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교회의 위기: 우남 이승만을 다시 생각함

사회와 교회의 위기: 우남 이승만을 다시 생각함

2019-01-09 1 By worldview

현 사회적 위기는 자유가치의 훼손
바울의 자유인의 개념
루터의 자유인의 개념
우남의 자유인의 개념

 
사회와 교회의 위기: 우남 이승만을 다시 생각함
 

월드뷰 01 JANUARY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3

 

김철홍/ 장신대 교수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위기는 자유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는 이유는 복음의 자유를 정치적 영역에까지 적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남 이승만의 『독립정신』(1904년)과 『한국교회핍박』(1913년), 그리고 그가 남긴 기독교 개종 초기의 글들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기독교 선각자(先覺者)인지를 보여주는 산 증거다. 우남에 대한 우리의 깊은 무지 때문에 그의 탁월함을 깨달을 때 받는 충격은 더 커진다. 우남은 1899년 한성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래 줄곧 독립 이후 등장할 신생 국가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놀라운 점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20년 전에, 그것도 감옥 안에서 우남은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복음 안에서의 자유인’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이 루터의 종교개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종교개혁과 시민혁명 이후 서구 자유민주주의제도 발전에 바울과 루터의 가르침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1, 바울의 자유인의 개념

바울이 말하는 자유인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4:31-5:1)”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기독교인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노예와 자유인’을 대조할 때,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복음’을 대조한다. 율법주의의 강령은 ‘행하라 그러면 구원받으리라’이다. ‘행하라’의 목적어는 율법이고, 그것은 곧 선(善)을 행하는 선행(善行)이다. 율법주의에서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다. 율법을 지켜 선행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인간에게 선행을 강요한다. 인간은 비자발적으로 마지못해 피동적으로 선행을 하게 된다. 율법주의 안에서 선행은 각각의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다. 자율성이 없다. 강제와 타율성이 인간을 지배한다. 율법주의는 하기 싫어도 주인이 시키므로 억지로 일을 하는 노예와 같은 인간을 만들어낸다.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문제 삼는 것은 행위 구원이 결국 우리를 ‘노예의 삶’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행위구원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substitution)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죄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것을 믿음으로 은혜의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선행과 율법준수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키지 않았지만, 미래의 최후의 심판대에서 심판장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판결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경되었다. ‘의롭다’ 판결로 변경되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5)”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일’ 즉 선행을 하지 않았으므로 원래는 ‘경건하지 않은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미리 앞당겨서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율법 아래 묶여 있는 노예가 아니다. 자유인이다. 자유인이므로 선택권이 있다. 자유의 본질은 선택과 결정권이다. 그리스도인은 ‘선행’을 하면서 살아갈지 아니면 계속 ‘악행’을 하면서 살아갈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갖고 있다. 이를 선택하는데 강요가 전혀 없다. 오직 자율적인 판단과 결정이 있을 뿐이다.

선행은 더 이상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선행을 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앞으로 그가 하는 선행에 대한 보상은 없다. 왜냐하면 선행을 하면 구원받고, 안하면 구원을 못 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주의 안에서 선행에는 보상(reward)이 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로마서 4:4)”라는 말씀이 바로 이점을 지적한다. ‘일하는 자’ 즉 ‘선행을 하는 자’ 혹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자신이 한 선행에 대해 ‘급여’(삯)를 요구하게 된다. 하나님께 자신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요구한다. 행위/일(work)이란 것은 늘 보상(reward)을 청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선행을 하고나서 ‘보상’(reward)을 청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일하지 않았는데도 넘치는 보상을 이미 다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하는 선행은 일(work)이 아니라 봉사(service)다. 행위와 일(work)은 보상(reward)을 요구하지만, 봉사(service)는 보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주의는 노예를 만들어내고, 노예는 타율에 의해 선행을 하고 구원이라는 보상을 청구한다. 하지만 복음은 자유인을 만들어내고, 자유인은 자율에 의해 봉사로 선행을 하는 삶을 산다.

2. 루터의 자유인의 개념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래 이런 자유인의 개념을 가장 먼저 잘 이해한 사람은 마틴 루터다. 그가 95개조 반박문을 쓴 지 3년 후인 1520년에 쓴 『기독교인의 자유』 첫 머리에 그는 이런 두 개의 명제를 제시한다. 사실 『기독교인의 자유』란 책은 이 두 개의 명제에 대한 해설이다.

1)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우위에 서는 자유로운 군주로서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2) 그리스도인은 모든 이에게 봉사하는 하인으로서 모든 이에게 종속된다.1)

첫 번째 명제는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인의 원리다.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다. 한 명, 한 명의 그리스도인은 각각 개인으로서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명의 그리스도인은 한 명의 ‘자유로운 군주’다. 두 번째 명제는 자유인이 된 그리스도인이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 지키는 봉사의 원리다.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에 있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지만, 본인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모든 사람을 섬기는 ‘하인’이 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웃)을 섬기고, 사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살기로 하였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종속된다.’ 바울이 말하는 바를 이보다 더 명쾌하게 요약할 수는 없다. 여기에 ‘자유인 vs. 노예’의 대조가 ‘군주 vs. 하인’의 대조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어 있다.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동시에 봉사하는 하인이라는 루터의 선언은 바울의 자유인의 개념의 핵심을 찌른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 두 가지가 생겨났다. 가톨릭교회만 있을 때에는 개인이 교회를 선택하려해도 선택할 수가 없다. 하지만 개신교 교회가 등장함에 따라 선택이 가능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 각각의 개인이 성경을 직접 읽고 교황의 설명이 성경적인지, 루터의 설명이 성경적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인은 그 복음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인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구원조차도 신(神) 앞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는 존재가 됨으로써 종교개혁은 근대적 사상에 형이상학적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다.2)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근대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개인’이 등장한 첫 사건이다.

