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체제 전쟁과 역사 인식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체제 전쟁과 역사 인식

2024-02-15 0 By 월드뷰

역사 전쟁을 다루는 이번 호에서는 커버스토리 인터뷰를 위해 운동권 출신의 이강호 위원을 만났다. 그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학생시절 총학생회장을 역임하고, 과거 PD 운동권 지하조직의 핵심 인물의 하나로 활동하다가 전향하여 체제 전쟁을 몸으로 겪었다. 전향 이후 <박정희가 옳았다- ‘5·16과 10월유신의 정치경제학’>(기파랑, 2019) 및 그 후속편인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 박정희가 옳았다2>(트루스포럼, 2024)를 발표했다. 최근 강연과 기고활동에 힘쓰고 있다(편집자 주).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I. 체제 전쟁

김승욱 – 먼저 독자들을 위해 운동권 시절의 활동과 당시 생각 등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강호 –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지만 곧바로 구속되었습니다. 당시 운동권 조직 특성상 학생장은 ‘오픈장’이라 하여 중장기적으로 시위 주동자 역할을 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오픈장은 ‘언더 조직’ 보호를 위해 연결선을 최소화합니다. 저에게는 그보다도 학생장으로 나서기 전까지 계속해왔던 언더에서의 활동이 더 중요했습니다. PD 운동권인 것은 맞습니다. PD 계열에서 중심적이긴 했습니다. 당시 노선대립이 상당히 치열했는데, 사상·이론적 역할을 꽤 했었죠. 김영환의 저서 <강철서신>으로 주사파가 등장하기 전이었지만, ‘MC(Main Current)’라 약칭한 운동권 주류는 본래 친북적인 NL 흐름이 기본이었습니다. 노골적으로 표방하지 않았을 따름이지요. 저는 조직적 뿌리 상으로는 MC에 속해 있었지만, 그런 친북적 성향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맞섰습니다. 저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부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북한의 김일성 체제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것을 매우 모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한 변혁운동의 독자성이라는 차원에서 논리를 확실하게 재정립하려 했습니다. 사회구성체론 차원에서 경제적으로 예속된 식민지 국가는 자체적인 발전 동력을 상실하여 자본주의로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았던 ‘식민지반봉건’이라는 개념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이 발달된 확실한 자본주의 사회라 보았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은 과도한 설정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한국이 미국에 종속적이긴 했지만 과거 일제시대와 같은 관계일 순 없다고 보았습니다. 민족해방 운운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이라 생각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는 한민족이라는 정서보다는 확실히 현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김승욱 – 지난 문재인 정권은 주사파가 장악했습니다. 종북좌파 척결에 열심이었던 검사 출신의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문재인 전 대표는 공산주의자’라고 했고, 문재인 전대통령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지요. 고영주 이사장은 1심에서 패소했으나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확정을 받았습니다. 지난 정권 주요 인사뿐 아니라, 지금도 여야를 막론하고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운동권 출신이고 아직도 과거의 생각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현역 국회의원 등 고위직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 타령이냐, 한 줌도 안 되는 주사파 사람들 때문에 웬 소란이냐 등, 주사파 세력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 정치권의 현실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지난번 열린 “두 개의 전선, 하나의 전쟁”이라는 강연에서 북한과의 전쟁, 종북 세력과의 전쟁 두 전선이 있지만, 사실상 전쟁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사파와 북한은 하나라는 의미라고 해석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강호 – 문재인 전 대통령이 고급스러운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더군요. 공산주의에 대해서 공부를 깊이 있게 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리영희나 신영복을 과도하게 찬양하면서 흐름에 편승하는 부류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속내를 어떻게 다 알겠습니다. 어떻든 그런 언사를 하고, 종북 및 종중 행태도 노골적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면 좌익은 분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요즘 세상에 빨갱이가 어딨냐?” “간첩이 어딨냐?” 하는 말을 듣고 저는 혀를 찼습니다. 최근에 간첩단이 연거푸 체포되지 않았습니까? 가히 간첩단 창궐이라고 할 수준입니다. 북한과 주사파가 하나의 세력이라는 것은 주사파 자신이 누누이 강조하며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북한이 내심으로는 남쪽의 주사파를 그저 장기판 졸(卒) 중의 하나처럼 여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김일성이 김영환과 임수경을 꽤나 성의 있게 만나주었던 것을 보면, 졸(卒)이라 해도 잘 쓰겠다는 건 확실히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북한에 충성을 다하는 주사파와 그것을 잘 써먹겠다는 북한은 확실히 하나의 세력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사파는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 세력이고, 북한이 그렇듯 그들은 대한민국의 적(適)입니다.

