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원회에 바란다
2022-06-02
월드뷰 JUNE 2022●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OVER STORY |
이달 커버스토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 김광동 상임위원을 통해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을 소개합니다.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을 역임한 김광동 상임위원은 스탠퍼드대학교 후버연구소 객원 연구위원,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국가보훈위원회 위원 및 독립기념관 이사를 역임했습니다(편집자 주).
김승욱: 홈페이지에 “진실화해위원회는 항일독립운동, 해외동포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권위주의 통치 시에 일어났던 다양한 인권침해, 적대 세력에 의한 희생 등을 조사하고 진실을 밝혀 이를 바탕으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설립된 독립적인 조사기관”이라고 소개되었더군요. 그리고 “최선을 다해 진실 규명에 앞장서겠습니다.”라는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저희 월드뷰도 지난날의 갈등을 극복하고 포용적 사회로 변혁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22년의 키워드를 아드벤투스(대망)로 정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을 통해서 갈라진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진실화해위원회가 제2기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활동한 제1기 위원회 활동을 먼저 소개해 주시지요.
김광동: 건국 이후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노력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제주 4·3사건, 광주 5·18사건 등이 그것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과거사 기본법’은 2005년에 제정되어 활동을 시작했고, 2010년까지 약 5년 반 동안 존치되었습니다. 그동안 6·25전쟁 때 있었던 무고한 민간인 희생과 권위주의 정부 때의 인권침해 등 약 1만 2천여 명의 사건을 처리했습니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 사회는 준전시라고 할 만큼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이 많았고, 진상 규명도 부족했고, 피해자 보상이나 배상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신청을 받아서 진상을 규명하고, 배상, 혹은 보상을 하기 위해 진실화해위원회가 국가기관으로 발족됐습니다. 1기 위원회는 약 5년 6개월간 진행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신청자는 6·25전쟁 때 국군, 경찰 및 인민군, 혹은 빨치산에게 희생된 분들입니다. 그리고 침략 세력에 맞서다가 희생당해 억울하다고 신청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약 8천여 건을 조사했고, 그중 6천여 명이 보상 대상이 되어 피해 구제를 호소한 유족의 약 85퍼센트가 배상을 받았습니다.
김승욱: 억울한 일이라면,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김광동: 무고한 희생인데 빨갱이라서 죽었다고 되었거나, 인민군에게 맞서 싸우다가 죽었는데 마치 인민군에게 부역했다거나, 아무 의미 없는 희생인 것처럼 알려진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에 너무도 참혹한 일들이 많았어요.
김승욱: 8천 건이나 되는 사건을 조사하려면 상당한 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6천 건을 보상했으면, 2천 건이나 기각을 한 셈인데, 논란도 많을 것 같군요. 민감한 내용을 누가 판단합니까?
김광동: 당시 약 240여 명의 조사관이 5년 6개월 동안 활동했고 그 결과 무고한 희생으로 판명된 경우도 있었고, 증거 부족, 혹은 입증 자료 부족 등으로 진상 규명이 안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2기가 출범한 이유도 1기 진상 규명의 연장선입니다. 1기 때 미처 신고하지 못했거나, 이런 진상 규명 활동이 진행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분들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차원에서 2020년 12월에 2기가 출범했습니다.
