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 만난 어린 페미니스트
2022-10-05현재 카도쉬 아카데미에서 성경적 성교육 강사로서 활동하며
교회 안의 다음 세대들과 교회 밖의 다음 세대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있으며,
코람데오닷컴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여름날의 만남
뜨거운 여름날, 쉬는 시간이 되자 OO중학교 복도는 학생들로 매우 북적거렸다. 교실이 더워서인지 다른 반 친구를 만나고 싶어서인지, 교실에 남아 있는 학생은 몇 안 되었고, 대부분 복도로 쏟아져 나와서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아이들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나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싱그러움에 나까지 어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복도를 꽉 메운 아이들을 헤치며 내가 맡은 교실에 찾아가 강의 준비를 했다. 내가 들고 간 타이틀은 ‘성교육’이지만 거기서 ‘생명’을 전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짧은 기도를 마치자 곧 종이 쳤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복도에서 교실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이윽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내용을 담은 성교육 시간이 시작되었다.
일반 학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와 계획,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이기에, 나는 늘 이런 마음을 담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강의를 진행한다. 그래서 학교에 강의를 나갈 때마다 생명의 신비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태아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낙태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라고 교육한다. 그날 OO중학교에서는 2학년과 1학년이 이러한 교육을 받았다. 아이들은 지루해 하지 않고 교육에 빠져들었다. 내가 재미있는 농담을 하면 깔깔깔 웃고, 무거운 주제를 던지면 함께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강의 후 설문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성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배웠다’라는 소감을 남겨 주었다.
진짜 피해자는 누굴까?
그날 강의 중 쉬는 시간에 두 명의 여학생이 나를 따로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까 낙태는 살인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낙태를 안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여자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낙태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쩔 수 없이 하는 건데, 낙태를 살인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한테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요?”
중학교 2학년인 이 학생은 스스로 이 생각을 했을까? 그보다는 생명 중심의 성교육을 듣기 전에 어디에선가 여성 인권 중심의 이야기를 먼저 접했던 것이 분명하다.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은 내가 추가적으로 설명해 주자 금방 수긍했으나, 다른 학생은 어떤 말을 해 주어도 “그래도, 그래도” 하면서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세뇌를 당했다고 느껴질 만큼 페미니즘 콘텐츠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교육을 들은 학생들 중에 이 아이들처럼 질문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마음 속으로는 교육 내용을 거부하는 학생들이 있었을 것이다.
행복권, 선택권보다 생명권이 더 중요하며 우선 되는 가치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살아 있어야 나머지 권리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권리든 그 앞에 ‘여성’이라는 말이 붙으면 즉시 그 전제가 뒤바뀌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이다. 예를 들면, 태아의 ‘생명권’보다 여성의 ‘행복권’, 여성의 ‘선택권’이 중요하다는 식이다.
쉬는 시간에 찾아온 여학생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낙태를 고민하는 상황에서 당사자는 누구누구일까요?”
가만히 생각하던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아기, 아기의 엄마, 아기의 아빠요.”
“그렇죠. 한 가지 더 물어볼게요.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 더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를 잘 돌보고,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나요?”
“네.”
“그렇다면 이 세 명의 당사자들 중에서는 누가 약자인가요?”
그 학생은 누가 가장 보호받아야 할 약자인지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해요. 남자들은 책임지지 않고 도망가는데, 여자 혼자 아기를 낳아서 책임지는 건 불공평하니까 낙태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요.”
“그렇죠.”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주장에 합당한 해결법은 남자도 똑같이 책임지는 법을 만들자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낙태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엄마나 아빠가 아니라 아기가 자신의 목숨으로 책임을 지는 방식이잖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학생은 이 질문에 대해서 논리 없이 답을 내놓았다.
“그래도 여자의 인권도 중요하잖아요.”
엉뚱한 답이었다. 여기까지 듣고는 옆에 있던 친구도 창피하다는 듯이 급하게 인사를 하더니 그 학생을 데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페미니즘의 모순
낙태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의학이 발달할수록 그 근거를 잃게 된다. 수정 순간부터 태아는 생명이라는 것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접근할수록 오류가 더 크게 드러난다. 낙태에 대한 주장뿐 아니라 다른 주장들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은 뭐든 할 수 있다(Girls can do anything!)’라는 슬로건 아래 강인함을 자랑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이 항상 피해를 입는 연약한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절대 버리지 않는다. 그래야만 페미니즘 단체들이 정책 지원과 예산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여성을 위해 수많은 지원 정책을 펼치며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지표인 성인지예산 금액만 보더라도, 작년 기준으로 35조 원이나 사용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페미니즘이 보편적인 여성 인권을 넘어 자유연애, 동성연애, 트랜스젠더 등을 지지하는 젠더이데올로기를 퍼뜨리기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페미니즘에 앞장섰던 운동가들이 결혼 생활에 실패하거나 레즈비언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연애와 결혼에 실패한 레즈비언들은 여성만을 위한 사회를 꿈꾸며 적극적으로 모든 남성을 적으로 돌렸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다른 여성들까지 선동하여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세력을 키웠다. 그런데 자신들의 동성연애를 인정받으려면 남성들 사이의 동성연애도 인정해야 하며, 그것을 넘어서 나타나는 온갖 변형된 형태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들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여성 인권을 가르치는 페미니즘은 반드시 성 혁명, 성 해체를 함께 가르친다.