김승욱 – 일제 하 독립운동할 때부터 좌우익으로 나뉘었고, 해방 직후는 좌우익 간의 유혈 충돌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강호 위원께서는 “좌익의 역사”에 대해서 강연도 하셨던데, 먼저 좌익 이념의 역사적 뿌리부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강호 – “좌익의 역사”라는 강연에서 좌익 이념과 좌익 정치 세력들을 역사적으로 뿌리에서부터 짚어보았습니다. 흔히 좌익문제와 관련해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생산수단과 소유관계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살피는 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 정치적 행태라고 보았습니다. 정치적 좌우의 기원 자체가 프랑스혁명 당시 정치 분파인 자코뱅(Jacobins)파와 지롱드(Girondins)파의 좌우 대비에서 나왔다는 차원에서만이 아닙니다. 사실 사회적 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Raymon Aron)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욕망에 따라 배분 받는다’는 선전은 허공의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정확한 말입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입장을 공상적 사회주의가 아닌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말했지만,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것도 공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짐짓 현란하고 비장하게 내세워졌지만 결국에는 인민을 기만하는 수사학적 장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구 소련 이후의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결국 특권층의 지배로 귀결됐습니다. 사회적 소유가 아니라 특권층의 소유였을 뿐이지요. 스스로는 사회적 소유 체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단지 믿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국가의 소멸을 주장했지만 결국 소멸한 것은 국가가 아닌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소유입니다. 국가의 소유란 국가권력의 소유이며, 그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정치권력자의 소유입니다. 그것은 노멘클라투라(러시아어: номенклату́ра)라는 특권층이며 최종적으로 ‘스탈린 대원수’나 ‘김일성 수령’과 같은 존재입니다. 전제 군주정과 다르지 않지요.
사회주의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그들도 나중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혁명을 시작할 때 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은 광기처럼 발휘됐습니다. 레닌은 농업 집단화에 저항하는 부농(쿨락)들은 모두 목을 매달아 죽이라고 했습니다. 쿨락은 대지주도 아니고 자수성가한 자영농이었지만 레닌은 농업도 사회주의화해야 한다며 밀어붙였습니다. 이후 캄보디아 폴 포트(Pol Pot)의 킬링필드 사건도 양상은 동일했습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며 닥치는 대로 양민 2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자그마치 당시 캄보디아 총인구의 1/4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광기의 원조가 바로 프랑스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가 행한 공포정치였습니다. 자코뱅은 소생산자를 이상적으로 여기고 부자를 경계했습니다. 사적 소유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사회적 소유를 실현하겠다는 사회주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진행되던 1년 남짓 동안 매일 단두대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을 잘랐습니다. 프랑스 서부 방데(Vendée) 지역에서는 반혁명 세력을 소탕한다며 대학살을 벌였습니다. 평범한 농민과 서민들이 학살됐습니다. 어린아이와 아기들도 죽였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는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했습니다. 나치는 ‘사회주의 노동당’이라는 간판이 보여주듯 사회주의를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사회주의를 실현하겠다고 벌인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유대인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그리고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경제적 차원의 것에 초점을 맞추어 살피면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 본질적 원인을 놓칩니다. 문제는 믿음에서 시작해 독선과 아집이 되고 결국에는 광기로 치닫는 좌익적 성향입니다. 프랑스의 역사가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의 말에 따르면 ‘자코뱅·볼셰비키·나치즘’은 동일합니다. 퓌레는 그래서 자유민주주의·공산주의·파시즘 3개의 진영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2개의 진영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상은 고귀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을 잊고 이상에 집착하면 광기의 폭주가 나타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겸손은 타인에 대한 존중이 됩니다. 그리고 한계 너머의 존재에 대한 감사가 됩니다. 바로 이 같은 겸손, 존중, 감사가 소위 사회적 소유 따위보다 사회를 훨씬 더 건강하게 합니다. 이게 바로 “좌익의 역사” 강의의 문제의식입니다. 빠른 시일 안에 책으로도 발간하려 합니다.

II. 한국의 역사

김승욱 좋은 책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한국 사회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체제 전쟁이 있었고, 지금도 역사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 사회로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를 나누지요. <월간조선>에 “이념과 정치”라는 제목으로 한국 역사에 대한 칼럼을 연재하셨던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강호 앞서 “좌익의 역사”에 대해 설명드린 문제의식의 관점에서 지금 우리가 직접 맞닥뜨리고 있는 국내외적 정치문제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를 조명하고, 우리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두 인물,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이 이루어 낸 업적의 소중함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좌익 운동권 정치 세력의 문제점을 짚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주제들을 다루었는데 “이념과 정치”라는 제목대로 이념의 중요성을 항상 견지했습니다. ‘이념의 시대는 갔다’라는 얘기는 안이한 주장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승욱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살펴보셨다고 했는데, 먼저 이승만 정부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십니까?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는 온통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자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독재자라고 보십니까?


