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위협하는 사상의 뿌리
2019-01-02기독교를 위협하는 사상의 뿌리
월드뷰 01 JANUARY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OVER STORY |
이번 호의 커버 스토리는 총신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과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이상원 교수의 견해로 꾸몄습니다. 2019년 한 해 동안 기독교를 위협하는 세계관을 중심으로 각 분야를 조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세계관 충돌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그리고 각 영역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들어봅니다. 이상원 교수는 총신대 부총장이며, 총신 신대원 원장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하고, 네덜란드 캄펜신학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보스톤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리히트 대학에서도 공부했습니다. <월드뷰>의 고정 칼럼리스트로도 수고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본보 김승욱 편집장이 했습니다.
김승욱: 평소에도 좋은 칼럼을 통해서 기여하고 계신데, 이렇게 2019년 새해 첫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세계는 세계관 충돌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교회도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물질주의 세계관이나 기복주의 세계관 등의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마는, 요즘에는 새로운 위협 하에 놓인 것 같습니다. 가정의 해체라든지, 타 종교(이슬람)로부터의 도전, 네오마르크시즘의 확산 등 다양한 사조들이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든 위협의 시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상원: 우리나라에 이 문제에 저보다 정통한 전문가들이 몇 분 계시는데, 제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되어서 송구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현대 세계 특히, 서구 세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관 충돌의 배경에는 두 가지 철학 사조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비판철학입니다. 칸트는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어느 정도까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칸트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15년 동안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학문 분야를 탐구했습니다. 칸트의 탐구결과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의 논지는 한 줄로 표현됩니다. “순수이성을 통해서는 현상계에 관하여는 지식을 얻을 수 있으나 본체계에 대해서는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다.” 현상계는 형이하학의 세계 곧 물질계를 뜻하며, 본체계는 형이상학의 세계 – 이 세계에 하나님, 영, 내세 등과 같은 신학적 주제들이 속합니다 – 를 뜻합니다. 이것이 칸트의 비판철학인데, 칸트의 비판철학은 서구 지성계 특히 신학계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과 같은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고, 지금까지도 이 핵폭풍의 후유증으로부터 서구 교회와 신학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 변화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칸트 이전에는 형이상학의 세계 곧 신학의 주제들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신학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 결과 어마어마한 신학서적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방대한 저서들, 어거스틴의 저서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들, 루터와 칼빈의 저서들 등이 당당한 학문의 이름으로 등장했죠. 그러나 칸트의 비판철학은 이 모든 신학적 유산들을 모두 보따리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의미했어요. 이제는 물질의 세계가 일상의 삶의 영역에서 전부가 되고 신학은 퇴출되는 유물론(materialism)이 지배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칸트의 철학은 약 100년가량이 지난 후에는 대중화되어 칸트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시골농부도 칸트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농부가 교회 와서 예배에 참석하여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목사님이 하나님과 내세에 대해 얘기하면 농부가 마음 속으로 ‘목사님 설교는 말이 안 돼. 저런 주제들에 대해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거 아니야?’ 하면서 앉아 있게 된 거예요. 결국 청중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서구교회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김승욱: 그렇다면 세계관 충돌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 철학 사조는 무엇입니까?
이상원: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직관론(intuitionism)’과 ‘정서론(emotivism)’입니다. 직관론의 논증은 ‘내가 직관으로 딱 느끼는 것, 그것이 진리고 선이다’라는 것입니다. 직관은 곧 정서 혹은 감정을 의미하므로 나의 감정이 어떤 것을 좋다고 느끼면 선이 되고, 참되다고 판단하면 진리가 된다는 것이 정서론의 주장입니다. 직관론이나 정서론은 철저하게 주관적이며,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철학입니다. 이 두 철학이 100년 후에 대중화되어 현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지요.
김승욱: 유럽에 비해서 미국은 기독교가 상대적으로 건재한 것 같습니다. 특히 유럽교회가 텅텅 비어 있는 상태인데, 현대 서구교회의 실태에 대하여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이상원: 서구 기독교 사회, 특히 유럽의 기독교가 붕괴되기 시작한 시기는 신학적으로는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 ~ 1834)가 등장한 때라고 볼 수 있어요. 슐라이에르마허의 설교를 들었던 청중들이 바로 칸트의 영향을 받아 초월의 세계에 대하여 시큰둥한 자들이었어요. 설교자가 내세나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면 이런 주제들에 대하여 인간은 알 수가 없다는 불가지론자들이 대세가 된 것이지요.