교실 밖의 거짓 선생들
이들의 가르침은 교실 안에서만 진행되지 않는다. 드라마, 영화, 예능, 유튜브, SNS 등 미디어에는 어린 페미니스트를 길러내는 젠더 이데올로기 선생들이 넘쳐난다. 요즘 예능과 유튜브에는 동성연애자들과 트랜스젠더들이 직접 출연한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삶이 처량하다고 하소연하고, 때로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평범하고 행복한지 포장하기 위해 일상생활을 찍어 올리기 바쁘다. 이러한 감정 호소에 동요된 대중은 눈이 가리워져 이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발견하지 못한다.
드라마나 영화는 어떤가? 드라마나 영화의 여주인공은 가부장적인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주부로서 가정을 돌보거나 자녀로서 부모를 돌보는 일, 이혼한 후 자녀를 혼자 돌보는 일과 같이 개인적인 일을 하면서 겪는 고충을 가부장적 사회가 주는 차별로 해석한다. 그래서 시청자로 하여금 주인공의 이혼을 응원하게 만들기도 한다. 주인공의 친구들 중에는 마음씨 착한 동성연애자나 트랜스젠더가 있어서 주인공을 이해해 주고 지지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가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세뇌하는 것이다.
세상의 가르침을 스펀지같이 바로 흡수하는 어린 학생들은 유행처럼 쉽게 동성연애를 시도한다. 실제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학교 안에 레즈비언이 많이 있고, 그들이 애정 행각을 벌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보통 한 명은 남자처럼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늘 바지만 입으며, 다른 한 명은 다른 여학생들처럼 머리도 기르고 화장도 한다. 그런데 그 둘의 관계가 일반적인 친구 관계 이상으로 항상 붙어 다니고, 연인들처럼 서로를 간섭하며 스킨십을 하는 등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문제는 드라마와 영화 속의 캐릭터나 예능에 나온 연예인들과 페미니즘 단체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트랜스젠더와 동성연애자 유튜버들이 거짓 선생이 되어 그것을 부추기고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 주는 진짜 어른,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참된 선생을 만날 기회가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거의 없다. 나를 비롯하여 내가 몸담고 있는 기관의 선생님들은 이러한 현실을 학교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기에, 아무리 먼 거리고 강의료가 없더라도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달려가서 올바른 성교육과 생명 존중 교육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만났던 그 여학생은 과연 어떤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있을까? 어떤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볼까? 밤새 어떤 드라마를 정주행했을까? 이미 페미니즘 사상에 깊이 세뇌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살아 있는 태아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힘차게 뛰는 심장소리를 듣고도 아기보다 여성이 불쌍하다는 입장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이제 겨우 15세의 어린 학생에게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빼앗고, 여성이기에 억울하다는 피해의식과 여성은 누구보다 행복해야 한다는 이기심을 심어 준 이들은 누구인가?
나는 그들의 활동이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상식과 논리가 매우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감성과 욕망, 투쟁심을 자극하여 나이가 어린 학생들이나 마음의 결핍을 느끼는 여성들, 일탈을 꿈꾸거나 지배 욕구가 강한 여성들이 선동되기 쉬운 사상이다. 그런 점에서 사이비 이단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이 가정 안에서 차별받지 않고 자랐어도 이전 세대 여성들이 겪은 것을 마치 자신이 겪은 것처럼 피해의식을 내재화하며 억울한 감정을 갖도록 종용당한다. 이 사상을 따르면 자유를 누릴 것으로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페미니즘이 요구하는 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자유를 얻기는커녕 피해의식의 감옥에 평생 갇히는 것이다.
희망은 있다
어린 페미니스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 감옥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보이지 않는다. 이 열쇠는 오직 말씀에만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진 어른으로서, 나는 어린 페미니스트들이 있는 곳 어디든지 찾아가서 남자나 여자나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귀한 생명이며, 그 둘이 서로 돕고 사랑할 때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얻게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가르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눈을 돌려 그 질서를 주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계속해서 돕고자 한다.
희망은 있다. 어린 페미니스트를 만났던 바로 그 OO중학교 1학년 반 대표였던 한 학생은 교육 중 활동 시간에 친구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다시 깨달았다. 생명과 성에 대해서 더 책임감 있게 생각하고 행동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렇다. 지금 우리 아이들의 교실에는 어린 페미니스트도 있고, 어린 크리스천도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교실에 있는 이들 모두에게 계속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진리가 교실에서 선포되면 변화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내일도 나는 어디든 달려갈 것이다.
iasu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