이강호 저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그 노련함과 결단력과 함께 참을성에 대해서도 놀라움을 갖습니다. 한민당은 이승만 대통령과 사사건건 대립을 이어갔고, 그들과 그 후예 세력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독재 운운하며 공격했습니다. 한민당 세력이 과연 건강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민주 세력이었던가요? 그들도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가 있고 훌륭한 점들도 분명 많습니다. 하지만 문제도 많았습니다.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른바 진짜 독재자였다면 뭐 하러 선거를 계속했겠습니까? 더 이상의 선거를 중단시키고 강권통치를 해야 독재자답지요.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은 그만한 대중적 지지도 있었고요. 4·19의 원인이 된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대통령 선출과 관련된 부정선거가 아니라 부통령 선출에 대한 부정선거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상대였던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서 요양 도중 갑자기 사망해서 단독 후보로 당선이 확정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야당은 곧바로 정부통령 선거를 모두 다시 하라고 선동했습니다. 이는 옳지 않았습니다.

김승욱 – 이 위원께서 쓰신 <박정희가 옳았다>(기파랑, 2019)의 부제가 ‘5·16과 10월유신의 정치경제학’인데, 책 첫머리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1987년 6월 항쟁이 아니라 1948년 이승만의 건국혁명에서 비롯되었다’고 쓰셨더군요. 저와 생각이 너무 같아서 반가웠습니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강호 – <박정희가 옳았다>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매도를 바로잡기 위해 그의 업적과 정치를 재조명하고자 한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재조명을 매개로 우리 현대사를 다시 살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질문하신 바와 같이 저는 이 책을 통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역사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재설정하고자 했습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마침내 쟁취된 것이라면, 그 이전 시대의 한국은 민주주의가 없었던 시대라는 말이 됩니다. 소위 민주진영과 좌익 학자들은 항상 그렇게 주장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매우 아이러니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1987년 이전의 전두환 시대, 그리고 그 이전의 박정희 시대는 바로 선진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가장 중요한 바탕,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진 시대입니다. 그 기적의 시대를 민주주의가 전혀 없었던 시대라고 한다면 경제성장 및 발전과 관련해서 민주주의는 없어도 전혀 상관없는 게 되고 말지요. 1987년 이전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다는 그 생각이 왜 틀렸는지 좀 더 살펴보자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냥’ 민주주의는 의미가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 수많은 개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같은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다른 지칭에 불과합니다. 북한의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달고 있는 민주주의는 어떻습니까?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면 사실상 모두 기만적 장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자유민주체제를 처음으로 수립한 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체제와 제도를 도입해 수립하게 된 게 바로 혁명이지요.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끈 대한민국 건국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혁명입니다.
둘째로, 만사가 다 그렇듯 민주주의도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성장하고 발전해 가는 것은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의 역사도 그러했습니다. 어려운 조건에서 시작했고, 정착하고 성숙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민들의 성숙도 따라야 하고 경제적 토대도 다져져야 합니다. 그런 게 한순간에 바로 이루어지겠습니까?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위해 특히 중요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국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움이 한꺼번에 엄습해오고 있던 때였습니다. 북한의 직접적 도발만이 아니라 민주의 깃발 이면에서 좌익의 발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성취는 그 같은 위기를 이겨내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야당과 이른바 민주 세력은 ‘그냥 민주’만 외쳤습니다. 경제를 일으키고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들에 대해 사사건건 반대하며 엇박자를 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습니다. 수출도 반대했습니다. ‘무명 베옷을 입고 산천지를 걸어도 분배만 잘 된다면 좋다’고 했습니다. 만약 당시 그들의 주장대로 갔다면 확실히 지금 한국인은 그렇게 살게 됐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게 민주적 발전일까요? 아닙니다. 허덕이는 경제 속에서 무명 베옷을 입고 살았다면 민주주의도 혼돈으로 치닫고 말았을 것입니다. 1987년의 민주화는 그 이전에 전혀 없었던 민주주의의 쟁취가 아니라, 1948년 건국으로 시작된 민주주의가 수많은 성취에 힘입어 이루어진 ‘성숙’이었습니다.