슐라이에르마허는 이런 청중들을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했죠. 슐라이에르마허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었어요. 하나는 초월의 세계 안에 구원의 진리들이 속해 있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면서 청중들이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칸트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 청중을 설득하여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이도록 변화시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길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이었어요.
다른 하나는 청중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말하지 않거나 빼버리고 성경의 교리들을 청중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로 재해석하여 소개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대인들에게 아부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중에서 슐라이에르마허가 선택한 것은 두 번째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초월적 내용들은 전부 빼버리거나, 단순한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재해석해 버렸습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두 번째 길을 선택했고, 그 이후에 등장한 이른바 현대신학이라고 부르는 전통- 슐라이에르마허, 하르낙, 리츌, 트로엘취, 헤르만 등의 구자유주의 전통,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의 신정통주의, 정치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과정신학 등과 같은 신자유주의 등 – 은 내부에서 세부적인 강조점의 차이는 있었어도 기본적으로는 이 길을 따랐습니다. 주로 저명한 종합대학 안에 있는 서구의 명문 신학대학들은 거의 100% 이 길을 따랐습니다. 초월을 말하지 않거나 초월의 세계의 실제를 부정하는 신학은 실은 2류나 3류 철학에 불과한 것이었고 결국 사상적으로 교회를 황폐하게 하는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주로 명문 종합대학 –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 등 – 산하의 신학대학들은 유럽의 전철을 그대로 따랐고 이 신학대학들을 산하에 두고 있는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그리스도의 교회 등의 주류교단들은 급속히 쇠퇴해 가고 있어요. 다만 미국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침례교의 상당한 부분과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 그리고 철저한 교리적인 전통을 유지하면서 주류 장로교단으로부터 결별한 장로교 전통의 교단들은 부흥하고 있어요. 이 세력이 미국 국민들의 약 17%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요. 바로 이 세력이 이른바 “church-going Christians”으로서 미국교회의 희망이 되고 있어요.
김승욱: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 국가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이번에는 한국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원: 한국교회의 경우에 명문 기독교사학으로 알려져 있는 대부분의 종합대학 산하 신학대학들은 슐라이에르마허가 선택한 신학의 길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어요. 이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학교들은 개신교 정통신학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학문이라고 규정하여 폐기하고 현대 학문의 세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현대인들의 성향과 기호에 아부하는 방법론을 선택했어요. 이 학교들에서는 창세기 1장에서 10장까지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거나,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포기하고 보편구원론을 주장하거나, 모든 종교에 다 참된 구원의 체계가 있다고 주장하거나,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속의 정치적인 공동체로 환원시키는 등의 입장에 대체로 합의하고 있어요. 이런 주장들은 기독교의 정체성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오는 것들이고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게 되지요.
