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이어가기

관계 이어가기

2021-12-26 0 By 월드뷰

월드뷰 DEC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1


글/ 조혜경(작가)


한 장례식장에 문상 갔을 때 일이다. 돌아가신 분은 남편 동료의 부친이셨다. 조문을 마치고 잠깐 음료수를 마시고 앉아 있을 때 교수 한 분이 합류했다. 그는 우리 앞에 앉으며 나에게 “처음 뵙겠습니다. ○○○ 교수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듣자 우리가 초면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알았다. 그의 이름이 나의 절친의 이름과 모음 한 자만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네덜란드 유학 시절, 우리 집에 와서 식사하고 남편 차로 한나절 관광을 하고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이웃에 사는 다른 유학생 가정을 찾아서 그 도시에 온 것인데 그 가족은 여름 휴가를 떠나고 없었다. 그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자(휴대전화가 없을 때였다) 학교로 연락했고, 학교에서는 같은 한국인인 우리 집을 안내해준 것이다.

방학이 되면 유학생 가정에 가족이나 지인이 방문하고, 그러면 장기간 함께 유럽여행을 떠나 그 마을엔 유학생 가족 중 우리 가족만 남아 있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언어가 어렵고 감자튀김 위주의 네덜란드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 가족은 그런 연락이 오면 흔쾌히 대접하고 손님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당시 서울에서 목회한다는 그는 내가 소꼬리찜과 된장찌개를 주요리로 차린 한국 음식에 흡족해하면서 너무 말이 없는 남편에 대해 “원래 이렇게 말씀이 없으시나요?”라고 내게 물었다. 남편을 대신해 대화 상대가 되어주며 나는 내 절친인 동문의 이름을 대고 그와 혹시 친족 관계에 있는지 묻기도 했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놀랍게도 오래전 그 날의 풍경이 환히 떠올랐다. 종종걸음을 치며 음식을 준비하던 주방, 뒤뜰이 보이는 커다란 창 옆에 있던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의 숫자보다 적다고 느껴지던 대화, 식탁 옆 낮은 창턱에 길게 늘어선 요정 까바우쩌(kaboutjes)들과 작은 화분 사랑초, 게발선인장…. 그의 이름과 함께 그날의 장면이 내 기억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 “저는 교수님과 구면인데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그럴 리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도 나의 절친과 비슷한 그의 이름이 아니라면 까마득히 잊었을 것이다. 대개 그런 경우 대접한 쪽에서는 잊고, 신세를 진 쪽에서는 기억하는 것이 흔한 일인데, 민망하게도 나는 기억하고 그는 잊고 있었다. 기억조차 못 하는 그를 보며 순간 나는 나의 반가움을 드러낸 것을 후회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잠시 당황했다. ‘제가 다른 분과 착각했나 봐요.’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힌트를 주었다. 그는 자신의 생에서 네덜란드를 방문했던 시간의 파일을 찾느라 집중하는지 일시적으로 모든 표정이 정지되었다가 이내 무안한 얼굴이 되었다.

‘아! 맞아요. 그랬었지요. 그곳이 교수님 댁이었군요. 그때 감사했었습니다. 제가 돌아와 감사카드라도 한 장 보내드렸어야 했는데….’라고 그가 말할 것을 나는 기대했었나 보다. 그러면 ‘그때 이분이 너무 말이 없어 불편하셨던 것 기억나세요? 이제 (함께 동료로 지내보시니) 이해되시지요? 늘 그냥 말이 없어요. 그래도 그날 제가 해드린 소꼬리찜은 맛있지 않았나요?’라고 나도 대답하려고 했다. 네덜란드 여행 이야기를 잠깐 추억해도 좋겠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당황했던 것일까?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더 굳어졌고 덩달아 공기도 어색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가끔 신선한 유머로 나를 빵 터지게 웃게 해주는 남편이 그쯤 해서 한마디 거들어주면 좋을 텐데 남편은 무심하게 앞에 놓인 땅콩과 오징어채만 번갈아 입에 넣고 있었다. 급기야 내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전혀 섭섭하지 않은 목소리로 좀 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 정말 기억을 못 하신다면 제가 섭섭해지려고 하네요.”