김승욱 – 특히 ‘쿠데타’라고 폄하되는 5·16은 4·19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이념이 예비하고 있던 번영의 길로 대한민국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했다’고 한 점도 저와 생각이 같았습니다. 5·16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이강호 – 4·19 이후 민주당 정권 시절, 온 나라가 데모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데모가 아니었습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가 난무했습니다. 좌익 세력인 혁신계가 위세를 부렸습니다. 학생들도 무분별하게 그런 흐름으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의 ‘장면’ 총리는 전혀 상황을 장악·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장면 총리는 거세지는 조짐을 보이는 좌익 세력 발호를 제압하고자 반공법 제정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안팎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됐습니다. 이른바 혁신계 세력은 야밤에 횃불 시위를 벌이고 장면 총리 집 앞까지 쳐들어가 반대시위를 했습니다. “김일성 만세” 구호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4·19 세대이자 민통련(민주통일민족운동연합) 선전 위원장이었던 이영일 전 의원은 “잠복돼 있던 공산분자들이 날파리 때처럼 몰려들었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습니다. 과연 그런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잦아들었을까요? 그렇게 낙관하기는 어렵습니다. 4·19 직후 김일성은 북한 주도 통일, 즉 남한의 적화를 노렸습니다. 미 의회 산하 싱크탱크인 우드로 윌슨 센터가 당시 평양 주재 소련 대사였던 알렉산더 푸자노프의 개인 기록을 입수하여 밝혀낸 내용입니다. 김일성은 당시 남한의 진보단체 접촉도 시도했습니다. 1960년 8·15 경축사에 ‘연방제 통일 방안’을 최초로 제기했는데 이는 소련의 조언(당시 소련의 조언은 곧 명령이지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남한의 혁명적 정세가 성숙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4.19 직후인 1960년 7월 29일 선거에서 혁신계의 의석확보가 꽤 성공적이었습니다. 모두 8명이 의회에 진출하게 됐던 것입니다.
연방제는 남한 해방, 즉 적화 통일을 앞세운 교란 책동이었습니다. 물론 민주당 정권은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혁신계와 그에 호응한 학생들은 거세게 소위 통일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김일성의 부추김이 적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윌슨 센터는 ‘김일성의 희망은 5·16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폄훼하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은 5·16을 헌정을 유린한 쿠데타라고 합니다. 그러나 윌슨 센터의 자료와 평가에 따르자면 5·16은 김일성의 남한 적화 희망을 물거품이 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5·16은 헌정 유린이 아니라 정반대로 북한의 적화책동을 막아 자유민주헌정을 수호한 게 됩니다. 그리고 5·16 이후 난장판의 혼란으로 치닫던 상황을 수습합니다.
한국이 번영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조건은 한국이 자유민주체제로 건국된 것입니다. 차명수 교수의 저서 <기아와 기적의 기원>의 논지를 빌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현대사는 두 단어로 요약됩니다. 기아(飢餓)와 기적(奇蹟)입니다. 해방 후 한반도에는 그 각각을 대표하게 될 두 개의 정치체(政治體)가 태어났습니다. 기아를 대표하는 것은 북한이고, 기적을 대표하는 것은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아에서 기적으로 나아간 역사였습니다. ‘한강의 기적’입니다. 이념의 선택이 그 운명적 길을 예비했습니다. 북한은 결국 현존하는 지옥도가 되었지만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번영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북한은 ‘공산’을 택했지만 대한민국은 ‘자유’를 택한 결과였습니다. 5·16은 그 선택을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그렇게 지켜낸 자유민주체제의 대한민국을 번영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김승욱 – 후속편인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 박정희가 옳았다2>(트루스포럼, 2024)는 전편과 어떻게 다른가요?


이강호 – <박정희가 옳았다>가 정치적 측면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라면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 박정희가 옳았다2>는 산업화를 중심으로 한 근대화 혁명의 의의를 헤아리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경제적 성취만이 아니라 총체적 차원에서의 문명사적 성취라는 것이 핵심 논지입니다. 이 책은 지난 2022년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에서 비판매용 한정판으로 1차 발간한 바 있는데, 이번 2024년 1월에 트루스포럼을 통해 판매보급판으로 재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김승욱 – 그렇군요. 널리 읽힐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근에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과거에 전두환을 찢어 죽이려고 했던 공산주의자라고 스스로 말하셨는데, 전향하게 된 동기를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강호 – 돌아가신 제 부친께서 당시 심하게 고초를 겪으시고 몸이 많이 망가지셨습니다. 부친은 부산 영남에서 보기 드물게 ‘동교동계’였습니다. 민주당 신파였던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5·18 때 관련 혐의로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저는 이념도 이념이지만 감정적으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복수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스스로 지하 서클을 찾아서 바로 가입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전두환 대통령 등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가슴 아팠던 감정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그 모두가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고 진통이겠지요. 각자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하면서 빚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만 내용은 전해 들었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정치적 내용이더군요.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르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시시비비를 떠나 그렇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한국 자유민주체제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가령, 모택동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소동이 야기한 폐해를 다루는 영화를 중국에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 같은 정변 사태를 다루는 영화 자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김승욱 – 그렇지요. 자유가 없는 체제에서는 어림없는 이야기지요. 전두환 시대에 운동권에 대한 탄압이 더 심해져서 지하로 들어갔고, 그래서 북한 방송을 청취하면서 주사파가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전두환 시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이강호 – 운동권 탄압이라고 하지만 지금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그 운동권은 좌익 세력이었습니다. 마땅히 제압하고 단속해야 할 세력이었지요. 오히려 문제는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솜씨들도 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념적· 이론적 대응능력이 매우 약했다고 생각합니다. 좌경 의식화를 겨냥한 책이 난무하는데, 그에 맞서는 책이나 글들은 별로 없었지요. 레이몽 아롱의 <지식인의 아편> 같은 책을 좀 제대로 번역하여 널리 보급되게 했다면 좌경화로 유혹되는 학생들을 조금이라도 더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주사파는 새삼 북한방송을 듣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운동권의 주류 자체가 본래 친북 노선을 기본으로 했습니다. 당시 지하 서클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인혁당, 통혁당 등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전두환 시대는 박정희 시대의 연장이자 마무리의 시대라고 봅니다. 경제적으로는 종합적으로 볼 때 일을 잘해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하나하나의 개별 정책을 파고 들어가면 따질 것들도 있습니다만 대체로 괜찮았다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좀 아쉽습니다. 시대정신과 명분에서 이른바 민주진영에 밀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긴 했습니다. 역시 정치적 콘텐츠가 부족하고 약했던 게 가장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김승욱 – 지면이 부족해서 다 이야기를 나눌 수 없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권의 평화적 이양을 약속한 이후에 소위 ‘3김 시대’가 올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민주화 투사였던 김영삼, 김대중 시대는 뒤로 밀려났습니다. 이 시대에 대해서 평가하시는지 간략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강호 ‘3당 합당’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융합’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성취였다 생각합니다. 김영삼 대통령 탓만은 아니었겠지만 이를 잘 지켜내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중대한 오판이요 실책이었습니다. 살아 계시다면 본인도 인정하리라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여러모로 논란이 많지만 ‘한미 FTA’는 잘한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한미 동맹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III. 세계사의 흐름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선택

