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을 넘어 힐다잉으로
2022-11-09최근 고령 사회가 되어가면서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많다. 또한 매년 추석이 되면 기독교인도 절을 해도 되는지, 제사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등 유교식 예법을 지켜야할지에 대한 고민도 한다. 이번 커버스토리에서는 가정 사역을 해온 하이패밀리 송길원 목사를 초대해 장례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송길원 목사는 고신대학교와 동 대학원, 그리고 고려대학교 대학원과 미국의 개혁신학대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다. 최근에 죽음을 주제로 집필한 <죽음의 탄생>, <행복한 죽음>, <죽음이 배꼽을 잡다>, <죽음이 품격을 입다>와 함께 총 9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작은 장례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국내 최초의 임종 감독으로 불리운다(편집자주)
김승욱 안녕하십니까? 매월 <월드뷰>에 좋은 칼럼을 주시고, 바쁘신 중에 또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은 하이패밀리 대표를 맡고 계시면서 가정 사역을 많이 해오셨지요. 가정 사역을 하시게 된 동기가 있으셨는지요?
송길원 양평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시는 길은 행복하셨는지요? 한 시인이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물에 젖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 어디 있으랴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며 피는 꽃은 또 어디 있으랴
모든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물에 젖어 피어났나니
저는 결혼하면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아내와 하도 많이 싸우다 보니 어느 날은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결혼생활을 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아버지가 제게 많은 도움을 주셨지만, 만일 자신의 30년 결혼생활 노하우를 원포인트로 “길원아, 여자들 마음은 이렇거든. 이거 하나만 명심해라”라고 가르쳐주셨다면 아버지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제가 반복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제 시대에 부부 갈등의 마침표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의과대학에서 교목으로 7년간 일할 때 보니까, 공부 잘하는 아이들 중에서 정작 공부에 매력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아이들이 적었어요. 대부분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어요. 가업을 이어받아야 한다거나, 의사 있는 집안을 만들어야 된다는 사명감, 부모님의 압박 등을 느끼며 공부를 시작하긴 했지만, 그중에 상처 입은 영혼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대학원에 다시 진학해 상담 심리를 공부했고, 부모와 자녀의 화해가 먼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 갔는데, 미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들이 우리와 사뭇 다른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부흥회, 사경회, 수련회, 기도회 정도를 겨우 실행하고 있는데, 미국에는 30-40대 주부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부모를 위한 학교들이 운영되고 있었고, 30대 싱글들을 위한 프로그램, 특히 이혼자 프로그램까지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들에 미국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근무했던 의대에는 기초의학교실에 연구소들이 있어서 저도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처음에는 ‘연구소’라는 표현에 다소 저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에 ‘교회성장연구소’가 생기고, 또 같은 해에 ‘직장사역연구소’도 생기면서 연구소 트로이카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출발은 어설펐지만 가정 사역에 천착하게 됐고, 어느새 한 세대라 불리는 3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김승욱 저희 부모님도 많이 싸우셨는데, 생각해 보니 저도 결혼 생활에 대해서 배운 게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공통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송길원 우리 시대가 그랬죠. 하나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너무 치열하게 싸우니까 보다 못한 주인댁 아주머니가 “새댁, 그렇게 싸울 것 같으면 차라리 헤어지지 그래”라고 했답니다. 이때 새댁이 이런 명언을 남겼다지요. “아주머니, 헤어질 것 같으면 뭐 때문에 싸워요. 살아보려고 이렇게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죠.”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용서했습니다. ‘두 분도 살아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치신 거였구나.’ 이 가르침이 기초가 되어 시작한 첫 프로그램이 ‘결혼예비학교’였습니다.
김승욱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가정사역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시작해서 ‘하이패밀리’라는 이름으로 바뀐 건가요?
