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로 치르는 건국 전쟁

팩트로 치르는 건국 전쟁

2024-08-13 0 By 월드뷰

김성원 (GROUND C 대표)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뒤 한국에 돌아와 청년들을 위한 정치, 역사 연구소 GROUND C를 설립했으며, 동명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또한 정치, 세계사, 한국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세계사를 다룬 <자유의 여정>이 있다.



들어가며


지난 2월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건국 전쟁”이 개봉된 직후, 영화에 쏟아진 찬사만큼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학계, 언론, 한국사 강사 등이 이 비판 대열의 주를 이뤘는데,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승만은 한인들의 후원으로 아주 편하게 독립운동을 했고, 사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유용했으며, 그 뒤 귀국해 미국의 꼭두각시로 활동하다가 분단을 부추겼고, 종국적으로는 신생 대한민국을 파시즘 국가로 만들었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전면 부정하는 이러한 역사관은 기존에 존재하던 것이지만, 근거가 빈약한 이러한 주장들을 방치하면 또 다른 차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조롱하는 왜곡된 역사관이 확장될 것으로 보였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또 다른 건국 전쟁, 즉 ‘팩트로 치르는 건국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다. 올 상반기에 필자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GROUND C)을 통해, ‘이승만은 가짜 독립운동가이고,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잘못된 프레임을 퍼뜨리는 이승만 비판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이를 하나하나 분쇄하는 반론을 펼치며 싸웠다.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정리하는 작업에 고충이 없지 않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많은 청년들이 역사적 진실에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또한 이런 역사 전쟁이 흥미로웠는지 한 메이저 언론사에 필자의 이야기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지면의 한계로 이 사연을 다 담지는 못하겠으나, 독자들에게 이중 일부만 소개하고, 팩트로 치른 건국 전쟁의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첫 번째 반박


필자가 처음으로 반박한 주장은, 영화 개봉 직후 제기된 ‘CIA도 확인한 이승만의 자금 비리설’이다. 모 강사는 이승만을 비판하는 자신의 강의에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돈을 쫓았다. 이건 내가 한 말 아니다. 미국 CIA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 CIA 문건을 부분 발췌해 소개하면서 열변을 토했다. 그가 소개한 CIA 문건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승만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한국을 통치하고자 하는 사적인 목적을 갖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 그는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 활용했던 수단과 방법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번역에도 오류가 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에게는 CIA도 이승만을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인물로 묘사했으며, 더 나아가 이 문건이 이승만의 자금 비리를 입증한 문건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필자가 해당 CIA 문건을 분석한 결과, 이러한 주장은 역사 왜곡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해당 문건의 작성 의도와 주요 내용을 봤을 때, 본 문건은 위 강사가 주장하는 바의 근거로 채택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보고서였기 때문이다. 이 CIA 보고서는 CIA에 의해 1948년 10월 28일에 작성된 “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라는 문건으로써, 제목 그대로 신생 대한민국의 생존에 대한 전망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개인의 성격과 정치인으로서의 역량 분석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승만의 비리를 캐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 강사가 언급하지 않은, 이어지는 문장을 보자. “다만 그가 항상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하기를 거부해 왔다는 중요한 예외를 제외하고, 이는 그가 한국인들의 마음에 반공의 상징이 된 이유다.” 즉, 이 문장을 더해 문단의 본래 의미를 해석하면,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인데,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동시에 그는 반공주의자이며 이 덕분에 국민들의 마음속에 반공의 상징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해당 문건에서 이어지는 모든 내용은 이승만이 신생 대한민국을 위해서 한 일과 어떻게 그가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왜 반공의 상징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모 강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승만의 독립운동가 시절 자금 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이다.
악의적 왜곡도 의심할 만하다. 모 강사의 주장만 보면 CIA는 이승만의 자금 비리를 추적하고 있는 집단처럼 보이지만, 해당 문건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 첫 줄은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시작한다. “이승만은 독립 한국의 최고 이익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위해 행동하는 진정한 애국자다(Rhee Syngman is a genuine patriot acting in what he regards as the best interests of an independent Korea).” 이 문장은 모 강사가 인용한 문장 바로 위 문단에 있다. 그런데도 이 내용을 생략한 채 문건을 부분 발췌했다. 맥락 없이 한 부분만 보고 잘못된 판단을 했거나, 본인의 비뚤어진 역사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귀중한 사료를 왜곡했다는 의심이 든다.
더 나아가 이 CIA 문건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 모두를 기술하고 있는데 초점은 명확하다. CIA가 미 군 수뇌부 대통령 등,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든 문서이기 때문이다. 당시 해방정국 3년 동안 미 정보당국이 가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해당 문건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주요 내용만 발췌해 보겠다.