김승욱 – 이제 세계 속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요. 주사파에서는 대한민국이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인식이 아직까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주장에 대한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요?


이강호 –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며 선진국입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 지금 같은 발전을 이룩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얼마 뒤에는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됐습니다. 휴전 2년 뒤인 1955년 유엔한국재건위원회(UNKRA)에 참여한 한 인도 의원은 “한국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같은 처지에 있던 한국의 발전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당연했을 겁니다. 그런데 한국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론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좌익적 시각이 있었습니다. 공산좌익들의 입장에서 한국의 발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한국은 미국 제국의 신식민지에 불과했습니다. 제국주의에 수탈당하는 나라가 성장·발전을 이룩한다는 것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논리상으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야 마땅했습니다. 종속이론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종속이론은 ‘후발국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돼 있는 한 오직 저발전의 발전만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속에서 벗어나는 게 가장 먼저 선행돼야 한다 주장했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랬습니다. 박정희 시대 야당과 꽤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선 ‘내포적 공업화’와 ‘농공병진 발전론’에 입각한 자립경제 운운의 소리가 높았습니다. 종속이론 논법을 베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출주도 경제발전’은 선진국에 대한 종속만 심화시키는 것일 뿐이라며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종속이론 논리를 따라간 이른바 제3세계 나라들은 모두 실패했지만, 종속이론 논리와 정반대의 노선으로 간 한국은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했습니다. 북한과 주사파의 주장대로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면 어떻게 됩니까?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되고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것 모두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덕분’인 게 되지요. 주사파의 주장은 논리 차원에서는 아예 평가할 가치가 없습니다. 아집이요 광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같은 광기의 무리가 도처에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근래 들어 계속 적발된 ‘간첩단’은 남파 간첩이 아니라 모두 자발적 간첩단이었습니다. 설득할 수 있는 무리들이 아닙니다. 단속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김승욱 – 트루스포럼에서 하신 “보수주의 세계사” 특강을 보니 칼 슈미트의 <땅과 바다>를 소개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해 주시지요.


이강호 – 칼 슈미트는 법철학자로서는 오히려 땅의 논리를 중요시했습니다. <대지의 노모스>가 그런 저서입니다. 법 개념상 3범주인 규범(Norm), 질서(Ordnung), 노모스(Nomos) 중 노모스가 규범과 질서를 포괄합니다. 그런데 노모스는 인간 삶에 필수적인 각자의 공간을 획정하고 그 공간에 척도를 제공하는 ‘대지의 공간 질서’를 뜻합니다. 인간은 땅 위에서 살아가는 게 기본이고 그래서 그 땅의 질서가 법질서의 기본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슈미트의 역사에 대한 통찰은 자신의 그 같은 법철학적 관점에 매이지는 않더군요. 슈미트는 <땅과 바다>에서 “세계사는 땅의 힘에 대한 대양의 힘의 투쟁, 대양의 힘에 대한 땅의 힘의 투쟁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양의 힘’을 기본으로 한 나라인 베네치아와 영국을 조명했습니다. 슈미트는 “영국은 자신의 실존을 진정으로 바다 쪽으로 돌렸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국이 이루어 낸 것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바다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거나 모두의 것으로 여겨졌는데, 실제로는 결국 단 한 국가에 속했다. 바로 영국이다” 그리고 베네치아에 대해서는 “18~20세기까지의 영국에 대한 모든 찬사들은 이미 이전에 베네치아에 대해 찬미되었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탁월한 통찰이며 설명이라 생각합니다. ‘대양의 힘’과 ‘땅의 힘’을 대비해 보는 관점은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김승욱 – 저도 <제도의 힘>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는데, 강연을 보니 아테네, 베네치아, 한자동맹,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지는 상업 시대가 산업혁명 이전에 필요했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해양 문명에 대한 요약을 부탁드립니다.


