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3·1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2024-08-12박명수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우남네트워크 공동대표)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 D.)을 공부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학회 회장과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우남네트워크 공동대표이다. 저서로는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 정치(북코리아, 2015)> 등과 최근 연구총서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11권을 편집·발간하였다.
이승만은 3·1 운동의 기획자인가
지난 2019년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3·1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하는 행사가 많이 열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념사에서 이승만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3·1 운동 이후 만들어진 여러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이나 가장 중요한 직책에 거론되었다. 사실 이승만은 상해에서 만들어진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이자, 그다음에 만들어진 통합임시정부의 임시 대통령이었다. 이런 중요한 인물이 왜 3·1 운동 기념식에서 언급되지 않았을까?
최근 이승만을 추모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승만을 ‘3·1 운동의 기획자’라고 주장한다. 하와이에 있는 이승만이 그곳에 들른 사람들에게 3·1 운동을 일으키라고 주문했고, 그들이 일본과 상해, 그리고 국내에서 3·1 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승만이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과 가까운 사이이며, 따라서 국제정세를 잘 아는 이승만이 국내에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고했고, 이 권고를 들은 사람들이 3·1 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해방 직후부터 이승만 추종자들에게 있어 왔지만, 최근 일부 언론을 통하여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필자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한국정치외교사 논총 45집 1호(2023년)에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미친 미주 독립운동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통해 상당히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당시 이승만의 명성이 3·1 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할 만큼 높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승만이 직접 3·1 운동을 기획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하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승만이 직접 3·1 운동을 기획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당시 이승만의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이런 일들을 주도했다고 믿었으며, 이 소문이 실제로 3·1 운동의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필자는 이 논문에서 지금까지 잘 인용되지 않고 있던 이승만이 직접 쓴 문서 “The 1919 Movement”를 소개하였다. 이 문서는 일부 사람들이 이승만과 3·1 운동의 관계에 대해 오해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승만 박사가 직접 작성한 것이다. 필자는 위의 논문에서 이 문서를 인용하여 기존의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했지만, 해당 학술지의 지면 관계상 문서의 전부를 소개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기에 이 문서를 좀 더 자세히 소개하려고 한다.
필자는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으로부터 이 문서를 제공받았고, 이 문서는 6페이지에 이른다.
이승만과 1917년 뉴욕의 소약국대회
이승만은 이 문서에서 자신과 3·1 운동의 관계를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소약국연맹대회에 대해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소약국연맹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게 소약국들을 독립시켜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1917년 6월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유명한 핀란드 여성민족운동가인 말렌스트롬(Malenstrom)이 그곳에 와서 연설하였다. 이 여성은 그해 뉴욕에서 열릴 소약국연맹대회(League of Small Nations)에 한국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하여 하와이에 들렀고, 이곳의 한인들에게 약소민족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하와이 한인들의 깊은 공감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이승만과 하와이 동포들은 1917년 10월에 열린 소약국연맹대회에 대표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박용만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또한 이를 위해 모금을 시작하였는데, 얼마 가지 않아 목표액을 초과 달성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이것을 통하여 하와이 교포들이 얼마나 독립을 갈망하는지 잘 알게 되었다.
박용만은 1917년 10월 뉴욕에 가서 미국의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이 민주주의를 배웠고, 한국인의 소원은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용만의 이 연설은 이승만과 하와이 교포들의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이승만은 그 이후에도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소약국연맹과 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이승만이 3·1 운동 훨씬 이전부터 한국의 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의 항복과 하와이의 이승만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문이 돌자 한국인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하와이의 한인들은 이승만에게 한국을 대표해서 강화회의에 참석하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당시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승만이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민들은 심지어 한인기독학원 때문에 이승만이 강화회의에 가지 못한다면 차라리 한인기독학원을 없애 버려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중 기도회가 끝난 다음 신실한 기독교인인 마리아 손(Mrs. Maria Sohn)이 이승만을 찾아와서 자신의 꿈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꿈에 미풍에 펄럭이는 태극기가 내려오는데, 이승만이 두 팔로 그것을 받은 것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강화회의에 갈 것을 권유하였다. 이승만은 이런 꿈을 믿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이 강화회의에 갈 것을 강력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이승만은 결국 교포들의 열망을 따라 미국 본토로 갈 것을 결정하였다. 1919년 1월 6일 이승만은 조그마한 증기선 엔터프라이즈호를 타고 호놀룰루를 떠났다. 이때 많은 한국인들이 환송을 나왔는데, 그중에는 하와이 선교부의 셴크(Schenck) 목사도 있었다. 그는 조용히 다가와서 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에게 본토로 오라고 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지를 물었다. 이승만은 그에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교 시절부터 윌슨 가족과 잘 알고 있었고 그 가족이 한국 선교에 관심이 있었지만, 윌슨이 이승만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오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윌슨이 이승만과의 관계 때문에 한국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와이에서 본토로 가는 배 안에서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의 예비회담은 통일된 중국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일본이 독일의 식민지였던 중국의 산둥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얼마 후에 첫 번째 회담에서 일본이 중국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것은 미국이 일본의 의사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원래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이 일본에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다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일련의 뉴스는 그에게 조그마한 희망을 안겨 주었다.
