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용서
2019-05-28어머니의 용서
월드뷰 05 MAY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1 |
최충희/ 작가
“자넨가? 그래 그동안 잘 지냈고? 아이들은? 음, 음…… 그래. 나도 잘 지내고 있네… 내가 왜 갑자기 전화했는지 궁금하지? 다름이 아니고 … 그동안 내가 자네한테 섭섭하게 한 것 있으면 용서해 주기 바라네. 그리고 자네가 나한테 섭섭하게 한 것들도 용서해 주려고 전화한 걸세. 자네가 내게 했던 섭섭한 일들 다 잊기로 했어. 자네를 용서하겠네…… 응. 응. 그럼 알지. 울지 말게! 내 마음 받아줘서 고맙네. 다 지난 일인 걸. 그래, 그래 ……”
어머니의 전화 통화는 그렇게 비슷한 내용으로 몇 차례나 계속되었습니다. 간혹, 어머니께서도 우시는지 떨리고 가라앉은 음성이 안방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아버지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받은 상처는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배신의 상처도 컸지만, 아버지를 둘러싼 친척들의 반응이 어머니로서는 너무나 의외였던 것입니다. ‘형님, 형님’하며 따르던 동서들까지 아버지 눈 밖에 날까 봐 등을 돌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요.
어머니는 무엇이든 솔선수범하고 집안 대소사를 맡으셨기에 친척들에게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지혜가 남다른 어머니는 어려움 가운데 있던 아버지의 회사를 일으키는데도 막중한 내조를 하셨고, 집안의 남자들까지 어머니를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야말로 현모양처였던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가족들에게 소외 당하고 배척받았으니 그 마음의 아픔과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요. 어머니의 상처와 아픔을 공감하기에 당시 저는 너무 어렸습니다.
하루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어머니의 눈에 십자가가 들어왔습니다. 집 가까운 곳에 새 교회당을 짓고 있었던 것이지요. 종손인 아버지에게 시집온 어머니는 종갓집 맏며느리였기에 1년에도 몇 차례씩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 잠깐 다닌 주일학교는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창밖의 십자가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마음에, 다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저 교회가 다 지어지면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꼭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어머니는 교회당이 다 지어지자, 마음에 소원하시던 대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 후 돌아가시기까지 충성스럽게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뒤늦게 다시 시작한 신앙생활에 마음과 정성을 쏟아부으셨지요. 한결같은 사랑으로 구역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가족처럼 챙기고 돌보셨습니다. 과부와 가난한 이웃을 특별한 관심으로 돌보셨고. 쌀을 팔아 혼자가 되신 분들에게 가져다주시기도 하고, 명절 때는 가난한 이웃에게 고기를 나누기도 하셨습니다.
한 번은 새벽 기도를 마친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가운 길바닥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거지 행색을 한 그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고 집으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목욕을 하게 하고 갈아입을 옷을 주고 따뜻한 식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또 한 번은 길을 잃은 할머니를 모시고 왔는데, 나중에는 그 할머니를 어머니로 삼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까이 지내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께서는 소외되고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각별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쓰는 일에는 유별나게 아끼시는 분이, 남을 돕는 일에는 그 손이 크고 너그러우셨습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어머니의 신앙생활은 하루가 다르게 깊어져 갔습니다. 어머니 곁에는 늘 붉은 색연필로 군데군데 줄이 그어진 성경책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입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는 김장 배추를 씻다가 감기에 걸리셨는데, 기침이 오래도록 멎지 않았습니다. 감기약으로는 낫지 않아 종합 병원에 가보니 천식이라고 했습니다. 천식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호흡 곤란이 자주 찾아왔습니다. 기침이 시작되고 숨이 가빠지면 한두 주는 병원에 입원해 약물 치료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병이 깊어지자 어머니는 ‘이 병이 나을 병인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실 병인가?’ 궁금해하셨지요. 어머니는 치료를 받기는 하셨지만 병 낫기만을 위해 집착하거나, 일상을 도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마지막 날을 준비하기라도 하시듯, 주변 관계를 하나하나 정리해 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등을 돌린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깊은 어머니라도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아픔을 준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지요! 친척들은 생각지도 못한 어머니의 전화에 오히려 당황하고 미안해하며 몸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작은어머니들도 울며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자신들도 죄책감에 그동안 편치 않았노라고 고백하시면서 말이지요.
그렇게 화해 전화를 하시던 어머니가 마지막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새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부덕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하시면서,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뜻밖의 전화를 받은 새어머니는 당황해하시면서도 많이 고마워하셨습니다.
그렇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신 어머니는 며칠 뒤 잠자리에 들기 전, 저희 부부를 불러 놓고 함께 예배를 드리자고 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라는 찬송을 부르시고 이사야서 말씀을 읽으신 후,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며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이어지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어느 순간 잦아들었습니다. 그렇게 끊긴 어머니의 기도는 다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머니 마지막 기도,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린 마지막 예배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은 목사님과 성도들이 원하는 대로, 교회 예배당에서 교회장으로 집례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온 교우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외로운 이웃들의 방문과 환송을 받으며 떠나셨습니다. 쉰 다섯이라는 결코 많지 않은 나이에 하나님 품으로 행복하게,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셨지요.
저는 어머니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새어머니께 성경책과 찬송가를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새어머니께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용서는 사랑의 강물이 되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와 사랑의 강가에 생명이 자라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새어머니는 저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딸 충희 보아라! 그동안도 주 안에서 은아 아빠와 은아 너의 가족 모두들 평안할 줄 믿는다. 목회가 어렵지는 않느냐? 나는 너희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고 그저 하나님께 너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밖에는 없구나. 부디,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은아 아빠나 너나 건강에 항상 유의하거라. 나는 요즘 네가 소개해 준 여전도사님과 친구가 되어 자주 만나고 좋은 교제를 나누고 있단다. 내가 주님을 몰랐다면 지금 어떠했을까? 충희야! 고맙다. 하나님을 아는 행복을 전해주어서! 잘 있거라!’ –엄마가
새어머니가 보내 주신 편지 갈피에는 앞뜰 단풍나무에서 따다 말린 단풍잎이 새어머니의 미소처럼 붉고 곱게 웃음 짓고 있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 전서 3:8-9)
<choi.choonghee@gmail.com>
최충희 작가 | 미국 세인트루이스 한인장로교회에서 사모로 섬기다가 2000년 미주 교양지 <광야>에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지에 <너, 하나님의 사람아!>와 <일분 묵상>을 연재했으며 해외기독문학 회원으로 다수의 시와 수필을 발표했다. 하트앤 서울 미주 복음방송에서 <최충희 칼럼>과 <성경 속 인물 산책>을 진행했다. 저서로 <희망 온 에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