송길원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로 출발한 지 2년 뒤였던 1994년은 유엔이 선정한 ‘가정의 해’였습니다. 그런데 ‘가정’을 테마로 가진 단체가 저희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KBS 라디오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고, 그 인터뷰를 기점으로 저희 단체의 영향력이 커져갔습니다. EBS에서 ‘송길원 스페셜’이라는 제 이름을 타이틀로 내건 방송이 나가게 되었죠. 그때 저는 ‘세상에는 여의도 광장만 있는 게 아니라 미디어 광장이 있구나’ 알게 되었고, 그 미디어 광장 100만 시대를 여는 계기를 붙잡게 된 셈입니다. 이어 SBS의 ‘김미화의 U’,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KBS의 ‘아침마당’ 등 방송 3사를 섭렵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기관이 있다는 걸 교회보다 세상이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미디어의 힘을 그때 알았죠.
후에 CBS의 한 프로그램에서 “목사님, ‘사역’이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일 사(事)’에 ‘일할 역(役)’이라고 풀이해 드렸더니, 그 분의 대답이 “일에 일을 더하는 것이니 중노동하시는 거네요?”라고 하시더군요. 저희는 항상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이라는 슬로건으로 사역했지만, 이게 저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다면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생각에 단체 이름을 바꾸었죠.
새로운 이름은 명사형으로 딱딱하게 짓기보다는 동사형의 이름을 짓고 싶었지요. 그래서 고민 가운데 가벼운 인사를 뜻하는 하이(Hi)를 앞에 붙이고, 패밀리(Family)를 이어보았죠. Family는 아버지(Father)의 F, 그리고(and)의 A, 어머니(Mother)의 M, 아이 러브 유(I love you)의 앞 글자를 딴 ILY를 붙였습니다. 그렇게 ‘하이패밀리’가 새로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저희 단체명의 뜻풀이는 미국 본토에서도 소개가 되었는데, 그 이름이 점점 알려지면서 가정 NGO로 재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김승욱 ‘가정 사역’ 하면 흔히 결혼과 이혼 문제, 젊은이들의 연애를 다룬 프로그램이나 아버지학교 등의 다양한 사역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최근에 죽음과 관련된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송길원 제 아내가 아이들과 미국에서 지내다가 귀국한 후에 저희에게 힘든 시간이 있었습니다. 떨어져 있을 때는 오히려 사랑한다는 표현도 많이 했는데, 귀국 후에 함께 생활하다 보니 아내가 너무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거칠고, 우울해 하고,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제가 감당을 못하겠는 겁니다. 그래서 참 많이 싸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아내와 가족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즈음 어떤 분이 상담을 하러 오셨는데, 그 분의 이야기가 우리 집과 너무 똑같았습니다. 저는 그 분을 ‘갱년기 장애’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렇게 상담을 마치고 나니 허탈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해방구가 보였습니다. ‘아, 우리에게도 갱년기가 왔던 거구나.’ 그래서 그날 처음으로 아내에게 직접 회개했고, 아내도 제게 고백하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내의 갱년기를 겪으면서 여자는 세 번 태어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 때가 첫 번째 탄생, 열네 살 즈음 초경과 함께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가임기 여성이 되는 것이 두 번째 탄생, 다음으로 갱년기가 오면 남편 뒷바라지와 자식 부양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면서 한 인간으로 세 번째 태어나는 겁니다. 아내의 고함 소리가 그 세 번째 탄생의 신호라는 게 읽혀졌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우는 것처럼 말이죠.
아내의 갱년기를 통해 저희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야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배워본 적이 없더군요. 그렇게 갱년기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더 서드 에이지 세미나(The Third Age Seminar)’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노년기를 주제로 잡게 되었고, 더 나아가 죽음으로 옮겨 가게 된 겁니다. 영원히 젊을 수는 없잖습니까? 이제는 인생 삼모작이라고 할 수 있는 호모-헌드레드(Homo-hundred)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죽음에 대해서도 미리 준비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모든 세대에 걸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부름 받았다는 사명을 가지고 죽음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김승욱 지난 2021년에 “장례 혁명을 꿈꾸다”라는 부제가 붙은 <죽음의 탄생>이라는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저도 작년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이 책을 미리 봤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장례 문화에 대한 비평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 책에서 장례를 망가뜨리는 5적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내용을 좀 설명해 주세요.