파리행 좌절과 뜻밖의 상황 진전
이승만은 워싱턴 D.C.에서 국무부장관 대리 포크(Polk)에게 자신이 한국을 대표해 파리에 가서 강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여권을 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포크는 자신이 결정하기 전에 윌슨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3월 5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로부터 윌슨이 이 박사의 참석을 환영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윌슨은 같은 연합국인 일본의 이익에 반대되는 이승만의 행동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여권 발급은 거부당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자신의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최종적으로 파리에 가려는 생각을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하와이에 있는 한인들에게 이것을 알리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분명하게 파리에 가는 여권을 얻을 수 없었고, 따라서 나는 포기해야만 한다고 적었다. 이 편지는 하와이에서 내 이름과 함께 한글로 인쇄되어 그곳의 한인들에게 배포되었다. 이 회람은 서울의 총독부에 보내졌는데 아마 호놀룰루의 일본 영사관을 통해서였다. 서울의 일본인들은 정확하게 하와이에서 인쇄된 원본과 같은 회람을 만들었고, 전국에 수 천부를 배포하였다.
일본이 이렇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하와이를 떠나 워싱턴으로 가고 있을 때에 내가 윌슨 대통령에게 평화회의에서 한국문제를 다루어 달라고 요청하였고, 대통령은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으나 한국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한국 내에서 소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자신으로서는 회담에서 한국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전국에 널리 퍼져있었다. 물론 이때는 모든 약소국가가 널리 알려진 민족자결주의 원칙과 윌슨의 14개조 안에 포함된 다른 생각들에 깊이 자극을 받은 시기였다. 아무도 이런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많은 사람은 이것을 믿으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들불처럼 온 나라에 퍼졌고, 일본인들은 다시 소요가 일어날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의 회람을 가져다가 내가 파리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인들을 낙심시키려는 목적으로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런데 이 회람을 본 한국인들은 이것이 한국 안에서 불만을 잠재우려는 일본의 조작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것은 일본으로서는 상황을 악화시킨 것이다. 후에 신흥우 박사가 워싱턴으로 이 회람을 가져와 나에게 보여주었고, 나는 아직 이것을 보관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3·1 운동 당시 많은 지도자들은 일본 경찰로부터 ‘왜 3·1 운동을 일으켰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한국문제가 파리강화회의에서 논의되려면 한국인의 강력한 요구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3·1 운동을 일으켰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런 논의의 중심에는 이승만과 윌슨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감리교 웰치(Herbert Welch) 감독이 워싱턴에 와서 이승만을 만났는데, 그는 총독과 일본의 고위관료들이 이승만과 윌슨 사이에 있었다고 알려진 대화가 사실인가를 이승만에게 물어봐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자신을 둘러싼 이런 소문이 1919년 3·1 운동이 확산되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승만이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3월 10일이었다. 그는 상해의 현순 목사로부터 3월 1일에 서울, 평양,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만은 한국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매우 놀랐다.
이승만은 3·1 운동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과연 이승만은 3·1 운동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이승만이 조직적으로 국내의 3·1 독립운동을 기획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특별히 이승만 자신이 이를 부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주의 독립운동, 특별히 이승만의 활동은 많은 사람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많은 사람은 이승만이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이승만과 윌슨의 관계를 과대 해석하여 많은 소문을 만들어 냈다. 실제로 손병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해외의 동포들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국민의 의사표시가 필요했기 때문에 3·1 운동이 일어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과 윌슨의 관계가 3·1 운동의 기원이 되는 동시에 확산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이 점이 이승만이 3·1 운동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하는 열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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