그는 자신이 한국의 모세인 동시에 예수라고 자처하지만, 자신의 현실적인 정치적 입지가 어렵다는 점을 망각한 적은 거의 없다.

이승만이 지난 3년간 보여준 전술은 민심과 한국 정치의 대세적 흐름에 대한 놀라울 만큼 정확한 판단에 기반한다. 한때는 남한의 임시 정부에 반대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위협할 만큼 극단적인 태도를 보인 적도 있긴 했으나, 전혀 성사될 가능성이 없는 일은 피해 가는 노련함을 거의 잃지 않았다.

이제 이승만은 그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독립된 한국의 한쪽 체제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대통령이 되었다.

그를 통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국회다.

위 문장들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이승만에 대한 당시 미국의 평가는, ‘해방정국 시기 이승만은 미 군정과 갈등을 빚었고 종종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미국의 냉전 전략이라는 큰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결국 민심을 획득했다. 여전히 불안감은 남았지만 이 신생 국가의 지도자는 대한민국 국회로만 통제할 수 있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과 이승만 대통령의 ‘적대적 공존’의 기류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 6·25 전쟁 휴전협정을 놓고 갈등할 때나, 부산 정치 파동 때나, 4·19 정국 때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문건의 성격은 이승만 비리 입증 문서가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 대통령에 대한 미 정보당국의 종합 인물 평가서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러므로 이 CIA 보고서를 이승만의 특정한 개인 비리를 입증하려는 사료로 연결하거나, 비판적인 부분만을 발췌하여 이승만을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결론짓는 것은 문건의 성격과 맥락을 무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반론


두 번째 반론이다. “영화 ‘건국 전쟁’을 통해 이승만의 공적은 이해했는데, 그래도 그는 친일파 아니었나?”와 같은 주장이 대두되었다. 일각에선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승만의 미국 체류 시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 카드에(1918년) 이승만이 자신의 국적을 일본(Japan)으로 표기한 것을 예로 든다. 이런 것만 보면 마치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절 일본인으로 살다가 귀국해 한국인 행세를 한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시절 자신의 국적을 어떻게 표기했을까?
필자는 세계 최대 가계(家系) 데이터 회사 앤세스트리(www.ancestry.com)를 통해 이승만의 출입국 기록을 확인해 보았다. 참고로 이 사이트는 미국에 출입국한 모든 사람들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이승만의 출입국 기록과 국적을 살펴본 결과, 1919년부터 1939년까지 이승만의 모든 출입국 기록에 그의 국적은 하나도 빠짐없이 ‘한국(Korea)’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1919년 외국인 등록증, 1920년 6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하와이행 외국인 탑승객 명단, 1922년 9월 7일 하와이행 외국인 탑승객 명단, 1924년 10월 25일 하와이행 외국인 탑승객 명단, 1933년 8월 10일 하와이행 외국인 탑승객 명단, 그리고 1939년 4월 4일 미국에서 캐나다에 입국할 때도 그의 국적은 한국(Korea)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한 사람의 인생과 독립운동가로서의 순수성과 진실성을 단 한 번의 국적표기로 재단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당시 이승만의 국적 표기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10년에 이미 나라가 망한 상황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이승만이 당시 국적을 ‘한국’으로 썼다가, 1919년 1월에 외국인 등록증이 나오기 전 상황이므로 국적을 ‘일본’으로 써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거나, 191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되기 전에 이승만이 국가라는 개념을 홍보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중에 있었는지, 그의 의도와 관련한 다양한 유추를 할 수 있다. 추가적인 사료가 나오면 당시 이승만의 판단을 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이승만의 일관된 국적 표기와 미국의 도움을 통한 한국의 독립 추구라는 행보를 봤을 때, 이승만이 가슴속에 품었던 진짜 국적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승만에 대한 모든 사료가 증명하듯,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부터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미국을 통한 한국의 독립이라는 외교 투쟁 노선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한 적 없다.