송길원 교수님도 부지불식간에 사용하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 당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저는 이 표현 자체에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묻어난다고 봅니다. 의과대학에는 의철학(醫哲學)이라는 과목이 있는데, 거기서는 ‘병 걸렸다’, ‘감기 들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표현이 ‘외부에서 침입을 당했다’ 또는 ‘재수 없다’라는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표현은 ‘병을 알았다(knowing)’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체적인 의미를 갖게 되죠. 저희의 슬로건도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입니다. 맞이하는 죽음을 나타내는 단어로 올바른 표현은 ‘임종(臨終)’입니다. ‘다스릴 임(臨)’에 ‘끝 종(終)’, 즉 나의 마지막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의식주에만 집중했습니다. 소득 1만 불까지는 의식주의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다 2만 불에 접근하기 시작하면 의식주의 문제에서 벗어나 ‘건, 미, 락’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건강, 아름다움, 즐거움이지요. 이때부터는 헬스 센터를 찾거나 다이어트에 관심을 갖게 되고, 성형 산업과 각종 문화 컨텐츠 산업이 발전합니다. 소득 3만 불을 넘어 4만 불에 가까워지면 ‘종(終)’을 다루게 됩니다. 내 인생의 끝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인생을 의식주, 건미락, 종으로 설명하게 됩니다.
소득 수준이 올라갈수록 자연스럽게 죽음은 산업이 됩니다. 지금도 상조시장이 조 단위를 넘어서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인식도 부족한 데다가 상장례 의식이 모든 죽음을 뒤엎어 놓고 있다보니 편의상 5적(五敵)으로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죽음을 너무 값싸게 만들고 희화화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아름다운 죽음을 망가뜨린다고 본 거죠.
그중 하나는 우리가 아직도 일본의 ‘장례 속국’에 머물러 있다는 점입니다. 독립 이후 지금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문화 속국에서도 벗어났고 기술 속국에서도 벗어났지요. 아마 문화,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앞지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일본의 장례 문화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독립은 일본의 장례 문화에서도 벗어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욱 우리나라의 장례 문화는 대부분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본의 영향도 많이 받았군요. 어떤 것이 그런가요?
송길원 일제 시대에 조선 총독부에 의해 만들어진 ‘장례 의례 준칙’을 보면 ‘간소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지침을 아직까지 그대로 따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상주가 완장을 차는 것과 굴건을 쓰는 것입니다. 국화꽃 전시만 해도 그렇습니다. 국화는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꽃입니다. 일본 여권에도 국화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뉴스에서 일본의 신사참배 장면을 보면 그 배너(banner)가 전부 국화인 걸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장례를 비대면으로 치르는 나라는 전세계적으로 일본과 한국밖에 없습니다. 최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식을 보십시오. 대면 장례입니다. 여왕의 관은 24시간 공개되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시신을 감춥니다. 죄수의 시신도 아닌데 말입니다. 저는 이게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빈소’라고 해서 시신과 끝까지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신이 시체실 냉동고에 들어가 있습니다. 심지어 포개져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디그니티(dignity), 즉 인간의 존엄성을 얘기할 때 죽은 자의 인권도 지켜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쟁통이 아닌 한, 시신을 포개는 일은 절대 있으면 안 됩니다. 시신 아래에 시신이 있어서도 안 되고, 시신 위에 시신이 있어도 안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장례는 빈껍데기입니다. 마치 시신이 누워 있는 듯한 관 모양으로 상자를 만들어 두고 거기에 국화꽃을 전시합니다. 그러고는 고인을 접견한다고 착각합니다. 전부 비대면 장례의 폐해입니다. 흰색은 순결도 의미하지만, 항복 또는 포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 위안부 피해자라 불리는 할머니에게 국화꽃을 바치는 행위는 정말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그들에게는 얼마나 아픈 이야기겠습니까? 그런 분들의 마지막 순간을 황실을 기억나게 하는 꽃으로 장식해야 할까요? 그보다는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장미, 할미꽃 등을 드리면 안 되는 걸까요? 