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이라는 괴물
2021-12-17
월드뷰 DECEMBER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COLUMN 1 |
글/ 이상원(전 총신대학교 교수, 월드뷰 편집위원)
변증법(dialectic)은 현실태를 명제(thesis)와 반명제(antithesis) 간의 긴장과 대립으로 해석하는 서술법을 가리킨다. 하나님, 생명, 무한, 은혜, 아름다움이 명제라면, 인간, 죽음, 유한, 책임, 추함은 반명제다. 변증법에는 헤겔(Hegel)의 정반합 변증법과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질적 변증법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변증법이 그리스도 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구성되었으므로 기독교 철학임을 강조한다. 과연 두 변증법은 기독교 철학일까?
무한히 반복되는 정반합 변증법
변증법은 명제나 반명제에 진리와 거짓이 섞여 있다고 파악한다. 변증법은 처음부터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헤겔은 이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헤겔은 명제의 반쪽 진리를 살리고, 반명제의 반쪽 진리를 살려서 통합하는 방법으로 완전한 진리를 얻고자 했다. 이것이 “정→반→합”의 순서로 진행되는 “정반합 변증법”이다. 그런데 헤겔은 바로 문제에 봉착했다. “합의 명제”에 이른 순간 “합의 명제”는 곧바로 명제가 되고, 명제에는 반명제가 생성된 것이다. 이는 “합의 명제”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명제로 올라서지 못한 채 또다시 진리와 거짓이 뒤섞여 있는 모호한 상대적 진리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헤겔은 합의 명제에 이르고자 하는 “지양”의 시도를 무한히 계속해야 했다. 이 시도를 무한히 계속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반합 변증법의 주체는 인간의 이성이므로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은 이성으로써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한 것이다. 헤겔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온통 모호하고 상대적인 진리만 있는 곳이었다.
헤겔은 자신의 정반합 변증법이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구성한 기독교 철학이라고 강변했다. 헤겔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으로 탄생하신 성육신 사건을 명제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반명제로 본 다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합의 명제로 해석했다. 이렇게 보면 정반합 변증법과 구속사건의 구도가 기가 막히게 서로 딱 들어맞는 것 같다. 그러나 헤겔은 양자가 그 본질에 있어서 판연하게 다르다는 점을 간과했다.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 운동은 무한히 반복되는 운동이나 “성육신-십자가상의 죽음-부활”은 단회적 운동으로서 역사 안에서 절대 반복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번의 부활로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완전하게 극복하고 초월하셨다. 한 방에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에 이른 셈이다. 하나님은 한 방으로 성취하신 부활 안에서 세계를 재편성하신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영원히 모호한 상대적 진리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성의 자기운동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역설의 질적 변증법
헤겔의 “지양”의 시도가 실패했음을 간파한 키에르케고르는 명제와 반명제의 갈등을 종합하려는 시도를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런 시도는 쓸데없는 시간과 힘의 낭비일 뿐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명제와 반명제는 워낙 질이 달라서 어울릴 수가 없음을 간파하고, 상호 모순 속에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질적 변증법”이다. 질적 변증법에서는 더 이상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온 세상이 상대주의와 주관주의의 천하가 되었고, 모순과 대립과 갈등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키에르케고르는 질적인 변증법이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철학이라고 강변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 신학적 근거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라는 기독론이고,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자 했던 구약의 사건이다(창 22장). 이 두 가지 신학적 근거는 피상적으로 보면 질적인 변증법과 유사한 면이 있어 보이지만 그 내용은 판연하게 다르다.
키에르케고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명제(신성)와 반명제(인성)가 절대적 역설로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절대적 역설로 나타난다는 것은 진리를 조화를 이룬 통일체로 이해하지 않고 명제와 반명제를 대립과 긴장이라는 변증법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사복음서에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신성과 인성이 극히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면서 통일된 하나의 전인으로 나타날 뿐, 결코 대립과 긴장 관계로 나타나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고 긴장과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도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설적인 명령을 받아들였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성경의 해석은 다르다. 히브리서 11장 19절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가?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이성적으로 추론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이삭을 통하여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드린다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반드시 이삭을 살리실 것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만한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끝까지 납득하지 못하고 의구심이 여전한 상태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오류에 빠진 변증법 신학
한마디로 말해서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과 키에르케고르의 질적 변증법은 기독교 철학이 아니다. 따라서 이 두 변증법을 도입하여 체계를 세운 신학은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몰트만(Jurgen Moltmann)은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을 도입하여 자신의 정치 신학의 핵심 틀을 구성했다. 헤겔의 변증 운동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처럼,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민중들의 죽음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정치적 변혁 운동을 전개하는 민중들에게서 수없이 반복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단회성에 손상을 가하고, 민중의 행위를 부당하게 범신론적으로 그리스도의 행위와 본질상 동등한 것으로 우상화하는 오류를 범했다. 바르트(Karl Barth)는 키에르케고르의 질적인 변증법의 틀을 빌려다가 신학 체계를 구성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일반계시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초절주의(超絶主義, Transcendentalism)의 오류에 빠졌다.
죽음과 파멸로 향하는 변증법 운동
변증법이 명제와 반명제의 관계를 대립과 긴장 관계로 파악한다는 말은 인간들 간의 관계, 그리고 집단들과의 관계의 본질을 “증오와 미움”으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관계를 증오와 미움을 바탕으로 해석하면서 증오와 미움을 극복하는 장치를 제시하지 못하면 관계는 파멸적인 결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변증법을 채택한 철학자들로는 헤겔, 마르크스, 키에르케고르를 들 수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세 철학자의 철학 체계는 “증오와 미움”을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갖추지 못했다. 헤겔에게 있어서 신은 곧 이성이므로 이성의 자기운동인 변증법 운동이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은 이성에게 변증적 관계의 원인이 되는 “증오와 미움”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계급 간의 “증오와 미움”을 역사 안에 내재해 있는 불변의 과학적 법칙으로 아예 고정시켜 버렸다. 키에르케고르는 명제와 반명제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그냥 방치해 두었다.
변증법 운동은 항상 명제로부터 반명제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헤겔은 반명제로 나아가는 것을 차단해 보려고 처절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했고, 마르크스는 오히려 조장했으며, 키에르케고르는 아예 무관심하게 방치해 두었다. 명제는 “생명”이며, 반명제는 “죽음”이다. 이 말의 의미는 변증법 운동은 항상 생명으로부터 죽음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변증법 운동을 자율적으로 진행하도록 내버려 두면 파멸적인 죽음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변증법 운동을 절대적인 역사운동 법칙으로 신봉하고 이 운동에 숙명적으로 올인(all in)했던 마르크스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장악한 제정 말기 러시아와 중국에서 수천만 명 이상의 무고한 생명이 살해되고, 기타 국가들에서도 예외 없이 대규모 인명살해가 자행되었으며 종교와 도덕 규범은 무너지고, 학문의 자유는 말살되고, 사회는 감시와 검열과 자기비판이 난무하는 폐허가 되어 버렸다.
실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진정한 아가페 사랑–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보여주신 주권적인 은혜,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자들이 보여주는 아가페 사랑–이 빠진 변증법은 파멸로 갈 수밖에 없다.
<swlee7739@hanmail.net>
글 |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과(B. A.), 동 신학대학원(M. Div.), 미국 웨스트민스트신학교(Th. M.),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교(Th. D.)에서 수학했다. 미국 보스턴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대표, 한동협 현대성윤리문화 교육원 원장, 월드뷰 편집위원, 차바아 운영위원, 복음법률가회 운영위원, 카도쉬 아카데미 고문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