다만 한국교회의 경우에는 장로교의 주류가 철저한 개혁주의적인 정통신학을 견지해 오고 있고 여기에 침례교의 상당한 부분과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 큰 틀에서 입장을 같이 해 오고 있고 자유주의 전통의 교단이라 해도 현장 교회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통신학의 터전을 잃지 않고 있어요. 이 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보고 이 희망의 불씨를 살려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만 신학적으로 바른 정통신학을 견지하는 진영에서 바른 정통신학에 부응하는 바르고 정통적인 삶이 뒤따르지 않고 있어서 사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점은 심각한 자체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김승욱: 이게 각론으로 들어가서, 먼저 가정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요. 서구도 그렇지만 한국 사회도 가정파괴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혼율도 높아지고 있고, 특히 출생률의 경우 한국은 너무 낮아 앞으로 생산가능인구의 부족이 심각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동거도 보편화되기 시작하고 황혼 이혼도 많아지고 이런 가정 파괴 문제로 인해서 자녀들이 피해를 보고 사회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상원: 이 문제도 결국 현대인을 지배하는 두 가지 철학적 사조와 긴밀한 관련이 있습니다. 유물론은 초월의 차원을 현대인의 삶에서 제거해 버렸고, 직각론과 정서론은 타인과 사회를 현대인의 삶에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초월성, 타인, 그리고 사회를 제거한 현대인들은 파편화되고 주관화되고 개인주의화된 가치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등산가가 산 전체를 알고 있어야 심산유곡에서 길을 잃지 않고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인류전체를 한 눈에 조망하면서 길을 제시하는 초월자 하나님만이 인류가 나아갈 길을 바르게 제시할 수 있고, 항상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면서 삶의 내용을 결정해야 바른 인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요. 이 두 가지가 결여되면 미로 속에 빠지게 되지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형성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결혼질서는 인류 전체를 아시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보편적인 질서로서 이 질서를 깨뜨리면 인류는 미궁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2:24에 규정된 결혼질서는 단지 기독교인들만을 위하여 주어진 질서가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주어진 질서예요. 이 질서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주신 보편적 질서라는 초월적 인식이 약화 되는 것이 결혼질서가 무너지게 되는 신학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
또한 결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면 관계가 깨질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이혼을 한다고 해요. 이때 이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혼을 하는 경우에 배우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지, 자녀에게 끼치는 영향을 어떤 것인지, 다른 가족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또 어떤 것인지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황혼 이혼은 결국 상대방을 위하여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이제는 나의 행복만을 찾겠다는 것인데, 여기에 매우 잔인한 요소가 있어요. 늙어가는 배우자는 몸도 약해지고 경제력도 약해져서 점점 더 상대방의 배려와 도움이 필요해지는 시기로 접어드는데 그 짐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김승욱: 자기중심성은 인간의 본성이니까 어느 시대에나 있었을 것인데. 요즘 더 심화되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여행하고 놀기 위해서 결혼도 늦추고 자녀 키우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고요. 성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신체적인 성 보다는 젠더라고 부르는 사회적 성 개념에 영향을 받아 자기가 남자라고 생각하면 남자고, 여자라고 생각하면 여자라고 합니다. 심지어 동성과 성관계도 갖고 결혼하는 것이 문제가 안 된다는 생각이 만연해지고 있고, 국가까지 나서서 이런 일탈적인 성윤리를 권장하고 있어요. 근래에는 교수들도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아야 된다고 해서 받아 보니까 그 내용 중에 존 머니가 얘기한 것처럼 타고난 성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자기의 성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어요. 이런 사회적 도전에 대해서 기독교가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상원: 이 문제도 결국 초월성을 제거한 유물론과 사회성을 배제한 직각론적이고 정서론적인 주관주의와 관련이 있어요. 보편적으로 주어진 규범적인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나의 주관적인 감성을 진리에 대한 판단근거로 삼는 태도가 성윤리에도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도 아까 말했던 직관론이나 정서론과 맞닿아 있는데 내가 감정적으로 옳고 좋다고 판단하는 것이 진리다, 이런 것이 보편화 되면서 성 문제에도 적용이 된 거죠. 지적하신 것처럼 젠더는 나의 주관적인 감정에 따라서 성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젠더개념은 현대 성윤리의 근간을 뒤엎는 혁명적인 발상인데, 이 발상이 마르크스주의와도 연계되어 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마르크스가 영국에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현실을 인식하고 구조적으로 비판했고,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이 구조를 뒤집어엎을 기획을 하기 시작했지요.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계급인 프로레타리아의 자의식적인 혁명을 통하여 자본가계급인 부르조아를 축출하고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는 사회”를 세우려고 했어요. 마르크스주의는 비현실적인 낙관적 인간관 위에 사회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어요. 인간은 능력만큼 일하면 일한만큼 가지고 싶어 하지 필요만큼 가지려고 하는 존재는 아니거든요. 만약 그런 존재가 되려면 철저하게 이타적이라야 하는데 타락한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타적인 존재가 아니거든요. 능력만큼 일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무후무한 독재적 국가권력이 필요했고, 필요한 만큼만 주니까 창의성과 생산성이 떨어져 마침내는 공산주의 경제체제 자체가 무너지고 만 것이지요.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건설에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변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성에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성을 윤리적 규범으로부터 해방시킨 프로이드의 성 심리학에 주목하면서 이성애적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어 동성 간의 성관계를 포함하는 평등한 사회를 새로운 사회변혁의 모델로 설정하고 해방운동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이른바 신마르크스주의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예요.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사회변혁전략을 그대로 젠더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수립하는 데 적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성애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창출하는 연예 산업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고 인터넷 기업을 포함하여 굴지의 세계적인 기업이 동성애자 CEO의 수하에 들어가면서 이들이 엄청난 재력을 동원하여 동성애합법화 운동에 뛰어 들었어요. 1980년대와 1990년대 어간에 동성애를 합법적인, 윤리적인 문제가 없는 선천적인 성향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많은 과학자들에게 연구 기금을 제공했죠. 그 결과 네이처나 사이언스지에 동성애는 선천적임을 증명한 논문들이 갑자기 나타났죠. 이 논문들이 내린 결론들은 나중에 모두 뒤집어졌어요. 유감스럽게도 서구의 주류 교단들이 성급하게 이 논문들의 연구결과를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여 동성애와 동성혼을 허용하기 시작했어요.