이강호 – 흔히 ‘신석기 혁명과 농경 정착’을 문명의 출발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저는 문명의 가장 중요한 중추는 상업이라 생각합니다. 농경 정착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상업의 의의는 그것을 능가합니다. 문명의 뿌리는 그냥 농경 정착이 아닙니다. 문명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본질 자체가 교환이라는 관념의 형성입니다. 필요한 것을 탈취하지 않고 교환으로 구하려면 먼저 타인의 소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환이라는 관념의 형성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자연적 본능의 존재에서 문명적 존재로 나아간 전진입니다. 그리고 긴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상업에 대한 태도가 문명의 수준이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고대 문명부터가 그 점을 보여줍니다.
최초 문명인 수메르 문명은 내적으로도 일찍이 상업이 번영했을 뿐만 아니라 수천 Km 떨어져 있는 인더스 문명과도 활발한 교역을 장기간 이어갔습니다. 인더스 문명도 당연히 상업 문명이었습니다. 최초 고대 문명만이 아닙니다. 이후에도 상업을 중시한 문명이 번영했는데 특히 지중해 세계가 그랬습니다. 나중에 카르타고(Carthago)로 이어진 페니키아(Phoenicia)가 대표적입니다. 페니키아 문명의 무대는 지중해 세계 전역이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페니키아인은 … 원양 항해에 나서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화물을 운반하며 각지를 돌았다”고 했습니다. 페니키아인은 BC 12세기 무렵부터 활발한 해상교역을 하며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반도까지 지중해 전역을 누볐습니다. 페니키아 문명은 농업 문명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해양 상업 문명이었고 페니키아인은 상인이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페니키아인이 BC 600년경 이집트 파라오의 명을 받아 멀리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거쳐 이집트로 돌아왔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15세기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가 희망봉을 발견하기 2,00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페니키아 문명에 조금 뒤이어 등장한 그리스 문명도 해양 상업 문명이었습니다. 그리스 세계는 전반적으로 상업 문명의 특성을 가졌지만 특히 아테네는 다른 어느 ‘폴리스(polis)’보다 상업의 비중이 컸습니다. 토지가 척박해 농업 생산력이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인들은 식량생산 대신 포도와 올리브를 재배해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만들어 파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만이 아니라 멀리 카르타고, 페르시아, 이집트에도 수출했습니다. 아테네는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으로 곡물을 수입해 식량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테네는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를 능가하는 큰 경제적 부도 획득했습니다.
베네치아는 농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상업에 특화된 도시국가로 급성장했습니다. 베네치아는 왕정이 아닌 공화정 체제였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상인의 공화국이었습니다. 당시 중세 유럽 국가들은 모두 여전히 농경 위주에다 유럽 판 사농공상(士農工商, 선비·농민·공장·상인)의 혈통 신분질서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상공농사(商工農士, 상인·공장·농민·선비)’의 공화국을 이룬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 존중, 재산권 보호,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법치 체제를 견지했습니다. 완전히 근대적 면모입니다. 이후 베네치아는 지중해 일대의 교역을 장악했습니다. 베네치아는 산업혁명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상업 문명 없이는 산업혁명도 없습니다. 상품 거래로 부를 이루는 문화가 없으면 상품을 생산하는 산업이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영국은 18세기 산업혁명 이전에 17세기 상업혁명이 먼저 있었습니다. 해양 문명의 핵심적 의미는 상업입니다.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게 중심이라면 농업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해양 문명이 문명일 수 있으려면 해양 ‘상업’ 문명이어야 합니다. 바다를 교역을 위한 길로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김승욱 – 내륙 문명의 대표적인 나라가 중국입니다. 중국은 지금도 일대일로를 통한 중국몽(中國夢)을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한 평가를 부탁합니다.


