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약이라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처방전을 내밀며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부탁했다. 처방전을 훑어보던 약사는 바로 내 얼굴을 똑바로 한참 바라보더니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약사는 거침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강한 속도의 야구방망이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정말 머리에서 ‘탕!!!’ 소리가 나고 계속 여진처럼 골이 울렸다. 어떻게 집까지 걸어왔는지 기억이 없다. 우선 너무 수치스럽고 창피해서, 그분이 여자 약사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약사의 충고


약사는 손짓까지 더하며 연극 하는 사람처럼 말을 쏟아냈다.

“지금 어머니가 들고 오신 이 처방전은 약 용량 쓸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쓴 거예요. 이다음엔 어쩔 건데요? 얘네들이요, 약 들어오면 아! 맛있다. 좋아 좋아! 실컷 먹었으니 한숨 자자. 그러면서 좀 가라앉는 거예요. 그랬다가 약 기운 떨어지면 일어나서 밥 줘! 밥 줘! 아우성치는 거고요. 그런데 문제는 얘네들이 요구하는 양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거지요. 더 줘! 더 줘! 하면서 악다구니를 치는 건데…, 이 처방전은 이미 최대치를 넘었어요. 이제 웬만큼 들이부어도 만족을 안 해요. 용량을 더 늘려도 말을 안 들어요. 그 정도까지 가면 심각한 부작용을 각오하셔야 하고요. 따님이라고 하셨나요? 결혼하고 애도 낳아야 하잖아요. 에고…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탕!!!’ 소리를 실제로 나는 들었다. 스틸 야구방망이가 내 뒤통수를 가격한 것 같이 나는 휘청였다. 아무 대꾸도 못 하고 내가 넋 나간 듯 그 자리에 서 있자 약사는 더 말했다.

“여기 ○단지에 남학생이 지금 그 케이스예요. S대까지 들어갔는데 휴학하고… 그 학생은 이미 부작용이 심각해서… 아이고, 어머니, 약 구하러 다니지 마시고 잘 판단하세요.”

약국에서 집으로 오는 길엔 작은 공원이 있다. 인사할 경황도 없이 약국을 나와 몇 발자국 걸어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화단 돌에 주저앉았다. 옛날 할머니가 다듬잇돌에 두드리던 방망이질이 내 가슴 속에서 시작되었다. 방망이질에 내 가슴 전체가 벌떡벌떡 뛰며 요동쳤다. ‘기’가 ‘막힌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 되었다. 몸의 어디선가 무엇이 탁 막혀 피의 순환이 멈춘 것 같았다. 정말 약사 말대로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게 다 무슨 말인가. 스테로이드, 최대치, 부작용, 휴학한 이웃 대학생….

늦은 밤, 돌아온 딸과 남편과 한자리에 앉았다. 고통스럽지만 약사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딸도 남편도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일단 피부과 약은 더 먹을 수 없겠다고, 피부과 치료를 중단하자고 결정했다. 다른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다.

귀국 후 치과와 예방접종 외에는 병원이나 약국을 이용해 본 일이 거의 없는 우리 가족은 모두 이 방면에 무지해도 너무 무지했다. 구세주 같이 매달리며 이곳저곳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던 의사. 다시 발진이 시작되어도 2-3일 분의 약이면 가라앉혀 줄 거라고 의지했던 피부과. 튼튼한 동아줄이라고 믿었던 줄을 버렸다.

이제 어떻게 하지? 아무 대책이 없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딸의 얼굴엔 계속 약을 먹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3 정도의 발진이 가라앉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다. 다음 날부터 약이 더 들어가지 않자 약사의 말은 현실로 나타났다. 지난 한 달 어간 달콤한 식사(다량의 스테로이드)를 맘껏 즐겼던 ‘녀석’들은 ‘밥’이 들어가지 않자 그야말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자연치유법 / 악전고투 (4월 중순 – 5월 중순)


이과로 반 편성을 하고 첫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시험 기간에라도 딸이 좀 편한 얼굴로 시험을 보게 하고 싶어 나는 그렇게도 피부과 약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이다.

딸은 여덟 살이 되던 해 1월에 한국에 돌아와 3월,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한글 읽고 쓰는 실력이 많이 부족하여 알림장을 그림일기 수준으로 그려오면, 내가 판독을 하다가 결국 못해 같은 반 엄마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곤 했다. 그래도 천성적으로 구김이 없는 딸은 친구도 잘 사귀고, 바이올린 같은 방과 후 수업도 재미있게 다니며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숫자로 성적이 나오자 비교적 상위권에 있는 것을 알고 대견했다.

고등학교 1학년을 잘 보내고, 이과로 선택하여 2학년 첫 중간고사를 치르는 기간 딸의 얼굴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약을 끊은 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아서였다. 눈 주위와 눈꺼풀, 코, 입술을 제외한 얼굴 전체에 발진이 돋기 시작했다. 온 얼굴로 퍼진 발진엔 고름이 잡히고, 고름이 흘러나간 자리엔 다시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다시 고름이 잡혀 딱지가 더께로 앉았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이 되었다. 세수하는 것도, 밥 먹기 위해 입을 벌리는 것도, 모든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열여덟 그 눈부신 나이에 그런 얼굴로 날마다 학교에 다녀야 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학교를 좀 쉴까?”

