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아토피 극복기 3

딸의 아토피 극복기 3

2020-06-25 0 By worldview

월드뷰 06 JUNE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글/ 조혜경(소설가)


남도의 한 한약방을 찾아 : 5월 중순


그날 밤 딸과 나는 더 참지도, 숨기지도 않고 맘껏 울었다. 얼마를 울었을까. 남편은 다른 두 딸을 방에서 내보내고 딸과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둘의 울음이 잦아들자 남편이 말했다.

“○○야! 엄마, 아빠를 믿어! 한국에서 안 되면 미국, 미국에서 안 되면 유럽, 지구 끝까지라도 의사를 찾아 반드시 너를 고쳐줄게! 엄마 아빠보다 너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도 절대로 너를 이대로 두시지 않을 거야. 우리 사랑스런 ○○에게 이런 힘든 시련이 온 것은 분명 어떤 뜻이 있다고 아빠는 믿어. 이제까지도 잘 참고 견뎠으니 하나님을 믿고, 아빠, 엄마를 의지하고, 조금만 더 견디면서 치료책을 찾아보자!”

병이 시작된 이래 딸이 잠들면 조용히 딸의 머리맡에서 날마다 기도해주었던 남편은 그 밤 딸과 내 손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해주었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 같던 그 밤 이후 나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조마조마하게 다가오던 폭탄이 터져버린 것 같았다. 단거리 계주가 아니고 장거리 마라톤의 자세로 마음도 다잡았다. 딸도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힘든 엄마를 보며 괜히 미안하고 죄송했는데, 오히려 자신을 향한 부모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 자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스테로이드를 포기하자 얼굴, 가슴, 배, 등 부위마다 조금씩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온몸에서 진물과 고름과 피가 흘렀다.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었다던 욥이 이해되었다. 속수무책 당하고 있을 즈음 지인이 멀리 남도의 한 한약방을 소개해 주었다. 한의사가 용하기도 하고 특히 지리산에서 나는 약초만 사용해서 약을 짓는다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휴일인 석가탄신일, 나는 딸과 남도의 한약방을 찾아갔다. 딸의 진맥을 마치고 얼굴이며 몸을 자세히 들여다본 할아버지 한의사가 말했다.

“아이고! 양약을 많이 썼구나! 위장에서부터 시작된 거야. 약을 끊으니까 솟아 나오고 있고만. 이게 다 뿜어져 나와야 하는데…, 지금 약 지어서 먹고 치료 시작하면 지금보다 더 올라올 텐데…, 괜찮겠어? 방학 때 시작할까?”

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지금 할래요.”

딸의 진맥을 마친 한의사는 시종 어두운 얼굴로 옆에 앉아 있는 내게 말했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피부병으로 죽진 않아요.”

한약방에 다녀온 이틀 뒤 약이 배달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자 한의사의 말처럼 독소가 밖으로 배출되는 것인지 딸의 몸은 더 만신창이가 되었다. 진물과 고름이 훨씬 심해지고, 얼굴은 피부가 낭창낭창해져서 고개를 들거나 옆으로 틀지 않아도 여기저기 피가 흘렀다. 그렇게 상태가 심해져도 한의사의 말대로 호전되는 과정이라고 믿으니 더는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피부병으로 죽진 않는다.’는 한의사 말이 표어처럼 내 머리에 박혀 위안이 되었다.

날마다 이불과 베개 커버를 벗겨 빨고 말리고 다림질했다. 나중엔 커다란 타올을 사서 깔고 자고 타올만 걷어내 빠는 식으로 요령도 생겼다. 학교에서는 도시락 먹는 친구 숫자가 더 늘어 함께 펼쳐놓고 먹으니 맛있는 게 너무 많다고도 했다. 딸이 필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필기한 노트를 빌려주는 친구도 생겼다.

한약방에서 한 번에 보름쯤 먹는 약이 택배로 배달되었고, 다 먹으면 전화로 한의사에게 딸의 상태를 말하고 다시 약을 짓는 식으로 다섯 재를 먹었다. 길고 지루한, 호전되는 과정이 너무 더딘 날들이었다.

한약을 먹으면서 더욱 마음을 썼던 것은 매일의 먹거리였다. 딸의 체질엔 고기 종류가 좋지 않았다. 친구 생일파티에 갔다 오거나 학교에서 시험이 끝나고 학부모들이 넣어주는 간식으로 치킨이나 피자, 햄버거를 먹은 다음 날은 상태가 더 심해졌다. 음식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달여 동안의 한방치료는 더디고 더뎠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자 더 나빠지지 않았고, 매우 조금씩, 갓난아기 새끼손톱만큼씩 상태가 좋아졌다. 그러나 더 심해지지 않는 것만도 힘이 되었다. 아마도 지인으로부터 중국의 명의를 소개받지 않았다면 남도의 그 한의사에게 의지해 계속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중국의 명의를 찾아/ 백두산의 유황온천에 몸을 담그고 : 7월 말-8월 초


중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침을 잘 놓는다는 중국의 명의를 소개받고 나는 딸의 방학이 시작하는 날로 연길행 온 가족의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남편의 평생 동역자이신 권사님 내외분이 이 치료 여행에 동행해주셨다.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중의사는 딸의 얼굴을 보고 진맥하더니 간단히 말했다.