이와 동시에 동성애에 비판적으로 알려진 모든 성경 구절들을 재해석하고 신학적 주제들을 동성애친화적으로 재구성했어요. 특히 후자를 퀴어신학(Queer Theology)이라고 하지요. 퀴어신학은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신학적 주제들 –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부활, 세례, 성찬 –을 외설적이고 동성애적으로 재구성하는 신성모독적인 신학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문재인 정부는 선거공약집에서부터 아예 전통적인 성 개념을 젠더로 바꾸어 정의하면서 젠더평등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고 전방위적으로 동성애를 합법화하고자 하는 시도를 해 왔어요.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등을 모두 동성애친화적인 인사들로 배치했고, 동성애와 동성혼을 허용하는 국가인권기본계획을 이미 통과시켰어요. 이 계획에 맞추어서 젠더,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각종 정책들과 법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또한 초중고 교육현장에서는 이미 젠더 교육이 실시되고 있어요.
김승욱: 성을 젠더로 바꿔서 젠더평등으로 바꾸는 것은 논의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것 같아요. 차별금지법은 이름만 들으면 얼마나 정의로운 것 같습니까. 근데 그 안에 들어가면 반대를 못하게 강압하는 전체주의적 법안입니다. 왜 동성애를 반대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상원: 사실 전통적인 성 개념을 젠더개념으로 바꾸는 것은 어마어마한 학술적인 토론이 필요한 일인데,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부가 개념을 바로 바꿔버린 것은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국가의 기능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특히 현대 국가는 – 민주국가라 하더라도 – 역사상 등장한 어떤 국가보다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합니다. 로마 제국 정부가 막강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들여다보면 할 수 있는 일이 실제로 많지 않았어요. 통신수단이나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한 행사에 제약이 있었던 것이지요. 예컨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하면 현장에 출동하는 것만도 3-4개월씩 걸리거든요. 그래서 과거 로마정부시대에는 기본 치안유지나 세금 징수에만 관여를 했지 나머지는 식민지 정부에 다 위임을 했거든요. 이에 반하여 현대 국가는 통신 및 교통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신속하게 움직일 수가 있고 막강한 화력도 소지하고 있어요. 세금도 어마어마하게 거두어서 재력도 막강하지요. 바로 그러한 국가의 힘을 가지고 젠더 평등 사회 건설을 추진하니 동성애 독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어요.