딸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도시락 두 개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너무 심한 얼굴에 놀란 선생님들이 아이 편에 약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그사이 감사한 것은 반에서 도시락을 싸 와 함께 먹는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 6-7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남학생이 없는 여고인 것이 다행이었다.

피부과 치료를 중단하고 딸은 스스로 면역력을 기르기 위해 밤늦게 집에 오면 줄넘기를 가지고 나가 2-30분씩 하고 들어왔다. 나도 부단히 무언가를 찾았다. 약을 쓰지 않고, 화학적 요법을 거부하고 치료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병은 소문을 내야 한다고 해서 여기저기 문의도 많이 했다.

천일염 목욕을 추천해서 신안 앞바다 천일염을 두 포대나 구매했다(발진 돋은 피부에 너무 따가워 한 번 하곤 못했다). 남도의 귀한 녹차를 구해 우려낸 티백을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밤에 오면 딸 얼굴에 붙였다. 독일의 까밀레(케모마일) 바디워시도 구했다. 풍욕이 좋다고 해서 줄넘기를 하고 들어오면 방의 창문을 다 열어놓고 소독한 커다란 면포를 넣어주었다. 모든 먹거리를 구매하면서 성분표를 자세히 보고 따졌다. 그러나 이 모든 수고는 마치 홍수로 집 안에 밀려드는 거센 물을 수저로 퍼내는 것과 같았다. 발진이 얼굴의 경계를 넘어 몸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밤 : 5월 초


발진은 가슴을 지나 배까지 내려갔다. 특히 가슴은 종일 브래지어를 하고 있어서인지 딱지가 앉을 겨를이 없어 고름과 피가 마르지 않았다. 나는 순면으로 브래지어 안에 넣을 패드를 수십 장 만들어 학교 가는 길에 10장씩 넣어주었다. 쉬는 시간에 2시간 간격으로 교체했다고 밤에 꺼내 놓은 패드는 고름과 피범벅 덩어리였다. 물에 담가 두었다가 아이가 잠들면 늦은 밤 패드를 빨았다. 아무리 독하게 맘먹으려고 해도 패드를 빨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마나 아프고 쓰리고 가렵고 고통스러웠을까. 이걸 갈아 끼웠을 딸을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별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게 더 절망적이었다. 과연 나을 수는 있을까?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다시 피부과에 찾아가 잠시라도 원래의 피부로 돌려놓고 싶은 절박한 마음에 조바심이 나면 ‘밥 줘! 밥 줘! 더 줘! 더 줘!’ 약사의 리얼한 손짓과 음성이 벼락 치듯 떠올라 나를 다잡아 주었다. 진퇴양난, 악전고투의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5월 초순의 밤, 잠자리에 들지 않고 책상에 앉아 있던 딸이 엄마를 불렀다.

“엄마, 아무래도 학교를 못 다닐 것 같아.”

숨이 턱 막혔다.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물었다.

“그래, 좀 쉬어도 되지. 그런데 왜?”

“필기를 할 수도 없어. 칠판을 쳐다보려고 고개를 들면 얼굴이 찢어져 피가 흘러.”

딸의 얼굴은 고름이 잡혀 딱지가 앉았다가 더께가 되고 저절로 떨어지면 다시 고름이 잡히면서 피부가 습자지처럼 얇아져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 주위로 아직 떨어지지 않은 딱지가 있어 얼굴을 돌리든지 고개를 들면 그 얇아진 부분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다.

“그래! 그럼 휴학하고 치료에 전념해보자. 그럼 더 빨리 좋아질 수도 있어.”

“… 나 나을 수는 있을까?”

“…”

확신을 주어야 하는데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딸이 말했다.

“… 나 죽고 싶어.”

순간 도끼가 날아와 내 정수리를 쪼개는 것 같았다. 딸도 나도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죽을힘을 다해 애썼는데 그 눈물이 내가 먼저 터졌다. 그리고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그래? 죽자, 죽어! 엄마도 너 죽고 어떻게 살겠니? 그냥 같이 죽자. 여기 12층에서 뛰어내리면 되겠네. 이 나쁜 놈아! 어떻게 엄마 앞에서 죽는다는 소리를 해? 너도 힘든 줄 알지만 엄마도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데… 이 못된 놈아! 어떻게 죽는다는 소리를 해! 너 죽고 엄마 죽으면 아빠는 어떻게 살고 언니랑 동생은 어떻게 살아? 그러니 다 같이 죽으면 되겠네. 다 같이 죽자, 그냥 다 같이 죽어!!”

내가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딸이 나쁜 맘을 먹을까 그게 두려워 더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나을 것 같지 않으니까…. 나 이렇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엄마도 나 때문에 너무 힘들잖아.”

딸도 울기 시작했다.

잠들었던 식구들이 모두 깨 방에 들어와 뒤에 병풍처럼 서 있었다. (계속)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하였다. 저서로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