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과학과 익숙한 구성,“기후 영화: 냉정한 진실”
2024-07-18글 / 박선형 (동안고등학교 교사)
경기도교육청 소속 공립학교 영어 교사이며, 자유환경총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화 개요
“기후 영화: 냉정한 진실” Climate: The Movie(The Cold Truth)은 한국에서 2024년 4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마틴 더킨(Martin Durkin)이 감독하고 글을 썼으며, 톰 넬슨(Tom Nelson)이 제작했다. 이 영화는 한국어 자막도 제공되며 유튜브를 통해 누구나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기후를 다루는 영화는 이전에도 많이 만들어졌지만, 본 다큐멘터리는 ‘기후위기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엔의 ‘기후 변화에 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권고사항과는 방향을 달리하며 재생 에너지, 탄소 중립, RE100 등을 외치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모든 과학자가 기후위기설에 동의한다는 언론 보도와는 달리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저명한 과학자들은 기후위기설에 반대한다. 그들은 기후가 변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기후 변화가 지구 생태계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다거나, 기후 변화의 주된 원인이 인류가 만들어내는 이산화탄소에 있으며, 태양광과 같은 신재생 에너지로 전면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은 실증적 증거가 전혀 없는 정치적 목적에 의한 주장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기후위기설을 전파하기 위해 뿌려지는 연구 자금은 과학의 본질을 타락시키고, 소위 친환경적 정책을 강요하는 선진국은 석탄과 같은 탄소 기반 연료 사용을 막으면서 아프리카와 같은 저개발지역이 절대 빈곤에서 탈출할 기회마저 가로채 가고 있기 때문에 기후위기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 앞부분에 잘 요약되어 있다. 소수의 사람만 믿었던 황당한 환경적 공포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산업이 된 과정(00:26), 이기심과 거대한 정부 지원금 이야기(00:50), 과학이 타락하는 과정(01:20)을 그린다. 또한 기후위기론에 도전하는 누구든지 괴롭히고 위협하는 세력을 보여주며(01:39), 개인의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고 말한다(01:59).
다시 정리하자면, 악당은 평범한 인간이나 시장경제가 아니라 타락한 과학자와 정치인이다. 지구가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사실을 수호해 온 과학이 위태롭다. 환경 보호를 앞세워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고 환경 보호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냉정한 눈으로 진실을 알아야 한다. 진실 없이는 개인의 자유도 보장될 수 없다. 기후위기설에 대항하는 것은 자유의 편에 서는 것이다.
낯선 과학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유전자 공학을 통해 조작된 식량을 섭취하고, 의료과학의 혁신을 통해 치매와 암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현재의 먹거리가 첨단 반도체 사업이라면 미래의 먹거리는 생화학적 연구에 있고, 머지않은 미래에서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힘들고 위험하거나 고달픈 일은 다 대신해 주는 편리한 세상이 오리라 전망한다. 게다가 젊은 세대일수록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과 각종 전자기기에 노출되어 기술적 유창성(technological fluency)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물질 중심적이며 과학과 기술의 혁신을 통해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고로 현재의 시대적 영웅은 일론 머스크(Elon Musk)와 같은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우주선을 날리고 멋진 전기차를 만드는 공학자·사업가이다.
그런데도 일반적 대중의 과학적 교양 수준은 터무니없이 낮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배운 기초 과학적 지식은 시험이 지나면 기억에서 사라진다.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교차 검토하는 일련의 과학적 방법(scientific method)은 전문가들의 전용물이고 비전문가(특히 문과 출신)는 그저 전문가 집단의 권위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예의이며 교양이다. 게다가 종교는 비이성적이며 야만적이라는 무신론자들의 공격 앞에서 신의 창조적 질서를 발견하는 과정으로서의 과학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그 대신 엉터리 언론에 의해 조작된 가짜 과학이 판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각종 지질학적 증거, 천체의 움직임, 기온 측정기와 도시 열섬 효과 등 전문적 용어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물리학자나 지질학자, 천문학자, 심지어 날씨 전문가가 아니어서가 아니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과학적 가설을 검증하는 방법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직접 땅을 판다고? 왜? 검색하면 다 나오는 거 아니었어? 온도를 왜 지상에서 측정하지? 인공위성이 레이저 센서로 알려주는 거 아니야?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컴퓨터 시뮬레이션 돌리면 다 알 수 있어.” 이 정도가 대중의 평균적인 인식 수준이다. 원자료를 어떻게 구하고, 자료의 신뢰도는 어떻게 검증하며, 가설과 관측 결과가 다를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지적 게으름이 우리 주변에 곰팡이처럼 퍼져있다.