이 문제를 다룰 때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제안한 ‘영역주권론’의 패러다임이 국가권력의 바른 역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영역주권론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할과 그 한계를 잘 정리하고 있어요. 국가는 하나님으로부터 고유의 소명을 받고, 시민사회도 국가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고유의 소명을 받아서 두 기관이 대등한 입장에서 하나님과 시민들을 섬기도록 규정하고 있어요. 국가와 시민사회는 고유한 소명을 이루어 가면서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가면서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들어 갈 책임을 지고 있지요. 국가와 시민사회는 서로가 고유의 소명에 충실하면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되, 서로가 고유한 소명을 넘어서서 권한을 부당하게 행사하면 저항하고 비판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시민사회의 한 부분인 교회와의 관계를 보면 교회에게 주어진 고유한 소명이 있고 국가에 주어진 소명이 각각 따로 있어요. 국가는 법적인 강제력을 통하여 죄의 세력을 제어하고 사회를 죄의 후유증으로부터 보호해요. 국가가 지닌 정당한 법적 강제력에 대해서 교회도 순응해야 하고요. 반대로 교회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죄를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와 같은 교회의 제어대상에는 국가도 포함됩니다. 국가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교회는 그것을 비판하고 지적해야 합니다. 정부가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동성애 친화적인 사회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명백하게 하나님의 창조질서나 하나님의 규범이나 보편적인 도덕규범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철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욱: 이제 교육문제로 넘어가 보지요. 오늘날 한국의 학교들이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다 보니까 국가가 커리큘럼에 간섭을 하는 등 학교의 자율성을 점점 침해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학교들이 매우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어요. 국가가 최저수준의 학력을 확인할 권리는 있지만, 학교의 설립목적에 맞추어서 가르쳐야 할 내용에까지 간섭하여 마땅히 가르쳐야 할 과목을 가르치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예컨대 기독교학교에서 성경을 의무적으로 가르치지 못하게 하거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방식의 간섭은 심각한 교권침해라고 보는데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이상원: 저도 교육현장에 있으면서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는 건데 교육부의 일반 사학에 대한 관여가 매우 디테일하고 지나칠 정도라는 느낌을 받아요. 아브라함 카이퍼가 자유대학(Free University)을 설립하면서 국가는 대학을 제정으로 지원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면서도 교육내용은 국가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교육부가 사립학교 재정지원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커리큘럼에 개입하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에요. 사학은 국가의 재정지원을 강조함과 동시에 커리큘럼의 독립성을 강하게 주장해야 합니다. 사실 국가가 재정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모두 국민이 낸 세금을 돌려주는 것에 불과하잖아요? 사학은 필요하면 저항도 해야 합니다. 예컨대, 기독교계 학교에서도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을 차단하는 조치는 다분히 부당한 간섭이거든요. 기독교학교는 설립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이 목적에 따라서 학생을 뽑고 모집요강에도 공지를 하는 것인데, 설립 목적을 구현하는 교육을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은 독재적인 간섭임이 분명합니다. 이 같은 간섭의 배경에는 우리나라 정권의 좌경화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계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교육의 자유의 쟁취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정부의 재정지원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더라도 설립 이념과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각오가 필요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 믿는 자녀들이 일반 학교에서 신앙을 유지하면서 공부하기가 아주 힘들게 되어 있어요. 생물수업시간에 창조론을 주장하면 선생님이 윽박지르면서 위협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왕따시키고 성적으로 보복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또한 기독교인임을 고백하면 놀리고 왕따 시키는 일도 일상화되어 있어요. 기독교인 교수가 동성애를 비판하거나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면 바로 인권센터나 학교당국이나 교육부에 고발이 들어가서 징계대상이 되는 위협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가고 있고, 과학관련 시간에 진화론을 비판하는 발언을 감히 하지 못하는 환경이 되어 있어요. 과연 현대의 대학에 학문의 자유가 있는 지 의심스러워요. 지금을 교육과 학문의 현장에서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필요해요. 기독교계가 적극적인 관심과 때로는 저항운동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와 국가가 중국을 모델로 삼고 따라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중국에 시진핑이 등장하면서 특히 지하교회를 가혹하게 탄압하고 있어요. 국가의 지시를 따르는 삼자교회는 완전 어용입니다. 국가가 목사안수를 줄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내용에 일일이 간섭하여 국가에 위협이 될 만한 부분은 일일이 지정하여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설교의 내용에 대해서도 일일이 간섭하고 있지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정부가 신학교교육에 간섭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교회가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이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서 기독교 교육 권한을 쟁취해야 합니다.
김승욱: 난민들은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외국인 근로자들 권익도 잘 보장을 해주면서 기독교학교에 대해서는 자율을 탄압하는 것이 납득이 안 됩니다. 여하튼 한국교회가 직면한 또 하나의 큰 도전이라고 한다면 점점 이슬람이 영향이 커져가는 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짚어 주시지요.