이런 걸 보면서도 우리의 진정한 독립이 장례 문화의 독립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방문자가 추모의 마음으로 꽃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주가 준비합니다. 이것도 아이러니한데, 꽃을 바쳤다가 다시 빼앗습니다. 한 번 줬으면 그만이지…. 이상하리만큼 변질된 것이고, 이처럼 매우 형식적인 허례의식이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의와 상복도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상복은 유족들이 입는 것이고, 수의는 돌아가신 분께 입혀 드리는 옷입니다. 이전에는 수의도 비단(실크)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일제 시대에 비단을 일본에 공출하면서 굵은 베로 수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사실 베로 만든 옷은 상주를 중심으로 한 유족들이 입었던 옷이죠. 어른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는 죄스러운 마음에 베옷을 입는 것이 하나의 드레스 코드(dress code)였던 겁니다. 그것이 변질되어서 지금은 상주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며, 시신은 베옷을 입히고 죄수처럼 꽁꽁 묶기까지 합니다. 시신을 이렇게 다루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옛날에는 상여를 산속 깊은 곳까지 모시고 가야 했기에 험한 길에 상여가 흔들릴까봐 묶었다는 말도 있고, 시신이 부패하면서 부풀어 오르기도 하니까 이를 억제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고 상황도 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시신을 결박하여 죄수로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서 영정 사진에 검은 띠까지 두르는 나라는 일본과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사람 인(人)’ 자에다가 ‘입 구(口)’ 자를 그려 넣으면 죄수를 뜻하는 ‘수(囚)’ 자가 됩니다. 그런데 왜 고인의 사진에 띠를 둘러서 만방에다 ‘고인은 죄를 짓고 간 죄수입니다’ 하고 공포해야 합니까? 이런 문화들은 꼭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욱 목사님이 하나도 바뀌지 않은 장례 문화에 대해 언급하실 때 여성 상주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요즘에는 여기저기서 성 차별하지 말라고 야단인데, 어떻게 장례 문화에서 차별하는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지 이상하더군요.
송길원 말씀하신 대로 교회에도 유교의 전통이 스며들어 있어 여성은 상주로 여겨주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상주할 사람을 꾸어와야 하는 경우까지 생깁니다. 왜 내 아버지의 영정을 다른 사람 손에 들려야 하며, 하물며 종도 아닌데 왜 고개를 숙이고 뒤따라가야 하는 걸까요? 어느 분이 제게 “영정 사진은 남자가 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고 물으시길래, “그럼 이분은 누구의 부모님이신가요?” 하고 반문했더니 할 말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유골함을 가지고, 또 영정 사진을 들고 가는 것, 내 부모님의 마지막 길을 직접 보내드리는 것은 치유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것들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이렇듯 우리가 반드시 깨뜨려야 할 분야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김승욱 상조 서비스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지요. 막상 상을 당하면, 곧바로 장례식장을 예약해야 하는 등 할 일이 많아집니다. 그러다 보면 상조회사에서 시키는대로 따라가기도 바쁘지요. 꼭 3일장을 해야 한다고 하니 일정을 맞추다 보면 정신이 없고, 교회도 다 그 일정에 맞춥니다. 상조회사 서비스와 관련된 문제점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송길원 3일장도 바뀌어야 할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저희는 코로나 기간 동안 여러 상황 때문에 10일장, 12일장 등 다양한 장례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10일장이라고 해서 10일 내내 장례식을 한 건 아니었고, 자녀들이 해외에 있거나 코로나 격리 문제로 방문 일정을 맞추기 어렵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신을 안치실에 모셨다가 화장을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케이스를 겪었죠. 어찌 보면 코로나로 인해 장례 절차를 이렇게 다양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셈입니다.
최근에도 미국에서 살고 있는 자녀들이 장례를 위해 돌아왔는데, 저희가 만들어 놓은 애도와 추모를 위한 필사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카페 순례로 추모하는 시간을 가진 사례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작은 장례로 가면 이렇게 장례를 치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인상적이었던 장례는 국화꽃을 전시하는 대신 고인의 메모리얼 테이블을 만들었던 겁니다. 비록 작은 테이블이었지만, 고인이 살아왔던 흔적과 체취를 느껴볼 수 있도록 고인이 필사했던 노트, 고인이 신었던 신발 등을 모아 꾸몄습니다. 이를 통해 유가족도 고인과의 추억들을 회상할 수 있었지요.