세 번째 반론


세 번째로 이승만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주장해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지구 공공 식민지’로 만들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기상천외한 주장 같겠지만, 역사 교육 현장에서 반복되는 메아리다. 한 한국사 교과서에 “미국정부에 일본 대신 국제연맹이 우리나라를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한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서술이 있을 정도다.
실상은 이렇다. 나라를 잃고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은 1919년 2월 25일, 그의 동지 정한경과 함께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에게 위임통치 청원서를 발송했다. 우드로 윌슨은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교 박사 과정 시절 총장이자 이승만의 은사였다. 제1차 세계대전 종식 즈음 대두된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 창설론에 고무된 이승만이 스승 우드로 윌슨을 설득하여 한국의 독립을 계획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1919년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여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이승만의 행보를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도 팔았다.’며 종미주의자라고 비아냥댄다.
이승만이 청원서를 통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제시한 근본적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윌슨의 국제질서 구상은 피지배 민족들에게 독립 국가를 약속하되, 식민지 국가들의 반발을 예상하여 국제연맹의 통치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 중에 하나인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대국들의 논리로 한국의 독립을 전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승만의 위임통치론 주장은 매국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청원서의 내용에는 1)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 정책과 강제병탄 행위는 부당하며, 2) “장래에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전제”하에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기를 원하고 있다는 주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만약 이것이 현실화되면 한국은 국제적인 중립적 통상지대로 변할 것이며, 동양 평화를 유지하는 완충국으로 남을 것이라 보았다. 당시 경제학자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또한 윌슨의 국제연맹 창설과 모든 국가 사이의 동등한 교역조건의 제정에 찬성했다. 그는 강대국뿐만 아니라, 강대국 간의 충돌을 막으려면 위임통치 국가들도 중립적 통상지대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이승만 대통령이 우드로 윌슨의 국제연맹 창설과 민족자결주의라는 국제적 트렌드에 한국의 독립을 조우시켰듯이, 케인스 또한 이 두 요소를 국제평화를 위한 선결적인 조건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위임통치론은 국제질서에 눈을 뜬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규식 또한 위임통치론을 주장했으며, 안창호 역시 국민회 중앙총회 ‘행정위원회’를 소집하여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승인한 후 승낙서를 정한경에게 보낸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은 제1차 세계대전 종식과 국제질서의 변화라는 틀 안에서,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지배를 무효화하고, 당시 강대국들의 이익과 국제정세 동향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한 식민지 탈피 및 독립 국가 건설론이라 할 수 있겠다.


맺으며


이 외에도 필자는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한인회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 ‘이승만은 6·25 전쟁 발발 시 도망갔다.’, ‘미 OSS 국장도 이승만을 비판했다.’, ‘이승만이 분단의 원흉’, ‘이승만은 제주 4·3 학살자’ 등 온갖 거짓 주장에 맞서 싸웠다. 그 결과 ‘드디어 역사의 진실에 눈을 떴다.’, ‘그간 속고 살아서 분통하다.’, ‘이승만이 이렇게 위대한 지도자인지 몰랐다.’는 댓글이 줄을 지었다. 지면의 한계상, 해당 내용은 유튜브 채널 Ground C에 2024년 2월~3월간 업로드 된 영상들을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필자가 이렇게 역사 전쟁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싸운 이유는, 대한민국 역사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건국 일대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훼손된 채 방치된다면 다음세대는 사실에 기반한 역사관과 국가관을 가질 기회조차 박탈당한다고 본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을 모르고 청년의 때를 보내는 것은 나침반을 잃고 항해하는 삶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선배 역사학자들의 도움을 통해 역사의 진실에 눈을 뜨며 빚을 졌다. 이러한 부채의식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었다. 필자의 부족한 행보가 독자들에게 작은 도전과 격려가 될 수 있길 소망한다.

burketv@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