김승욱: 1기가 2010년까지 활동했고, 그 후 약 10년간 활동이 없다가 2020년에 2기가 시작했군요. 1기와 달라진 2기의 모습은 무엇인지, 그리고 위원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광동: 진실화해위원회 2기는 1기 때 미처 진상규명과 피해 구제 기회를 갖지 못했던 분들과 새롭게 제기된 집단 인권침해 사항 등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중 하나가 부산에서 있었던 형제복지원 사건입니다. 당시 6~70년대의 부랑자 시설을 정부에서 지원하고 위탁 관리를 한 것인데, 정상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많은 폭행 사건을 비롯하여, 사망 사건도 발생했고, 정상적인 인권이 유지되지 못한 사각지대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예는 대부도에서 8~15세의 어린 아동들을 수용한 곳에서 인권 유린이나 강제 노역 행위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조사를 해서 진상을 규명하고 잘못된 점이 있다면 배상이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2기가 출범한 지는 약 15개월 정도 됩니다. 위원회 구성은 총 9명인데, 대통령이 임명하는 1명의 위원장과 국회의 여·야(혹은 진보·보수) 상임위원 각 1명, 비상임위원 각 3명 등 총 9명이 국회의 동의를 거쳐 임명됩니다. 합의제 기구지만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장과 진보 측이 5명을 확보해 과반수를 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김승욱: 진실화해위원회의 명칭에 걸맞게 진실이 밝혀져서 분열된 한국 사회의 갈등이 해소되기를 바랍니다. 목표 중에 “권위주의 통치 시에 일어났던 다양한 인권침해”를 밝힌다는 것도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5·18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상당 부분 밝혀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까지도 헬기 총기 사격이 있었다거나, 실제로는 수천 명의 사상자였는데 밝혀진 건 수백 명에 불과하다는 논란도 있는 것 같습니다. 2기 위원회에 이와 관련한 활동도 계획되어 있는지요?
김광동: 진실화해위원회는 기본법에 입각해서 근현대 사건의 전반적인 조사와 진상을 규명하는데, 진실 규명을 위한 기본법뿐 아니라 특별법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5·18 진상규명위원회, 여수순천 사건 진상규명위원회, 그리고 최근에 보상이 시작되고 있는 제주 4·3사건과 노근리 문제 같은 몇 가지 사건에 대해서는 별도의 특별법이 지정되어 조사하기 때문에, 진실화해위원회의 직접적인 소관 사항은 아닙니다. 특별법에 의한 진상 규명과 배·보상 문제는 진실화해위원회가 다루지 않고, 그 외의 사건, 즉 6·25전쟁 때의 민간인 희생, 과거 정부에서의 인권침해나 법원 판결 재심 등을 다룹니다. 현재 1만 4천 건 정도의 피해 신청이 접수되어 있고 올해 말까지 피해 신고를 계속 받을 계획입니다.
김승욱: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노근리 사건인데,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약칭, 노근리 사건법)”을 통해 진상 규명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요?
김광동: 충북 영동의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 26일 전후 남하하는 인민군에 대한 대응 폭격에서 200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 실종, 부상 등의 희생이 발생한 일입니다. 이 사건은 1999년 미국의 AP통신 기자가 문제를 제기하여 조사가 이루어졌고, 미군이 남하하는 인민군 저지하던 중 인민군인지 민간인인지 구별이 잘 안 되는 상황에서 기총 사격과 폭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있었다는 진상 규명이 됐고 위령시설과 기념재단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이 사건이 군사적 필요와 상관없는 의도적 가해나 불법 행위라고 판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피해자 개인에 대한 배상은 없었고 관련자들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지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김승욱: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 배경이 북한 신천 지역에서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이라고 널리 알려졌는데, 이 작품의 제작 동기 역시 신천 사건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 사이 신천에서 3만 5천 명이 넘는 북한 민간인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북한에서는 신천 학살 사건의 주체를 미국으로 보지만, 지난번에 우석대학교에서 열린 ‘6·25전쟁과 이북 지역 민간인 학살’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미국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북한에서는 미군이 주도한 학살이었다고 주장하는 모양인데요, 이 신천 학살에 대해서 위원회에서 조사한 것이 있으면 소개를 부탁합니다.
김광동: 신천 사건은 근현대사의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작 사건이지요. 북한 체제의 유지에는 선전 선동으로 주민을 세뇌시켜 반미 감정과 투쟁에 분노감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해도 신천군 학살입니다. 그러나 당시 미군은 그 지역에서 작전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미 밝혀진 명백한 사실이고, 좌익 학자들조차 인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 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돌파해 북한 지역을 향해서 올라가니까 몇 년 동안 억눌리고 탄압받고 학살당하며 엄청난 피해를 봤던 사람들이 일제히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수복을 앞당기는 과정에 돌입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 공산주의자들과 자유민주주의자들, 혹은 소위 좌익과 우익, 혹은 공산 세력과 기독교 세력 간의 대충돌이 발생했고 서로 죽이는 과정에서 2만 몇 전후의 대규모 희생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미군이 관련된 것이 없습니다. 조작된 북한 전시관의 전시물이나 전시 내용이 너무 끔찍하고 참혹해서 차마 보기 어려운 수준인데, 그것을 북한 전역에 있는 주민들과 학생들이 반드시 보게 만듭니다. 북한의 신천 학살 전시관은 한마디로 미국과 목숨 걸고 싸우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독재주의, 전체주의 체제의 허위 선동기관이자 세뇌 기관입니다.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의 배경에 대해 피카소가 공식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피카소는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피카소가 그런 그림을 그렸을 때에는 미군, 혹은 국군에 의한 학살을 표현한 것 아니겠냐고 추정되어 왔을 뿐입니다.