할 수 있다면 그의 경직을 풀어주고 그 어색한 시간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 네….”라고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는 더 말이 없었다. 계속 내 예상을 벗어나는 난감한 상황은 마침 문상을 마치고 나온 몇 교수님들의 합석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모두 다 함께 일어나 장례식장을 나오기까지 그의 굳어진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어두운 밤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의도와 달리 내가 좀 짓궂은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신세랄 것도 없지만 설사 까마득하게 잊었다 해도 그는 그렇게 무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집에는 많은 손님이 왔었고 그는 그저 가볍게 스쳐 간 손님일 뿐이었다.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으로 나가 손님을 모셔오고 며칠 함께 지내며 관광하고 다시 공항이나 기차역에 모셔다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네덜란드 주택의 거실 유리창은 밖에서 안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크고 넓은데, 거실에 앉아 우리 집에 손님들이 들고 남을 내다보시던 옆집 예니 할머니는 남편에게 급기야 쇼퍼르 리(chauffeur, 운전기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위궤양으로 아픈 배를 달래가며 논문을 진행 중이던 남편은 시간에 허덕여 손님들이 와도 마음 놓고 즐기지 못했지만 나는 네덜란드 우리 집에 손님 오시는 것이 좋았다. 숙식을 제공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기숙사로 제공한 집은 3층짜리 일반 주택이었다. 1층엔 커다란 거실과 주방과 화장실이, 집 중앙에 있는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오르면 2층엔 3개의 침실과 욕조가 있는 화장실이, 그리고 다시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남편이 서재로 쓰던 커다란 다락방과 빨래를 널 수 있는 여분의 공간이 있었다. 누군가 오신다는 연락을 받으면 나는 먼저 안방의 침대 커버를 벗겨 빨고 말려 다림질했다. 멕시코 만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날씨가 변하여 비가 내렸다, 갰다, 흐렸다, 맑기를 반복하지만 주로 비가 흩뿌리는 흐린 날씨 영향에 모든 침구는 말린 다음에 반드시 다림질해야 했다. 습한 날씨에 혹 번질 수도 있는 곰팡이를 차단해야 한다고 예니 할머니가 일러주셨기 때문이다.

침구 준비와 동시에 마켓에 나가서 넉넉한 양의 소꼬리를 샀다. 당시 한국에서는 명절 선물로도 소꼬리를 으뜸으로 치고 무척 비쌌으나 네덜란드에서는 그리 비싸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 오시는 손님상의 주메뉴를 언제나 소꼬리찜으로 정했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거나 혹 다른 유럽지역을 거쳐 우리 집에 들른 손님들은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매콤한 비빔국수나 비빔냉면과 함께 놓인 불고기 양념의 소꼬리찜을 무척 좋아했다. ‘와! 이 귀한 소꼬리를 이렇게 푸짐하게 먹어보다니!’ 하면서 모두 감탄했다. 궁금했던 소식들이 줄이어 나오고 풍성한 이야기와 넉넉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 정겨운 식탁, 더치 커피의 향과 함께 그들의 웃음과 대화와 체온으로 거실 가득 번져가는 따듯한 공기를 나는 사랑했다. 식사 후 아이들이 이름 붙인 당나귀 길과 염소 길을 걸으며 빈센트 반고흐의 풍경 속을 함께 산책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좀 더 허물없는 사이라면 아이들의 수영 레슨 시간에 함께 수영장으로 달려가 마음껏 물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분 덕분에 나는 잊고 있었던 그리운 옛날로 잠시 돌아갔다. 빈곤했으나 풍요로웠던, 세월에 초조했으나 느리게 시간이 흐르던, 남루했으나 젊음만으로 환하게 아름다웠던 날들.