이강호 – 고대 로마가 길을 만들 때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서구가 대항해 시대를 본격화할 때 중국의 명나라는 해상 교통·무역·어업 등에 대한 제한을 일컫는 해금 정책까지 쓰는 쇄국을 단행했습니다. 명나라 초창기 정화(鄭和)가 대함대로 아프리카까지 가는 대항해를 했지만 무역로 개척이 아닌 과시성일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얼마 뒤에는 중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배와 조선소를 불태우고 배의 설계도까지 다 태워버렸습니다. 또 섬에서 살던 사람들을 육지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이었지요. 중국은 고대 이래로 항상 땅에만 몰두했습니다. 왕조의 지배층도 그랬고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바다에 관심이 없습니다. 영국이 자신의 실존을 바다로 돌린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중국은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일대일로를 시작했습니다. 실크로드를 재현하겠다는 것이었죠. 일대일로가 육지로만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본적 발상에는 여전히 바다가 없습니다. 일대일로는 길의 개척보다는 돈을 뿌려 이러저러한 나라들을 엮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일종의 국제적 고리대금업이 됐습니다. 결국 실패 상태입니다. 그 같은 일대일로 정책으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을 내걸었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꿈입니다. 그런데 중국몽의 진짜 큰 문제는 그것이 중화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어떻든 이념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모택동’ 사상에 입각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주의여서는 안 되는 게 원칙입니다. 소련도 위대한 슬라브 민족의 부흥을 내건 적은 없습니다. 사회주의와 함께 민족주의를 내건 정치집단이 있기는 했습니다. 바로 히틀러의 나치입니다. 나치는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입니다. 그런데 이때 독일어 국가(National)는 민족이라는 함의가 더 강합니다. 나치는 게르만 민족의 위대한 나라를 외쳤습니다.
사회주의와 함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내거는 것은 나치즘과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몽을 내걸었던 시진핑은 최근 들어 같이 잘 살자는 의미의 ‘공동부유(共同富裕)’ 사회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총통과 같은 지위에 오르며 개인숭배도 강화하고 있습니다. 중국판 나치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시진핑도 히틀러처럼 도발의 사고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승욱 – 조선은 중국 중심의 대륙 문명권에 속했다가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양 세력에 편입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를 세계사 흥망의 법칙으로 설명하셨는데 요약을 부탁드립니다.