“아토피입니다. 약을 써봅시다.”

“침은요?”

“스무 살 안 된 아이들은 침 안 줍니다. 침은 어른들이 맞읍시다!”

침을 뛰어나게 잘 놓는다는 말에 딸에 대한 침 치료를 기대했던 나는 좀 당황했다.

“좋아질까요?”

“여기 오신 것만으로도 좋아질 겁니다. 원래 중국에서도 남방 사람이 병이 나면 북방으로, 북방 사람이 병이 나면 남방으로 내려가 치료하면 효과가 더 좋습니다. 사는 곳을 멀리 떠나 음식이며 환경을 바꿔 치료하는 것이지요.”

그곳에서는 딸들이 이모처럼 따르는 선교사님 내외분이 합류하셨다. 이왕 갔으니 모든 일행이 진맥을 받고, 성격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약을 지었다. 다음 날부터 아침저녁으로 우리는 모두 약봉지를 입에 물고 약을 마시고 어른들은 하루 한 차례씩 침을 맞았다. 아파트 한 채를 빌려 사용했는데, 아파트 바로 옆 개천을 따라 새벽마다 길게 장이 섰다. 모두 새벽에 일어나 시장 구경을 하며 떡이며 찐빵 만두도 사고, 막 밭에서 뽑아온 채소도 사 가지고 들어와 아침 식사를 준비해 먹었다. 날마다 북적이며 즐겁게 함께 해준 동행들 덕에 심란한 치료 여행이 아니라 행복한 여름 수련회 같았다. 실제로 밤마다 남편이 로마서를 강해했다. 지금 돌아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무서운 터널을 이분들과 함께 손잡고 통과한 것 같아 새삼 감사하다.

길림성 풍습엔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개고기를 대접한다고 한다. 지인의 초대자리에서 딸이 거리낌 없이 개고기를 맛있게 먹을 땐 내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도 했지만 이후 별다른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두만강 상류에서 잡았다는 커다란 물고기, 손바닥만 한 일본산 전복, 북한 송이버섯, 철갑상어 등 희귀한 먹거리들을 맛볼 기회가 왔는데, 딸도 나도 마음 편하게 먹었다. 하루 이틀 약을 먹는 동안 나는 새벽 시장에서, 아침 식탁에서, 택시 안에서 무심한 듯 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진물과 고름으로 범벅이던 상처가 조금씩 꾸덕꾸덕 말라가는 것 같았다. 일주일쯤 지났을 땐 확실히 얼굴에 새로 잡히는 고름 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며 배, 사타구니 같은 몸속의 상처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신기하고 감사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인지라, 반 친구들은 방학과 더불어 바로 보충학습에 들어가 있었기에 딸은 틈틈이 책을 붙잡고 문제를 풀었다. 무엇에든 스트레스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 나는 딸이 책을 볼 때마다 조바심이 났지만, 제지할 수도 없었다.

중국 도착 일주일째 되는 날, 중의사의 권유에 따라 우리 일행은 1박 2일 백두산 관광에 나섰다. 딸에게 백두산의 유황 온천욕을 시켜보자는 것이었다. 천지는 안개에 덮여 끝내 보지 못하고 천지에서 내려와 모두 유황온천탕에 들어갔다. 2008년 여름 당시 백두산 유황온천탕은 시설이며 규모가 그저 우리나라의 좀 큰 동네 허름한 목욕탕 같았다. 유황 냄새가 지독했지만, 온천탕에서 세 딸은 물개처럼 신나게 뒹굴었다.

열흘 중국 일정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딸의 얼굴은 종기의 흔적 하나 없어 곱고 탐스러운 복숭아 같았다. 기적 같았다.


아토피의 후유증


중국에서 돌아올 때 중의사는 약을 두 재 더 지어주었다. 한 재는 딸의 면역력을 높여주는 약이니 계속 먹고, 한 재는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혹시 재발되면 먹이라고 했다.

귀국 후 딸은 바로 여름방학 보충수업에 합류했다. 자기 일처럼 마음 아파하면서, 내색 없이 묵묵히 지켜보시며 도와주고 격려해주던 선생님과 친구들이 크게 기뻐했다. 나는 더 신중하게 도시락을 준비해주었고, 딸도 다시 찾은 맑은 피부의 소중함을 알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은 먹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무엇보다 스스로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딸은 날마다 늦은 밤에라도 나가 줄넘기를 꾸준히 했다.

해를 넘겨 고3 수험생의 과중한 학업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병은 재발하지 않았다. 딸의 학교는 산 밑에 있어 모기가 많았다. 딸이 모기 한 방만 물려와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초조하게 지켜보곤 했지만, 무사히 고3을 넘기고, 딸은 수시로 대학에 들어갔다.