이상원: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입장 정리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 다음에 국가를 향해서 뭘 요구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첫째, 교회는 종교 다원적인 입장에서 이슬람을 포용하려는 시도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교회 안에 이슬람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레바논입니다. 레바논은 살기 좋은 세계적인 휴양지였고 민주주의가 아주 잘 정착된 나라였고 교회가 융성하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레바논의 교회가 중요한 실수를 했어요. 레바논 교회는 다른 종교를 사랑으로 포용을 하는 관용정책을 썼어요, 즉 이슬람에 대해서 우호 정책을 썼어요. 레바논 교회는 이슬람에 대해서 우호정책을 쓰면서 함께 활동도 하고 교류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공존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 세력이 어느 정도 형성이 되니까 어느 순간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기관총 들고 예배당에 들어와서 예배 방해하고 총을 난사하여 기독교 교인들을 죽이기 시작했어요. 순식간에 레바논 교회가 붕괴되고 지금은 이슬람 천지가 되고 말았어요. 이 이야기는 레바논에서 처녀 시절 교회생활을 하다가 중년을 맞이한 레바논 여성이 깊은 후회를 하면서 증언한 내용이에요. 이 여성은 당시 레바논교회가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에서 관용정책을 편 것을 결정적인 실수로 꼽았어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에 대하여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일부 한국교회는 레바논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경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고 나가야지 그렇지 않고 어설프게 관용정책을 펴면 결국은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지게 됩니다.
이런 태도는 동성애에 대해서도 필요합니다.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는 입장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교회 담임목사는 “우리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동성애는 허용할 수 없다” 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표명해야 합니다. 담임 목사가 어정쩡한 입장을 보이면 동성애자가 들어오게 되고 들어와서 청년부 성경 공부나 그룹 활동 하는데 끼어서 어울리기 시작하면 누룩이 퍼지듯이 퍼지게 되요. 그러면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조금 냉정한 것 같지만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동성애자 교인을 앉혀 놓고 목사님이 회중 앞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었어요. “동성애는 죄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동성애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성애는 죄라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표현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목사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둘째, 교회가 국가를 향하여 이슬람인들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자칫하면 인권문제로 비판을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향해서 국가는 “국민”을 위한 것이지 보편적인 “사람”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헌법 개정안이나 국가인권계획안 등에서 헌법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해 왔어요. 왜냐하면 국민을 사람으로 바꾸게 되면 국경을 초월해서 다 아우를 수 있거든요. 그러나 국가라는 공동체는 국민을 위한 기관이지 모든 세계 인류를 위한 기관은 아니에요. 국가는 국민들을 위한 기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해요.
이슬람 교도라는 이유로 귀화하거나 난민으로 활동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봐요. 그것은 신교(信敎)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슬람교의 특수성을 분명히 인지하고 거기에 대한 대응책을 생각해 두는 것이 필요해요. 예컨대 기독교는 위기의 상황에서 참된 신앙의 표현이 순교로 나타나도록 되어 있어요. 어떤 경우에도 타인들을 상해하거나 국가질서를 교란하는 것으로는 표현되지 않아요. 그러나 이슬람교는 위기의 상황에서 참된 신앙이 이슬람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테러로 표현되도록 구조화되어 있어요.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슬람교도들도 평상시에는 평화롭게 살 수 있어요. 문제는 위기의 순간에 참된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는데, 모든 이슬람교도들에게 이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 문제예요.