김승욱: 진실화해위원회 소관은 아니지만, 제주 4·3사건은 어떻게 조사가 진행되었는지요?
김광동: 제주 4·3사건도 별도의 특별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추가 접수를 받고 있지만 25~30년에 걸쳐 조사가 됐기 때문에 진상 규명은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1만 4천여 명 정도의 피해나 희생이 있었고 거기에는 빨치산 남로당에 의한 희생, 그리고 남로당과 빨치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군경에 의한 희생이 다 합쳐진 것입니다. 모든 희생자에게 동일하게 9천만 원, 장애가 있거나 부상을 입은 분들에게는 등급에 따라 5~9천만 원의 차등을 두고 지급합니다. 향후 5년 동안 심사 결과에 따라 배·보상될 것입니다.
김승욱: 보상 여부도 중요하지만 사건 발생 원인을 밝히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 이런 비극이 발생했다고 보십니까?
김광동: 당시 북한 정권과 소련의 점령 체제, 중국의 공산당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이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은 모두 다 공산 제국의 일원으로 편입이 됐습니다. 길게 보면 동쪽의 베를린에서부터 유라시아 대륙 끝의 평양까지 만 킬로미터가 넘는 지역 40여 개 전후의 국가들이 전부 공산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반도 끝자락에 있는 대한민국은 공산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스탈린,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의 한반도 끝에 붙어 있는 대한민국을 공산화시켜서 공산제국의 통일 국가로 만들려고 했고, 결국 6·25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전에 수많은 대한민국 건국 저지 투쟁을 벌였습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사건, 1948년의 남로당 2·7투쟁,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등 전면전 이전에 공산주의 체제로 떨어뜨리기 위한 모든 노력을 했던 겁니다. 본질적으로 김일성이 대한민국을 공산화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펼쳐진 겁니다. 다만 제주 4·3사건은 진압하는 과정이 과잉되었고, 또 무차별적인 측면이 있어서 다수의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까지 우리가 보듬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보상까지 진행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그 사건의 본질과 성격은 공산주의자들의 공산화 투쟁적 성격이 분명하지만,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무고한 희생이 있었으므로 그것까지 다 포함해서 서로 통합·화해의 길로 가는 차원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김승욱: 이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지요. 먼저 지난 1년 3개월 동안 느낀 점이나 문제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김광동: 가장 놀란 것은 6·25전쟁은 인민군의 침략 전쟁인데도 침략 세력에 의해 우리 민간인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서는 조사가 미비하거나, 조사 결과 희생자 지정이 되어도 보상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전쟁에는 많은 민간인 희생이 불가피하게 발생합니다. 따라서 민간인 희생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보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침략군인 인민군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은 보상을 안 해 주고, 군인과 경찰에게 희생된 사람들에게만 배상을 했습니다. 전 세계 근대 국가에서 침략 세력에게 피해를 본 사람은 보상을 안 해 주고, 침략을 막는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에만 보상을 해 주는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런 일이 펼쳐집니다.