그 힘겨운 가운데도 좋은 성적을 받았던 것인지 졸업식 날 순서지에 보니 성적우수자로 시상자 명단에 딸의 이름이 있었다. 이름이 불리고, 앞에 나가 상을 받고, 돌아서 환히 웃으며 인사하는 딸의 빛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옆에 앉은 남편이 순서지 뒷면 3년 개근자 명단에서 딸의 이름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어 보여주자 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흘렀다.

장하구나! 세상에… 그 와중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교에 다녔구나. 정말 장하다!

우리 가족은 2010년 새 아파트 입주 예정이었고, 공문이 날아왔다. 6월부터 입주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새내기로 대학에 다니던 딸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 나도 같이 새집에 갈 수 있을까?”

딸의 말이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럼!! 당연하지! 엄마가 일단 최선을 다해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새집은 3, 4년 후에 들어가도 돼.”

가슴에 박힌 송곳을 잡아뽑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7월 한 달 동안 날마다 새집에 다니며 수차례 베이크 아웃을 했다. 새집증후군 제거, 피톤치드 분사, 연수기 설치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7월 말 우리 가족은 이불만 싣고 새집에 갔다. 2박 3일, 펜션에 놀러 간 듯 새집에서 먹고 자고 샤워도 하며 생활해보았다. 돌아와 일주일이 지나도 딸에게 별 이상이 나타나지 않아 이사를 결정하고 8월 중순 새집으로 온 가족이 이사했다.

딸은 대학 1학년 1학기만 집에서 다니고 결국 교통이 불편해 나머지 대학 생활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더는 얼굴이나 다른 피부엔 발진이 솟지 않았지만, 대학생이 된 후 딸에겐 다른 증상이 하나 나타났다. 손에 습진이 시작된 것이다.

손끝마다 허물이 일어나고, 손바닥 껍질이 벗겨지고, 나중엔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마디가 갈라지고 덧나며 피가 났다. 손바닥이어서 그런지 한번 찢어지면 잘 아물지 않았다. 조금 나았다가 매우 심해졌다가를 반복하는 사이 딸의 손바닥은 막노동하는 남자 손처럼 거칠고 딱딱해졌다. 원인이 무엇일까? 기숙사 방? 식당 밥? 외식? 나는 다시 조바심이 났다.

S 의료원의 피부과 교수님께 특진을 신청했다. 교수님은 커다란 돋보기를 사용하지도 않고 딸의 손바닥을 보더니 1초 만에 말했다.

“아이고! 아토피 후유증이 습진으로 왔구나!”

어릴 때 아토피를 앓은 사람 중에 어른이 되면 후유증으로 사지 말단에 무좀이나 습진이 온다는 것이다. ‘아토피의 후유증’이라고 듣고 나니 이상하리만치 담담해졌다. 약과 연고를 처방받고 우리는 바로 스테로이드 연고가 몇 단계에 있는지 검색했다. 매우 약한 연고라는 것을 확인하고도 딸은 약을 먹는 것도 연고를 바르는 것도 주저했다.

딸의 손에 나타난 습진은 대학 생활 내내 딸의 일상을 쥐락펴락하는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심할 땐 손바닥이 너무 갈라지고 엉망이 되어 주먹을 쥘 수도, 더구나 필기도구를 잡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주로 시험 기간에 그런 일이 잦았는데, 아마도 시험의 스트레스가 병을 더 악화시키는 것 같았다. 딸은 상태가 매우 심할 때만 잠시 연고를 발라 상처를 가라앉히고 되도록 스테로이드를 바르지 않으려고 애썼다.

화학을 전공한 딸은 결국 손 때문에 실험과 실습을 주로 하는 화학 전공으로 계속 공부하기를 포기했다. 4학년이 되면서 더욱 심해진 습진으로 선뜻 취업으로 나가지 못하고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엄마, 의전원에 갈까?”

“… 의사가 되고 싶어? 쉽지 않을 텐데….”

“그동안 병원 다니고, 치료하면서 계속 생각했던 거야.”

“그래? 그렇다면 한번 도전해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하면서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지.”

졸업 후, 딸은 집에 들어와 끈질기게 계속되는 손의 습진과 싸워가면서 의학전문대학원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청소년수련관 새벽반에 등록하여 수영도 하고, 집에서 도서관까지 늘 걸어 다니며 체력을 키우려고 애를 썼다.

2년 후, 딸은 의과대학에 편입으로 합격했고, 벌써 4년이 지나 올해 졸업했다. 이 글을 정리하는 이즈음 딸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인턴으로 석 달째 출근 중이다.

지금도 간간이 습진이 들고 일어나지만, 이제 딸 스스로 잘 조절하며 관리하는 것 같다. 어쩌면 습진은 평생 딸의 손에서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글의 제목이 아토피 치유기가 아니고 극복기인 이유다.

엄마는 늘 내게 말씀하셨다.

“세상에 공짜가 없단다. 잃는 게 있으면 반드시 얻는 게 있지.”

딸이 무엇을 전공할지, 실력이 있는 의사가 될지 그것은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자신 앞에 앉은 환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리라는 것, 그러므로 안타까움과 따뜻한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해주리라는 것이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 18:6).”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하였다. 저서로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