그분과의 예상치 못한 난감한 상황의 연출 때문이었을까. A와의 일이 떠올랐다. A는 처음 소설 공부를 시작할 때 이 년 넘게 함께 공부한 친구였다. 습작한 소설을 선생님과 동인들과 함께 합평하기 위해 이메일에 올리기 전에 먼저 서로 읽어주며 조언해주는 사이였다. 당시 우리는 소설 짓기에 다 미숙했지만 나는 그녀의 글 속에 보이는 그녀만이 가진 독특한 미학적 감성을 좋아했다. 내 막냇동생과 동갑이었는데 생활 면에서는 나보다 어른스러워 나는 그녀의 텃밭에 가서 처음으로 호박잎도 따보고 줄기 따라 줄줄이 엮여나오는 고구마를 캐보고 그녀를 따라 한의원에 가기도 했다. 그녀는 맞춤법에 조금 약하여 ‘(신경을) 곧추세우고’를 ‘고추세우고’라고 거푸 틀리곤 하여 나는 원고의 ‘고추’를 빨간 볼펜으로 집어내 ‘이것은 밭에 있는, 바지 속에 있는 ㅎ’이라고 조크할 정도까지 친해졌다. 그녀는 점차 자신의 가정 문제를 조심스레 상의해 오기도 해서 우리는 서로 신뢰하고 한편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내가 한 응모전에 낸 소설이 뜻밖에 먼저 당선되었다. 당시로는 상금도 제법 컸다. 나는 그때 서울의 중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주최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바로 선생님께 감사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다른 동인들에게는 이메일로 소식을 전했다. 모두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내왔는데 A에게서만 연락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이메일을 읽지 않았나 수신확인을 해보았다. 그녀도 ‘읽음’으로 떠 있었다.

퇴근하고 내가 먼저 그녀에게 전화했다. ‘와! 축하드려요. 제가 좀 바빴어요. 우리 따로 만나 찐하게 축하해요!’ ‘당근! 내가 한턱 쏘지!’ 이런 대화를 기대했었나 보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달랐다. “아! 그래요? 제가 몰랐어요.” 나는 당황했다. 순간 멍-해지고 대답할 말을 찾느라 허둥대며 먼저 전화를 건 섣부른 나의 행동을 후회했다. “주말에 한 번 만날까?”라고 겨우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생각은 많아지고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소설을 쓴다고 달려들어 늦은 밤을 밝히며 앉아 있곤 했지만 가까운 친구의 심리 하나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나의 방법은 더 미숙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결국 그 지점부터 그녀와 어긋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이는 멀어졌고, 끝내 관계는 단절되었다.

나는 한동안 A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는 장면(마 18:21-35)이나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서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데 증인이 되었던 사울을 찾아오신 주님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명을 맡기시는 장면(행 22:6-21) 같은 성경을 읽을 땐 더 그랬다. 나는 과연 주님의 친구(요 15:12-17)일까? 하나님께서 한없이 참고 기다리시며 조건 없이 용서하시고 품어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도 절단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거듭거듭 인정했다. 혈육이 아닌 담에야 성인이 되어서 한번 어긋난 인간관계는 다시 이어가기 힘들다는 것도 교훈으로 남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A와의 일이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있는 나는 끝내 얼굴을 풀지 못하고 헤어진 그 교수님이 마음에 걸려 그날 잠들기 전에 남편에게 말했다.

“아까 그 교수님이 우리를 기억 못 할 때 다른 사람과 착각했나보다고 말했어야 했을까? 다음에 어디서고 또 마주치게 되면 어떡하지? 슬그머니 피해줘야 할까?”

남편이 대답했다.

“그땐 자기가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면 되지!”

때늦은 남편의 조크에 우리는 한참 크게 웃었다. 어디서건 다시 만날 때 ‘교수님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내가 인사하면 그땐 그가 나를 알아보고 부디 활짝 웃어주길 바란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 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했다. 저서로는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