또 문제는 인민군들이 내려왔을 때 그들과 합세해서 대한민국에 저항한 세력들이 있습니다. 소위 부역자라고 부릅니다. 수복하는 과정에서 보복당한 부역자들은 민간인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보상을 해 줍니다. 그런데 군인과 경찰을 지원했던 우리 민간인 단체, 소위 반공 우익 투사들에게는 보상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기본 원칙이나 정의에도 반하는 것입니다. 인민군에게 희생당했다고 이야기하면 보상을 받지 못하고, 군경에게 희생당했다고 하면 보상이 주어지니까 진술을 번복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위원회 1기 때, 어떤 분이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것이 입증됐는데 2기 때 와서는 다시 생각해 보니 인민군에게 희생당하지 않았고 군경에 의해 죽었다고 진술한 일이 다수 발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1기 때는 인민군에게 납치를 당했다고 얘기했다가 2기 때는 납치가 아니라 군경이 죽였다고 진술하는 상황도 벌어집니다. 공식적으로 적대 세력에게 희생당한 사람이 그것을 감추고 우리 국군과 경찰이 죽였다고 신고해야 보상을 받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정말 분노가 치밀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입니다.
김승욱: 이번에 2기 위원회에서는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박명수 교수팀에게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인 등 종교인 학살사건’에 대한 연구 용역을 맡겼고 이에 대한 직권조사에 착수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직권조사가 세 번째라고 하더군요. 이번 연구 용역 결과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남침한 인민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개신교 1천 26명, 천주교 119명, 총 1,145명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그 유가족들은 일체 보상을 못 받은 겁니까?
김광동: 보상이 일체 없었고, 이제야 진상 조사가 착수되는 상황입니다. 기독교인의 희생 문제는 오래전부터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국가적 차원에서 기독교의 광범위하고 대규모적인 집단 희생에 어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6·25전쟁 때 빨치산이나 인민군 등 적대 세력에 희생된 분들은 두 부류입니다. 첫째 부류는 공무원과 경찰 가족입니다. 군인과 달리 이들은 지역 사회의 치안을 맡다 보니 그 지역 사회에서 외부에 쉽게 알려져 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둘째 부류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런 부류의 희생자가 전체의 절반, 혹은 3분의 1 정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1,145명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용역 조사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신안의 진리교회, 서울 안국동 안동교회를 포함해서 수많은 교회에서 신청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아마 두 배에 가까울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1,145명에 대한 집단 희생의 용역 결과를 가지고 직권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직권조사는 신청서가 접수되지 않아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위원회가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피해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직권조사 결정이 확정됐기 때문에 앞으로 1년 6개월에서 2년에 걸쳐 조사가 되면 적어도 절반 이상의 규모는 밝혀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승욱: 사실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장애로 여기지요. 특히 조선에서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기독교가 널리 퍼졌기 때문에 교회가 반미와 공산당의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를 탄압했지요.
김광동: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봉건체제에 맞섰고, 일본 군국주의에 맞섰을 뿐만 아니라 공산독재에 맞섰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거부하고 인간을 통제 수단으로 만들려는 모든 체제를 거부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편에 서서 미국에 맞서야 하는데 기독교는 미국의 종교라고 보았습니다. 게다가 기독교는 서구의 근대 제도와 사상과 근대 교육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근대체제를 거부하고 독재체제를 만들기 위해서 공산주의 체제는 기독교를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3·1 항일운동고 그렇고, 신의주 의거나 함흥, 원산 의거 등 모든 반공투쟁이 다 기독교를 기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전체주의 독재의 논리와 교회 운영 원리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교회 운영이 곧 민주주의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김승욱: 영광군에서는 정말 많은 기독교인이 희생되었더군요. 영광교회에서 77명, 또 연산교회에서는 전체 교인이 몰살당했다고 합니다. 어느 책을 보니 최근까지도 사망하신 분들의 사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김광동: 한국 사회의 당시 기독교 분포는 한반도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었습니다. 즉 신의주, 정주, 용천, 평양, 황해도, 이렇게 펼쳐져 있었고, 남쪽에는 천안, 전라북도, 목포, 군산, 영광 쪽으로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래 기독교가 많이 확산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북한에서 내려온 기독교인들이 합류하면서 그 지역이 기독교 밀집 지역이 됐고 인민군들이 철수하면서 광범위하고 참혹한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김승욱: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가 끊어지니까 북한으로 도망가지 못한 잔당들이 호남 지역에 많이 남아 있었군요.