로마 가톨릭 교황은 정신적 전제군주와 같고, 가톨릭 신자들은 정신적 노예상태에 있었다. 가톨릭의 구원 교리는 개신교처럼 은혜와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윤리적 행위가 구원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므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그 종교적 패턴이 유사하다. 그러므로 가톨릭은 노예를 만들어내고, 개신교는 자유인을 만들어낸다. 루터가 바울을 결정적으로 이해하고, 종교개혁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유대교 율법주의 vs. 복음,’ 그리고 ‘노예 vs. 자유인’의 대립 구도 안에서 ‘가톨릭 vs. 개신교’의 대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의 원리에 의해 정신적 절대왕정인 가톨릭교회가 무너졌다. 정신적 절대왕정이 무너졌으므로, 향후 시민혁명을 통해 정치적 절대왕정이 무너지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 되었다. 왜냐하면 정신적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개신교도들의 후예들이 정치적 절대왕정을 허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이 자유인의 개념에서 근대의 자유로운 개인이 유래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독교인들이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이 말한 것의 핵심을 루터가 깨달았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종교개혁으로 인해 근대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 현재의 자유인의 제도인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제도가 생겨났는데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점을 잘 모른다.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기독교적 원리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가 교회에 가득하다. 바로 이 무지야 말로 교회의 위기의 원인이고, 오늘 날 한국의 사회적 위기 속에서 교회가 무력하게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이유다.

3. 우남의 자유인의 개념

우남이 탁월한 선각자라는 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을 이미 120년 전에 옥중에서 깨달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루터가 바울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했다면, 우남은 루터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한다. 우남이 옥중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 있는 글 중 “국민의 마음이 먼저 자유로워야 한다.”라는 제목의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상 여덟 가지는 사람의 마음을 결박하여 자주권(自主權, 아무런 속박이나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처리할 수 있는 권리)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데서 오는 폐단이다. 이것을 깨뜨리지 않고는 백성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여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기 어렵다”3)

우남은 국민들이 ‘자주권’을 갖고 있지 않은 노예의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국민들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마음의 결박을 풀지 못하여 아무것도 하려는 생각이 없다”4)고 비판한다. “대한 교우들의 힘쓸 일”(1904년 8월)이란 글에서 우남은 “… 노예의 생각만 길러서 남의 충실한 종이나 될 뿐이니 남의 종질도 충실치 못한 이 보다는 낫다 하려니와 하나님이 동등으로 주신 권리를 회복하는 본의는 어디 있으며 …”5)
라고 말한다. 국민들이 머리에 ‘노예의 생각’ 밖에 없다. 우남은 국민이 정신적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정치적 노예상태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정신적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갖고 있는 개인으로 변화될 때 국가의 독립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우남은 바울과 루터의 ‘자유인 vs. 노예’ 개념을 사용하되, 이 개념을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적용하고 있다.

우남은 감옥 안에서 쓴 글에서 이미 율법의 결박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는 것을 루터의 종교개혁과 미국의 독립과 같은 시민혁명에 연결하고 있다.

“대저 예수께서 세상에 내려 오셔서 … 우리가 가장 감격히 여길 바는 모든 세상 사람의 결박을 다 풀어 놓으신 것이라. 첫째 율법의 결박을 풀어주심이니 … 사람의 생각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낱낱이 벽파하여 주셨나니 … 예수교가 가는 곳 마다 변혁의 주의가 자라난 법이다. 교회로 말 할진데 마틴 루터씨가 교를 고칠 때에 이 뜻을 들어 내었고 정치상으로 말 할진데 워싱턴 씨가 미국을 독립할 때 이 뜻을 들어 내었으며 …”6)

『독립정신』의 “미국 독립의 역사”란 제목의 글에서 우남은 “노예 대접을 달게 받는 사람은 곧 자신의 권리를 잃어버린 사람”7)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런 권리를 무시하고 생명만을 부지하기 위해 노예처럼 사는 것에 만족하겠는가?”8)라고 묻는다. 그 권리가 무엇일까? 바로 다음 글인 “미국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창조주가 주신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 즉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다.9)
우남은 옥중에 있을 때에 이미 바울의 자유인의 개념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종교개혁을 통해 부활했으며, 그 결과 시민혁명이 일어났다는 이해에 이미 도달해 있었다.
우남이 1913년에 쓴 『한국교회핍박』에서 그는 기독교 정치사상가로서 더욱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우남은 예수가 유대교의 부조리들을 일제히 혁신하고 모든 악한 자들로 하여금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한 점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적인 관계는 물론하고, 정치적 관계로만 볼지라도 지나간 옛날에 처음 되는 ‘혁명 주창자’이다”10)
우남은 예수가 우리 영혼의 구원자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를 누리는 정치 제도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요소를 갖고 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시민 혁명의 주창자라고 보았다. 예수가 정치 혁명을 목표로 하지 않고, 영혼의 구원을 목표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후대에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고 본 것이다. 예수와 서양 근대 사이에는 긴 시간적 간격이 있지만, 우남은 신약성경이 서양역사와 예수의 가르침을 이어준다고 보았다.