제가 국화꽃 전시를 하지 말자고 할 때마다 “화훼업자들은 어떻게 사냐?”라고 따져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사실 국화꽃 전시는 장례가 끝나자마자 업자가 되찾아가서 시든 것만 뽑아내거나 플라스틱 꽃으로 위장해서 숨겨놓는 일을 되풀이 하며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화훼업자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국화꽃을 전시할 공간에 ‘메모리얼 테이블’을 만들면 고인께서 이런 삶을 살다 가셨으니 함께 기억해 주시면 좋겠노라고 말할 수 있고, 방문객들이 오면 자연스럽게 덕담이 나누어지며 추억을 회상하는 힐링 캠프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장례 현실은 마치 돈거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봉투에 얼마를 넣어왔는지 보고, 뒤에서는 얼마 가져왔으니까 얼마짜리 티켓을 꺼내 놓는 식의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왔다는 게 참 서글픈 거죠.
병원 의사들이 처절하게 고백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사람 살려 내보내면 적자, 죽어서 내보내면 흑자”라는 겁니다. 지금의 의료보험 시스템에서는 사람을 살려서 내보내면 병원이 손해를 보는 구조입니다. 그렇지만 환자가 죽으면 병원 장례식장 운영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이쑤시개 하나까지 계산되는 곳이 장례식장 아닙니까? 그렇다 보니 병원 입장에서는 사람이 죽어 나가면 남는 장사를 하는 셈이고, 살아 나가면 병원은 적자라는 겁니다. 웃프다고 밖에는 표현이 안 됩니다.
김승욱 코로나 기간 동안 감염을 막기 위한 조치로 화장이 강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이 매우 간소화되었죠. 한국의 장례 문화에 대한 대안을 여러 가지 제안하셨는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몇 가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송길원 저는 병원 장례를 교회로 가져와야 한다고 봅니다. 장례를 병원에서만 치러야 한다는 법령도 없는데, 꼭 병원에서 하려니 거기에 끌려가는 겁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집이나 교회에서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집에서 장례를 치른 분이 계십니다. 집에 염습실이 있었을까요? 그 분은 옛날에 하던 방식을 따랐습니다. 가족이 알코올로 고인을 닦아드리고 수의를 입혀 드렸습니다. 시신 쪽에 차가운 바람이 쏟아지게 해서 부패를 늦추면서 관 속에 군데군데 드라이아이스를 넣어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랬더니 시신 썩을 일도 없이 깨끗하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상조회사에 끌려가는 순간, 장례 지도사에 의해서 염습해야 한다고 하면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또 돈이 나가고,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 효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수의 가격으로 또 효도 마케팅을 당하죠.
장례를 교회로 가져온다고 해서 못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후 메이크업을 하면 됩니다.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시신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저온 냉장 장치입니다. 교회가 1개씩만 준비하면 됩니다. 이렇게 했을때 가장 큰 장점은 대면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고인을 보고자 간 것이지 꽃을 보러 간 게 아니지 않습니까? 고인에게 사후 메이크업을 해드리고 상반신만 보여 드리면 고인을 접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장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승욱 옛날 권력자들의 무덤은 엄청난 규모를 보입니다. 오늘날에도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들의 무덤은 마찬가지인 걸로 압니다. 반면 칼뱅의 무덤은 지금 찾아보기가 어렵기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고, 있긴 하지만 매우 초라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고인의 유해를 납골당에 모시거나 수목장 혹은 풍장을 하는 분들도 많더군요. 황동규 시인은 시신을 자연과 바람에 맡긴다는 풍장에 관한 시를 70편이나 썼다고 합니다. 인천 앞바다에서만 한 해 5천 건 이상의 해양장이 행해진다고 하고, 심지어 퇴비장을 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3년 전에 미국 워싱턴 주에서 도입된 퇴비장은 제3의 장례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데, 미국의 콜로라도도 이를 도입했고, 뉴욕주도 곧 도입한다고 합니다. 저는 양화진의 선교사 무덤에서 가슴이 뭉클했던 경험이 있고, 제 부친의 유해도 국립묘지 납골당에 모셨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묘를 보면서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묘를 아에 없애는 것이 꼭 바람직한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가톨릭에서는 화장은 허락하지만, 교회가 지정한 장소 외에 뿌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육신의 부활에 어긋난다고 해서 그렇다는데, 크리스천이 따라야 할 바람직한 장묘 문화는 무엇일까요?