김광동: 그렇습니다.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는데, 1950년 9월 24일경부터 인민군들은 패닉 현상에 빠집니다. 그래서 적대적 지주가 될 만한 인물들, 즉 나중에 그들과 적대성을 갖게 될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후퇴 내지는 산으로 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당시 추석이 1950년 9월 26일이었는데 민족 최대 명절인 그날 전투가 우리 민족사에 가장 많은 희생이 발생한 날이 되었습니다. 영광 지역에서만 대략 1만 4천 명 정도가 희생되었고 그 주변 신안, 영암지역에서는 6~7천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김승욱: 6·25전쟁 기간에 있었던 기독교와 교회의 순교와 관련해서 이번 연구에서 다 다루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으로 후속 연구가 이루어질 예정인지요?
김광동: 연구 용역에서 밝혀지거나 거론되지 않은 훨씬 많은 기독교인의 희생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영암의 진리교회 48명의 집단학살이 신청되어 있고, 서울 안동교회의 희생도 그렇습니다. 물론 춘천 외방선교회의 천주교 희생과 납치, 혹은 사찰과 스님들의 희생도 종교인에 대한 집단희생으로 함께 조명될 것입니다.
김승욱: 이번에 교회와 국민적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연구 용역 내용을 가지고 현 정부가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루도록 건의할 예정인지요?
김광동: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직권조사가 가능하고,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5명의 조사 인력을 투입하여 집중적으로 조사를 진행할 것이고, 추가 연구 용역을 통해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각 교회와 교단의 협조도 받을 계획입니다. 접수된 신청서는 물론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6·25전쟁 중의 학살 피해 규모를 확인하고, 국가의 사과와 기념물 조성, 위령사업 등을 권고할 계획입니다.
김승욱: 해방 이후 6·25전쟁까지 5년간 김일성 정권은 북한 지역에서 많은 기독교인을 학살하고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그래서 1·4후퇴 당시에 많은 기독교인이 북한에 가족과 재산을 모두 남겨 두고 목숨을 건 피난민 행렬에 가담했지요. 북한의 기독교인과 지주 계급에 대한 학살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김광동: 문명 파괴와 민족 유린적인 북한에서의 희생, 특히 정치범, 기독교와 지주층 등의 광범위한 과거 희생에 대한 조사는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또 재산 피해는 다루지 않습니다. 북한에서의 희생에 대해서는 조사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고를 받아 조사를 시도하기는 하겠지만, 결국 대다수는 장기 과제로 남을 것입니다. 북한에 자유민주체제가 들어선 이후에 과거청산 차원에서 본격화될 것입니다. 물론 본격 조사가 불가능하더라도 기본 자료와 정보는 남겨 놓을 계획입니다.
김승욱: 1기 출범 이후 5년여 간 조사를 진행했는데, 2기에서도 전부 밝히려면 앞으로 2~3년으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충분한 자원과 인력이 있습니까?