김승욱: 이슬람의 결혼관도 문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이슬람 교도들도 국법을 준수해야 하는데, 이들은 교리가 우선이고, 또한 다수의 부인을 허용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나라 여성들이 남자 이슬람교도와 결혼하는 경우에 우리나라 여성들은 당연히 일부일처제를 전제하고 결혼하는데 결혼한 후에 본국에 다른 부인을 두고 있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는 거예요. 한 번 결혼하고 난 이후에는 돌이키기가 아주 어렵다고 하고 잘못하면 여성의 지위가 크게 손상되기도 한다는 거예요. 또한 한국에서는 마치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결혼하면 부인도 강제로 이슬람교도가 돼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고요. 할랄법에 따른 음식규례도 문제가 있다고 해요. 예컨대 할랄법을 따른 도축법 같은 것은 우리나라 식품위생법에 맞지 않을 정도로 다르다고 하더군요. 이런 것들은 이슬람교인들을 국민으로 받아들일 때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상원: 이슬람 교리나 코란 경전을 연구하되 비판하는 입장에서 학문적으로 수준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연구결과를 축적해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슬람을 반대하는데 반대하는 걸 뒷받침할 수 있는 학문적인 결과물들이 매우 빈약합니다. 정부 정책 관계자들도 우리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요구합니다. 근거가 있으면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지요. 근거를 대라고 할 때 상당한 정도의 각주도 달리고 학술적 가치가 있는 책을 적어도 몇 권은 제시해야 합니다. 이슬람을 비판하는 진영에서는 문헌적인 근거는 빈약한 반면에, 이슬람을 찬성하는 진영에서는 문헌이 많거든요. 그러면 지는 겁니다. 결국은 문헌의 질과 양의 싸움이에요.
동성에 문제도 반박 논문도 발표하고 칼럼 등을 통해서 문헌의 양을 늘려야 합니다. 정부기관들은 모든 언론 매체들의 글들을 다 모니터링합니다. 예컨대 <월드뷰>도 발행 되면 국정원에도 들어가고 교육부에도 들어갑니다. 또 동성애 진영에도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 읽힙니다. 이런 글들을 인터넷으로 발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면상으로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어요. 결국은 문헌 분량 싸움이에요. 동성애를 반대하는 칼럼, 실험, 논문, 책 등이 많이 나와야 해요. <월드뷰>에서 인터뷰하고 영상 찍고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정부 기관들이나 동성애 진영도 겉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이런 문헌들을 접하면서 주춤하기도 해요.
이번에 용인시에서 인권조례를 만들어 통과시키려고 했어요. 마침 합동교단 용인노회와 제가 회장으로 섬기고 있는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가 공동으로 용인지역에서 약 100명가량의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동성애 세미나를 했어요. 세미나에 참석한 목사님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용인시를 찾아가 항의를 해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3개월간 유보시켰어요. 그 다음에 용인시가 인권조례안을 보여 주면서 “이 조례안에는 동성애라는 단어가 한마디도 없는데, 어떻게 이 조례가 동성애반대조례가 되느냐?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인권조례안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해요. 용인노회의 목사님이 인권조례를 저에게 가져 와서 뭐가 문제인가를 문건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제가 인권조례안을 검토해 보았지요.
외형상 인권조례안에는 동성애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아요. 인권조례안에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한다고만 되어 있어요. 문제는 인권조례는 용인시 인권위원회 설립을 규정하고 있고 용인시 인권위원회가 운영하도록 되어 있어요. 바로 여기에 함정이 숨어 있는 거예요. 용인시 인권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 산하 기관이거든요. 따라서 용인시 인권조례안은 상위법이자 모법인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르도록 되어 있어요, 인권조례안에 “사회적 약자”를 명기하고 있는데, 그 범주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러면 범주에 대해서는 모법인 국가인권위원회법을 따라야 하는데, 모법에 보면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 조항이 바로 동성애 허용조항인 거예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는 말은 동성애자를 이성애자와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어서 모법에는 동성애자에 대한 비판발언을 금지시키고 있고 직분을 임명할 때 차별하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고 이 규정을 어기면 법적 처벌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권조례안은 실질적으로는 차별금지법이 되는 거예요. 게다가 용인시 인권위원회의 활동을 용인시로부터 독립하여 운영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인권위원회에서 다루는 내용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인권위원회의 활동은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사실상의 동성애 독재의 길이 열리는 거예요.
김승욱: 정말 교묘하게 숨겨놓았군요.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면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겠네요. 문헌으로 자료를 남겨야 한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2019년 한 해 동안 다룰 세계관 충돌의 서론으로 여러 주제를 함께 다루었습니다마는 앞으로 매달 한 분야씩 집중적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교수님의 칼럼을 통해서 좋은 말씀을 많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