익숙한 구성
곰팡이가 음습한 곳을 선호하듯이 거짓은 음모론 속에서 덩치가 커진다. 기후위기론자들이 내세우는 음모론은 바로 ‘산업 발달은 나쁘다’는 거짓말이다. 온실가스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특히 온실 효과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구성요소는 수증기이다. 그러나 기후위기론자들이 유난히 이산화탄소가 기후 위기를 몰고 오는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산화탄소가 화석연료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석연료가 나쁜 이유는 산업 발달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지구의 자원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깨끗한 지구를 오염시켰으며 이러한 죄는 결국 지구 멸망이라는 죗값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게 기후위기론자들의 주장이다.
나무나 건조된 대변을 연료로 사용해서 불완전 연소로 생기는 각종 오염물질에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의 폐가 망가지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가난한 농부가 질소 비료를 사용해서 생산량을 늘리는 것은 석유라는 화석연료의 부산물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이들의 고집스러운 태도는 곧 문명은 나쁜 것이고 자연은 신성하다는 자연숭배론에 기반한다. 원시적 자연이 최고라고 보는 것은 비기독교적 세계관이다. 하나님과 태초의 인간이 함께 걸었던 곳은 원시적 자연이 아닌 정돈된 정원이었음을 우리 기독교인은 기억한다.
기실, 다소 전문적이고 정치적이며 매우 세속적인 내용으로 버무려진 이 영화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줄거리와 세계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 여기에 진실을 믿기에 핍박받은 사람들이 있다. 핍박하는 사람들은 재력과 권력, 심지어 바른 일을 한다는 명분과 대중적 지지 또한 가지고 있다. 이들은 권세가이다. 그리고 폭군이다. 그럼에도 진실이 소중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소수는 개인적 손해와 고통을 감수하고 맞서서 진실을 밝히고 있다. 진실이 과학의 타락을 막고 궁극적으로는 절대적 빈곤이라는 노예적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하는 길이라는 논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요, 오직 예수를 통해 자유를 얻게 되리라는 기독교인의 고백과 다르지 않다.
시대적 책무
각 시대를 대표하는 거대한 위선과 거짓이 있다. 노예제와 공산주의의 붉은 물결이 가장 대표적이다. 노예제가 거짓인 이유는 인간이 신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소중한 존재이며 절대자 앞에서 평등하다는 신념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희생양으로 보낼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신념은 노예제 폐지 운동으로 이어졌다. 공산주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것은 유물론에 기초한 반신론적 폭력 혁명 사상이다. 그 공산주의의 붉은 깃발 아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고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은 타도해야 하는 구질서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공산주의를 불신하고 반대하게 되었다.
공산주의는 구소련이나 중국의 선전·선동이나 기만전술에만 있지 않다. 자연을 우상으로 삼은 환경비관론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인은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신 > 인간 > 자연이라는 성경적 위계질서 속에서 환경 보호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기후위기설에 동조하여 탄소 중립과 원자력 폐지를 주장하는 기독교인이 흑인 노예제가 성경적 질서에 부합한다고 설교한 과거 미국 남부 교회 목회자들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21세기 기독교인은 기후 위기라는 거짓 선동에 더 이상 휘둘려서는 안 된다. 청지기의 역할을 지혜롭게 수행하는 것이 현시대 기독교인의 시대적 사명이자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