“(예수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동등자녀 되는 이치와 … 모든 죄악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이치를 다 밝히 가르쳤으니 신약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혁명사상을 얻는 것은 과연 그 책이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는 사람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11)

훗날에 일어날 시민혁명의 씨앗이 ‘자유’에 관한 예수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숨어 있다고 본 것이다. 우남은 가톨릭교회는 인간을 정신적으로 속박하여 노예로 만들고, 절대왕정은 인간을 정치적으로 속박하여 노예로 만든다고 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결국 프로테스탄트교회(개신교)를 온전히 세워 사람마다 자유롭게 성경을 공부하며 직접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결국 이후로 200년 동안 루터가 시작한 개신교가 정치제도를 개혁하기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각국의 정치적 대혁명이 일어났고 오늘날 구미 각국의 동등한 자유를 누리는 모든 인간행복이 여기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틴 루터를 근대문명의 시조라 칭함이 과연 적당하며 이러한 루터선생의 능력은 곧 예수의 진리에서 온 것이다”12)

무려 105년 전인 1913년에 쓴 『한국교회핍박』은 우남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자유민주주의 정치 이념에 대해 갖고 있는 함의(含意)를 꿰뚫어 보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남은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자유가 종교개혁을 거쳐 현대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기초가 된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기독교가 앞으로 독립할 국가에 잠재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그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기독교 복음을 정치의 영역에 적용하여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기독교의 밀접한 관계를 이해한 우남의 이런 생각은 지금 한국의 교회에서 실종 상태다. 신학교에서도 이런 내용을 가르치고 배우지 않는다.

4. 맺음말

그 동안 교회는 대한민국이 발전한 이유가 미국이 전해준 기독교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왔다. 이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상당히 불충분한 설명이다. 우남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설명했을까? 아마도 그는 이렇게 설명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발전한 이유는 자유인(自由人)을 가르치는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생겨난 자유인의 개념에서 자유의 이념(자유주의)이 생겨났고,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만들어 번영한 국가를 이룬 미국처럼 우리도 대통령중심제와 의회주의, 삼권분립에 의한 견제와 법치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적인 재산소유를 보장하며,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경제제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가 가르치는, 한 개인이 갖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 생겨난 이윤은 즉각적인 물질적 만족을 위해 소비하지 않고, 계속해서 미래로 연기하면서 근검하게 사는 기독교적 생활패턴, 법의 요구를 상회(上廻) 하는 높은 기독교적 도덕 기준 등이 어느 정도 우리 사회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교회가 반성해야 할 점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단순히 기독교를 받아들여 생겨난 하나님의 축복으로 설명하는 매우 ‘미신적인’ 설명에 머물러 있어온 것이다. 이런 유치한 설명법이 한국교회 안에 널리 유포됨으로 인해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자유의 개념과 자유의 제도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교회가 우남의 기독교 정치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사회적 위기 속에서 교회가 자유의 보루 역할을 할 수 있을 터이나 지금은 교회 자체조차 흔들리고 있다. 지금 상태라면 김정은 정권이 무너지고 북한 선교의 문이 열려도 노예상태에 있는 북한 동포들을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을 돕기 어렵다. 현재 한국사회의 위기의 본질은 자유의 가치를 방기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자유를 부정하는 세력이 주도하면서 전체주의화의 위협을 받고 있다.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가 먼저 자유의 가치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우남이 복음을 깨달은 지 12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우남은 여전히 우리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CHEOL HONG KIM 김철홍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과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에서 S.T.M in Ecumenics을, 미국 퓰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이다. (paulstudy@naver.com)

 
 
 
 
1) 마틴 루터(2010), 『그리스도인의 자유/루터 생명의 말』, 서울: 동서문화사, 14.
2) 알랭 로랑(2001), 『개인주의의 역사』, 김용민 역, 서울: 한길사, 36-37.
3) 이승만(2010), 『독립정신』, 김충만, 김효선 풀어씀, 서울: 동서문화사, 117.
4) Ibid., 103.
5) “대한 교우들의 힘쓸 일,” 이정식(2005),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급진주의에서 기독교 입국론으로』, 대전: 배재대학교출판부, 388.
6) Ibid., 387.
7) 이승만, 『독립정신』, 76.
8) Ibid., 78.
9) Ibid., 80.
10) 이승만(2008), 『한국교회핍박: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외침』,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편 서울: 청미디어, 178.
11) Ibid, 178.
12) Ibid,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