송길원 우선, 이전부터 내려오던 방식인 봉분은 산림 훼손부터 시작해서 많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야생 멧돼지들이 시신을 훼손하는 일도 생기다 보니 봉분에 시멘트를 입히기도 한다고 합니다. 저는 장묘도 시대에 따라 변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대부분 매장을 했지만, 지금은 화장을 하고, 현재는 빙장(氷葬)까지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시신을 급속 냉동시켜서 건조시킨 뒤 가루로 분해하는 거죠. 앞으로도 과학이 발전하면서 장묘에 관련된 방식도 계속 바뀔 겁니다.
저는 많은 방식 중 지금으로서는 수목장이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도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자연장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은 작은 공간만 있어도 여러 사람이 함께 묻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헨리 나우웬이 말했던 ‘묘지의 기능’ 문제입니다. 죽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려면 고인을 추억하며 그 묘지가 우리에게 주는 인생에서의 좋은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수목장의 공간이 추모의 공간, 교육의 공간, 문화의 공간으로 꾸며져서 방문하는 사람들이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욱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맞이하는 죽음과 장례 문화에 대해 일반적인 장례와는 달라져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집필하신 책에서도 기독교인의 장례식은 전도의 좋은 기회라고 하셨습니다. 올바른 장례 문화의 정착을 위해 장례식이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요?
송길원 창세기 24장에는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앞선 23장에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잃었을 때 장지를 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혼례와 장례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생애 발달 단계에 따른 출생, 돌잔치, 회갑연 등에는 ‘례(禮)’ 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최대의 리추얼(ritual)이 ‘혼례’와 ‘장례’인 겁니다. 죽음은 인생에서 만나는 하나의 절차일 뿐이기도 하지만, 나그네 인생살이를 마치고 천국으로 입성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보신다고 했고, 성경에는 장례를 치르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많습니다. 현 시대에 와서는 장례를 어떻게 치르느냐가 선교 또는 전도의 기회를 붙잡는 아주 중요한 접촉점이 됩니다. 그런데 일반 장례와 기독교 장례가 똑같다면, 거기에 무슨 은혜와 감동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미학(美學)의 의미를 다시 깨우쳐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학을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감동적이거나, 재미있거나, 유익해야 된다고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세상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금처럼 장례 지도사도 없던 시절에 위생장갑이나 마스크도 하나 없이 남의 시신을 만져주고 기도해 주었죠. 그때 유가족들이 그들에게 느낀 경외심, 존경,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교회에 가면 먹거리가 있었습니다. 미군 군수 물자 등을 가장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곳이기도 했지요. 오늘날의 복지관 역할을 한 것입니다. 교회에 가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때마다 시화전, 찬양제 등의 행사도 주최했고요. 지금이라도 앞서 말한 세 가지 가치를 기초로 해서 장례를 설계한다면, 기독교의 장례는 분명히 세상과 다른 장례로 감동을 주어야 할 것이고, 이로워야 할 것이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감동과 의미를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보다 더 정확하고 아름답게 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불신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중 하나가 죽음이라는 것은, 슬프지만 그 슬픔 가운데에서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극적인 장치가 장례 말고 또 있을까요?
저는 장례 절차 중에서도 추모사가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장례에는 추모사가 없습니다. 설교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성경을 풀어 주는 것이기에 그대로의 무게와 가치를 가지지만, 추모사에는 성경 말씀과 더불어 고인에 대한 회상과 회고, 고인에 대한 추억과 유훈이 다 담겨집니다.