김광동: 사실 이러한 사건들은 한시법으로 몇 년 만에 마무리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장기적으로 몇 십 년에 걸쳐 꾸준히 진행해야 할 사안이지, 5년 전후로 정신없이 조사하고, 보상해 주고,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는 195명 정도의 공무원과 약 140억 정도의 예산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들어온 신청이 1만 4천 건 정도인데 4천 건 남짓 해결할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140억 예산은 보상금액을 뺀 진행 예산입니다. 배·보상은 저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상 규명 결과 보고서가 나오면 그것을 기반으로 민사 소송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법원에 가서 소송인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입증되면, 법원에서 배·보상 판결을 하게 되는데 현재까지는 대략 희생자 1인당 1억 2~3천만 원 정도의 금액이 배상되었고, 앞으로는 제주4.3특별법에 준해서 9천만 원으로 통일되어 지급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승욱: 보상금액을 세월호 희생자들과 비교를 많이 합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너무 보상을 많이 해 주니까 다른 피해자들이 비교해서 항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광동: 한국의 역사 사건에 대한 희생에는 원칙이 없습니다. 다시 얘기하면 노근리 희생은 배상은 없고 지원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침략 세력인 인민군에게 희생을 당한 분들은 배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납치를 당했더라도 전쟁 중에 납치된 분들에 대해서는 일체 보상이 없었는데 전쟁 후에 납치된 분들은 보상이 됩니다. 그래서 수십 개의 특별법으로 만들어지다 보니까 같은 사건이라도 거창 양민 사건인지 국민방위군 사건인지 여수 순천 사건인지에 따라 보상의 수준이 다르고 액수도 다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해결이 되었지만 다른 곳에서 문제가 야기되고, 한쪽을 해결하면 다른 쪽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지금은 해결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김승욱: 한시적 위원회로는 해결할 수가 없겠군요. 정말 이건 장기적인 시각에서 국민 화합적 차원으로 추진해야 될 과제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은 희생을 당했는데 왜 그동안 기독교계는 여기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는지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김광동: 저도 그 부분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우리 정부나 군에 의해서 희생되면 큰 뉴스가 되고, 교과서에도 실리고, 각종 진상규명위원회도 발족됩니다. 그런데 좌익이나 빨치산, 또는 인민군이 경찰, 경찰 가족, 기독교인들을 죽였다고 하면 큰 사건이 안 되고, 진상 조사도 거의 하지 않고, 보상도 안 하고, 기록이나 기념관이나 위령시설도 없거나 교과서에 남겨지지도 않습니다. 노근리 사건은 사망, 부상, 실종 다 합쳐서 200여 명 정도이지만 그 사건은 교과서에 굉장히 비중 있게 실려 있고, 영광교회, 진리교회, 병천교회 등에서 발생한, 집단희생자가 몇 천 명에 이르는데도 교과서에 단 한 줄도 실리지 않습니다.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이한 일이고,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현상입니다.
김승욱: 지난번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을 만나서 미군 유해를 송환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는데, 우리나라 국군 포로들을 송환해 달라거나 보상을 해 준다거나 하는 얘기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은 조사를 하지 않습니까?
김광동: 진실화해위원회는 민간인 희생을 조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국군 포로 문제는 국방부와 통일부가 처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만 북한에서 포로가 된 후 민간인 신분으로 당한 희생과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위원회가 다루고 있지만 북한에 현실적인 조사와 피해구제를 요구하는 것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사실 통일부와 국방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됩니다. 근데 우리 정부는 지금 북한에게 납북자, 혹은 국군 포로를 송환하라거나 피해 배상을 하라는 요구를 못하고 있어요. 어떻게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김승욱: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할 때, 우리도 머지않아 흡수통일할 것이라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도 독일식 통일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가 동·서독은 서로 전쟁도 안 했고, 인적 교류도 많았고, 또한 동독은 공산 진영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였는데 우리나라는 다릅니다. 해방 이후 많은 피를 흘렸고 6.25전쟁 후에는 남북이 서로 상대를 주적으로 여겼습니다.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로부터 피해만을 전해 들었던 후손들에게 오늘날까지 그 증오가 내려왔기 때문인데, 진실이 밝혀진다고 화해가 될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듭니다. 그래서 남북한은 합의에 의한 평화 통일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광동: 김 교수님 의견에 100퍼센트 동의합니다. 독일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북한의 독재 체제를 버티게 해 주는 근본적 힘은 중국 시진핑이나 러시아 푸틴 체제의 힘입니다. 북한은 시진핑이나 푸틴의 오른팔 돌격 대장, 즉 그들을 위해서 복무하는 종속 체제라고 봐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그렇지만 지정학적으로 독재 체제인 중국이나 러시아의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이상 중국, 러시아를 벗어나 북한 사회가 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김승욱: 그러나 우리 못지않은 미움과 증오를 극복한 사례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유태인과 독일의 관계라든지, 남아공에서의 흑인과 백인의 갈등이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심한 갈등을 겪었음에도 상처를 보듬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도 이렇게 진실 화해를 위한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이런 노력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가 강조하는 사랑만이 과거의 원한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이를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민족의 아픔을 딛고 억울한 희생자들이 보장도 받고, 명예도 회복하고, 그래서 정말 대한민국이 좀 더 살맛 나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김광동: 감사드립니다. 주어진 책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