이강호 – 조선이 중국 명나라에 사대(事大)한 것은 단순히 국제정치적 힘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념적 가치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유교 성리학입니다.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누고 그 중앙에 위치한 것을 중화(中華)라 한 것은 주나라 토지제도인 정전제(井田制)를 천하를 대상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자부하며 그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그에 입각한 사회경제적 가치관의 핵심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었습니다. 농업 공동체를 이상으로 하는 가치관이었습니다. 조선은 농자천하지대본을 견지하며 상공업을 철저히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에서 상인은 가장 천한 신분이었습니다. 울타리 안의 문명이었습니다. 자신과 바깥 세계와는 구분을 강화하고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교역로에 대해선 아예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가난은 일상이 됩니다. 중국은 그래도 땅이 넓었습니다. 곡물 생산도 많고 내부 교역도 활발하여 내적인 융성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이 이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게 된 시점은 구한말이었습니다. 독립문의 독립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습니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그렇게 되기 시작했죠. 그러나 조선은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양 세력과 손을 잡지는 못했습니다. 조선 왕실은 아예 그런 생각을 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내적인 준비가 취약했던 것이지요. 고종을 비롯한 수구 세력은 또 다른 내륙세력인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개화파는 달랐습니다. 개화파는 일본, 그리고 서구세계와 적극적으로 만나려 했습니다. 그리고 서양 선교사들도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순탄하게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러시아라는 내륙 세력과의 또 하나의 선이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한일합병이 이뤄졌습니다. 해양 세력과의 만남은 그렇게 일차적으로는 강제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러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에 패하면서 해양 세력과의 본격적 결합이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이 한반도 남한지역으로 진주하여 미 군정이 이뤄졌습니다. 북한 지역은 소련이 점령했습니다. 남북한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며 분단하여 나라를 세우게 됐습니다. 북한은 공산체제를 세우며 소련 진영 아래로 들어갔고, 남한에선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하여 자유민주체제의 대한민국이 세워졌습니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결속하게 됐습니다. 세계적 해양 세력과의 본격적 결합이었습니다. 그리고 6·25 전쟁을 거치며 한미동맹이 이뤄졌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남한은 섬 아닌 섬이 돼 버렸습니다. 북한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는 길은 끊어졌고, 중국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국 대륙으로의 길도 끊어졌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이 외부 세계로 나아갈 길은 바다뿐이었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한국은 점차 해양교역국가가 돼 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번영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길을 예감한 선각자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었습니다. 이승만은 26세 청년 시절 감옥에서 1901년 4월 19일 <제국신문>에 사설을 하나 썼습니다. 그 한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으로 말할 지경이면 세계 만국이 서로 통상이 되었은즉 나라의 흥망성쇠가 상업 흥왕함에 달렸으니 지금은 천하의 큰 근본을 장사라고 할 수밖에 없도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아니라 상자천하지대본(商者天下之大本)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정신의 천명이었습니다. 그 정신의 기치가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대한민국의 핵심적 지침이 됐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그것을 구현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김승욱 – 미중 패권 갈등 속에 한국은 경중안미(經中安美: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문재인 전 대통령은 중국을 높은 산에 비유했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한국을 말(중국) 궁둥이에 붙은 파리에 비유를 했었는데, 한국이 미래를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이강호 – 기회주의적 행태는 양쪽 모두로부터 불신을 사고 나쁜 관계가 더 악화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경제 상황은 이제 아무리 순하게 얘기한다 해도 상당히 안 좋은 게 사실인데 경제는 중국과 협력하자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원순 본인은 말 궁둥이에 붙어가는 파리 같은 부류였던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중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최근의 여러 조사 발표에 따르면 중국의 현재 경제 위기는 일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과의 경제관계 비중을 계속 낮추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욱 – 앞으로 미중 패권 갈등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십니까? G2는 없다고 하셨는데, 지난번에 네이처(Nature) 지에서는 세계 10대 대학의 절반 이상이 중국 대학이고, 중국의 과학 발전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앞으로 중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이강호 – 때로는 갈등을 완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겠지만 반중(反中)의 흐름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버렸지요. G2라는 용어는 오바마 정권 시절 미국의 어느 경제학자의 기고문에서 유래됐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류 학계에서 연구된 개념은 아니며 미국 내에서 G2라는 용어는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G2라는 용어는 냉철한 평가에 따른 게 아니라 감성적으로 들뜬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경제는 규모 상으로 세계 2위이지만 질적으로는 매우 취약합니다. 최근 들어서는 경제적 위기도 심화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머지않아 미국도 앞설 것이라 주장하던 이들도 최근 차례로 그 주장을 철회하고 있습니다. 네이처지 관련 보도는 제가 보지 못했기에 함부로 평가하기 어렵습니다만, 중국은 지금 교육에서도 많은 문제를 보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중국은 얼마 전부터 난데없이 영어교육을 축소시키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대입시험 때 영어를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하고 초중고에서 영어수업의 위상을 낮추도록 요구했습니다. 중국몽에서도 보여주듯 중화민족주의적 자존심 차원의 정책인 듯합니다만, 마치 과거 왕조시대의 쇄국정책을 보는 느낌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과학적 발전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얼마 전까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중국의 교육도 질적 저하가 심화돼 갈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정책은 모두 시진핑의 명령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중국의 가장 큰 리스크는 바로 시진핑 본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시진핑은 장기집권을 확실히 굳혔습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한동안 상당한 성장 발전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발전은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간 축적된 갖가지 문제점이 터져 나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진핑이 중국을 더욱 어렵게 만들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김승욱 – 마지막으로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현실적으로 극복해야 할 역사해석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강호 –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해석의 관점을 바로잡는 게 중요하다 생각됩니다. 바로 좌경화된 역사관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교과서도 좌편향이 심합니다. 좌익적 역사관에 물들면 정신적으로 불건강해집니다. 좌익이념은 증오와 대결의 이념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인류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들 사이에는 갈등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늘 대립과 투쟁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타인으로부터 획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선택의 갈림이 있습니다. 그냥 뺏을 것인가 아니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내게 필요한 것을 얻을 것인가 사이의 선택입니다. ‘약탈이냐 교환이냐’입니다. 아득한 옛날 원시시대에 약탈이 아닌 교환을 선택하는 게 동물적 존재에서 인간으로의 전진입니다. 그리고 교환·거래가 일반적 양식이 되어 가는 게 바로 문명적 삶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비유적으로 “태초에 교환이 있었다”라고 표현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교환이 바로 인간다움의 태초인 것이지요. 교환은 상호 존중을 전제합니다. 그렇기에 협력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되면서 사회도 탄생합니다. 인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가 아닌 교환·거래를 통한 성숙의 역사입니다. 개인적 차원이나 집단적 차원 모두에서 그렇습니다. 마르크스는 틀렸습니다. 대립·투쟁이 중심이 되고 연속된다면 문명은 없습니다. 우리의 역사도 그런 관점으로 서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립·투쟁’이 아니라 ‘교환·거래’와 이를 바탕으로 한 ‘협력’, 그리고 그렇게 이뤄지는 ‘성취’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건강하게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투쟁을 늘어놓는 것은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욱 – 현실적으로 역사해석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강호 – 역사 교과서와 관련해 책임 있는 분들이 계속 애써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관련 정부 기관 관계자들은 좀 더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관점에서 계속해서 역사서를 쓰려 합니다.

김승욱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이강호 – 앞서 말씀드린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불건강한 이념의 무리들’이 퇴장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승욱 – 장시간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