또 한 가지는 장례식에서 고인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왕 할아버지, 안녕”, “별, 수국으로 피어나다”, “어머니 시집가던 날” 등으로 고인 장례의 주제어를 만들고, 고인이 남기신 말 등으로 주제어의 의미를 설명하면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이 방문한 사람에게 나침반이 되어서 ‘나도 저렇게 내 생애가 요약된다면 지금처럼 살면 안 되겠네’라고 생각하게 하는 겁니다. 고인의 사후 처리에 대해서도 고인이 시신을 기증했다든지, 장례에서 모인 비용을 고인의 뜻을 따라 혹은 유족의 뜻을 모아서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하기로 했다고 알리는 것도 좋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기부라고 알리는 겁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무리입니까? 수억 원을 기증해야만 멋진 기부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감동이 있으려면 플랜(plan)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플랜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는 60년 전부터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머잖아 우리는 장례 대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임종 난민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국에서 경험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장지(葬地)를 미리 장만해 두어야 합니다. 고인이 떠난 뒤에야 영정 사진을 챙기겠다며 급하게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는 일도 많습니다.
우리는 누울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안정감을 얻습니다. 죽음 이후에 누울 곳이 있다는 것도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지 않을까요? 저는 기왕이면 봉안장보다 수목장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욱 로마 공화정 시절에 개선 장군이 자랑스럽게 시민 사이를 행진할 때, 전차에 함께 타고 있는 노비가 장군의 귀에 “너무 우쭐대지 마십시요”라고 속삭이며 따르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개선 장군에게 수여되는 관에도 “Memento mori(그대는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Memento te hominem esse(그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Respice post te, hominem te esse memento(뒤를 돌아보라, 지금은 여기 있지만 그대 역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라고 썼다고 합니다. 로마의 위대한 전통인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늘 죽음을 생각해야겠지만,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도 부활한다는 소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초월해서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죽음에 대한 자세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메멘토 모리 시민연대 발족 이야기도 함께 해 주세요.
송길원 묘지가 주는 메시지는 다른 무엇보다 ‘필멸자(必滅者)’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메멘토 모리’의 원형이 묘지였다는 겁니다. 전도서의 두 기둥은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Carpe Diem)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 살아낼 인생은 없습니다.
마귀의 주 표적은 홀로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혼자서 이야기하면 영향력이 없으니 연대를 하게 되었고, ‘메멘토 모리 기독시민연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해외에서는 학부형 연대가 생겨서 자녀들의 스마트폰 중독에 대처하고 있다고 합니다. 열네 살까지는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주지 않으면서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라고 말해 주는 겁니다. 이때 아이들이 ‘우리 엄마만 못하게 해’라고 느끼지 않게 하려면 학부모 연대에 많은 엄마들이 참여해서 기준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희도 시민연대를 만들었습니다.
참여하시는 분들도 너무 좋아하고, 여기서 하는 일들이 함께 고민해서 진행하는 일들이기에 더 힘을 얻습니다. 그렇게 저희도 메멘토 모리 기독시민연대로 힘을 합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녀들에게나 어디에 가서도, “우리가 장례 문화를 고민했고 좋은 케이스를 가졌습니다”라고 말할 때 더 힘이 실리게 됩니다.
이렇게 개발한 것이 ‘세스(CES)’ 모델입니다.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만, 예를 들면 제가 모시고 있던 장기려 박사님이 간이식 수술에 성공하셨을 때 “그 첫 성공 케이스(case)가 나왔다”라고 표현했었습니다. 그것이 ‘C’입니다. 이런 케이스가 반복해서 성공하면 ‘E’, 즉 ‘이그잼플(Example)’이 됩니다. 우리말로는 범례라고 하죠. 그런 범례에 더 많은 사례가 완성되면 그때는 ‘S’, 즉 ‘스탠다드(Standard)’로 바뀝니다. 표준이 되는 겁니다.
저희는 장례에 대해 이미 열여덟 케이스를 만들었습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오십 예가 만들어지고 번져갈 힘도 생기게 될 겁니다. ‘스노우볼 이펙트(Snowball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 위에서 눈 뭉치를 굴리면 곧 집채만 해지듯이, 하나의 좋은 케이스가 결국에는 아주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상주가 왜 저렇게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아도 되고, 가족 간의 갈등도 줄일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에서, 메멘토모리 기독시민연대는 좋은 표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승욱 저희가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최근 연명치료에 대한 논란이 커지면서, 주변에서 연명치료 안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웰다잉(Well-dying)을 생각하게 됩니다. 웰다잉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고통 없이 죽는 것을 말하는데, 기독교인 입장에서의 웰다잉이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다 하고 기쁘게 죽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웰다잉과 관련된 이야기를 좀 해 주시지요.
송길원 웰다잉의 핵심은 ‘화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태양과 비바람과 병충해와 화해하지 않고 익은 과일은 없다”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죽음, 즉 끝의 의미는 화해를 남겨놓고 가는 거라고 봅니다. 대표적인 성경 인물로 요셉이 있습니다. 창세기 50장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웰다잉 대신 힐다잉(Heal-dying: Healing+Dying)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기독교 신자라면 ‘웰다잉’이라는 단어에 그치면 안 되고, ‘힐다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요셉은 집에서 형들의 모진 학대에 시달리다가 팔려나가기에 이르지만, 결국 형제들이 다시 요셉 앞에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 상황이 옵니다. 그때 요셉은 돌아서서 울었습니다. 여기에 요셉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나한테 그렇게 하더니 정말 꼴 좋다’가 아니었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용서도 하고 싶고 형들이 그리워서 끌어안고도 싶었을 텐데 그럴 수 없을 때,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서글펐는지 그렇게 울었습니다. 후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자 형들은 ‘요셉이 우리한테 보복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탈레반에게 부모를 잃은 한 아이가 할아버지한테 이렇게 질문했답니다. “할아버지, 한쪽에서는 용서하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원수를 갚으라고 해요. 이 두 개의 마음 중에서 누가 이길까요?” 질문을 들은 할아버지가 기가 막힌 답을 해 주죠. “얘야, 그건 네가 어떤 마음에 먹이를 주는가에 달려 있단다.” 그 말을 들은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요셉의 마음이 그 아이의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자신의 트라우마에 갇히거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합니다. 그는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21)”라고 말합니다. 그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라며 자신이 모든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이라고 함으로 그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상기시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사 당신들과 나를 구원하려 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하고는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다툼하다가도 인생의 마지막에서는 화해로 주님 앞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얻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럴 기회도 없이 가게 된다면 너무 서글프지요.
미우라 아야꼬 여사는 이를 일러 ‘생의 마지막 과제’라 말했습니다. 숙제도 못하고 가면 하나님 앞에 무슨 면(面)으로 서겠냐는 것이죠. 이것이 아까 말씀드렸던 힐다잉의 전형이자 모델입니다. 창조의 죽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짜 웰다잉은 사전 장례식(생전식)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먼 나라로 이민을 간다며 친구들을 불러 송별 파티를 할 겁니다. 내가 송별하는 게 아니라 친구들이 나를 송별해 주는 겁니다. 그때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갈 때 사용하라면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주기도 하죠. 그렇게 모인 돈을 좋은 곳에 쓰는 것입니다. 이미 가버렸는데 자식들이 그걸 사용하는 건 이상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제 모교에서 고등학교 때 영향을 주신 선생님의 사전 장례식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과 마지막 수업을 하면서 선생님이 저희에게 주시는 유훈을 받으며 감동하고, 저희도 조의금이 아니라 축하의 의미로 돈을 모아서 사모님과 여행을 보내드렸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진정한 웰다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저 고통 없이 죽는 걸 웰다잉이라고 한다면, 힐다잉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지요.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내 생애를 아름답게 활짝 피워놓고 가는 것, 이어령 박사님의 말처럼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 하나 남겨놓고 가는 것 아닐까요? 그 마지막 이야기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이것이 진정한 힐다잉의 초점이라고 봅니다. 좋은 영화는 명대사와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그게 우리가 고민해야 할 힐다잉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김승욱 장시간 좋은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