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관점에서 본 현 정부 복지정책 평가와 과제

기독교 관점에서 본 현 정부 복지정책 평가와 과제

2021-12-15 0 By 월드뷰

월드뷰 DEC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3


글/ 이준우(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


문재인 정부의 포용적 사회복지의 성과와 한계


문재인 정부는 역대 그 어떤 정부보다도 의욕적으로 사회복지를 국가적 의제 중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삼고, 포용적 복지국가를 천명했다. 기초연금을 인상하고 아동수당을 도입했으며,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한계로 지적되었던 부양 의무자 단계적 폐지와 치매 국가 책임제, 보장성 강화를 위한 문재인 케어 도입과 지역사회 중심의 통합적인 복지체계인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통합돌봄)를 실시했다. 그리고 사회적 돌봄과 안전보장을 사회복지정책으로 실행하면서 노인맞춤돌봄서비스와 노인과 장애인 학대 피해 예방 및 피해자 지원 강화, 장애인 재난 및 안전 지원 정책기반 구축 등과 같은 굵직한 작업도 수행했다.

또한, 장애인의 포용적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창의적이며 혁신적인 사회적 서비스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현실화하도록 뒷받침했다. 가령 포용적 성장을 위한 수어와 점자의 언어권 신장 및 정보 격차 해소를 위한 정책적 대응을 말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인 농인의 공용어인 한국수어와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점자 분야에서도 빅데이터 구축을 통해 정보 격차와 차별 없는 기회 제공과 관련 산업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회적 양극화 심화와 청년실업, 근로 빈곤 등 다양한 복지 수요에 대한 대응은 당사자들의 만족을 끌어내기에 턱없이 미흡하다. 지속적인 경기침체로 세수는 한정되어 있고, 코로나19로 인해 정부 재원을 미리 당겨쓰고 있을 정도로 중앙과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적 어려움이 만성적으로 가중되고 있어서 이미 늘어난 복지정책들을 앞으로도 지속해서 펼쳐갈 수 있을지 그 부담이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복지비용 지출이 늘어나는 만큼 고용과 국가적 생산능력도 높아지는 선순환적인 경제 흐름이 일어나지 못하고, 소모적인 형태로 고착되는 데 있다. 즉, 복지비용의 증가가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엄청난 사회복지 예산을 원폭투하 하듯이 쏟아 붓고 있는데도 정작 국민은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개인 간, 가족 간, 집단 간, 조직 간의 편 가르기와 온갖 정쟁과 갈등, 반목 등이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여야 간 싸움은 보편화 된 현상이 되었고, 대선 후보들과 정치권은 국민의 신뢰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그사이 직장, 가정, 지역사회 등 삶의 현장은 삭막한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삶의 터전이 천박하고 저급한 이기심과 탐욕으로 변질되고, 어느덧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에서 ‘공동체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삶은 팍팍해지고 이웃 간의 정은 메마를 대로 메말라 버렸다.

이번 정부는 분명한 로드맵과 컨트롤 타워 없이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이 사업 만들고, 저 사업 만드는 방식으로 사회복지 제도와 서비스, 시설을 확장했다. 그러나 이들이 그동안 감당했던 수많은 복지 활동의 한계가 벌써 도래했다. 이제 ‘사회복지’라고 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퍼주기 사업이라는 인식이 현 정부 들어서 더욱 고착되었다. 동시에 일률적이고 정형화된 현금 혹은 현물 지원, 나아가 사회적 일자리 제공에 국한된 것으로 사회복지를 한정시켜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사회복지의 궁극적인 목적은 서비스를 통해 대상자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사회의 생산적인 주체로 세워져 가게끔 하는 데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큰 기대와 함께 일정 부분의 의미 있는 결과물을 산출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의 사회복지는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더욱이 빈곤과 질병에 취약한 복지 대상자들에 대한 배급과 보호 조치는 국가만이 주도하는 형태로 강화되고 있다. 사회복지시설과 사회복지사에 대한 정부의 불신이 강화되고, 정부 명령에 길든 사회복지는 더욱 획일적인 물질적 시혜를 중심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런 추세 속에서 인간의 복지를 담보하며 사회에 희망을 주는 복지의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 중 하나로, ‘기독교 영성에 기초한 사회복지실천’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기독교 사회복지실천과 영성


기독교 사회복지실천은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를 성취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영적 사역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회복지실천, 하나님의 의가 전제되지 않는 사회복지실천은 기독교 사회복지실천이 아니다. 특히 기독교가 지향하는 사회복지실천은 일반적 사회복지실천을 교회와 기독교 기관에서 수행하는 것만이 아니다. 일반적 사회복지실천이 인간애와 과학적 엄밀성에 근거한 것이고, 사회를 유익하게 하며 곤궁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세속적 가치와 인본주의적 실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기에 기독교의 사회복지실천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결국, 기독교 사회복지실천의 본질은 영성에 있어야 한다. 즉, 영성적 사회복지실천이어야 한다.

최근에 와서 이타적 활동의 관심은 물질 중심에서 지식 중심으로, 지식 중심에서 정책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이제 정책 중심에서 새롭게 전개될 또 하나의 변화를 추구해야 할 단계를 맞고 있다. 사회복지에서 영성에 대한 주목과 관심은 이러한 시대적 전환점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한계에 직면해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외로움과 허무함 속에서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패배감의 불안 가운데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끝없는 경쟁심을 불태우며 때론 적대감을 느끼고 갈등 구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하나님의 현존(‘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교회 공동체’ 내지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통해 현실 세계에 펼쳐진다. 당연히 기독교 공동체는 성령의 선물이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우러지는 토대 위에 세워진다.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함께 불러 모으실 때 실현된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차이를 품고 포용하며 서로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함께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게 하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의 ‘신비’다. 자연스럽게 따뜻한 ‘상호 돌봄’이 공동체의 기본으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돌봄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쉼을 얻으며 치유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기쁨 어린 소속감과 안전감을 경험하게끔 한다. 그러므로 사회복지실천이 행복한 복지공동체를 지향하는 전문적인 개입 활동이라고 할 때, 영성은 사회복지실천의 전제가 되기도 하고 목적이 되기도 하며, 동시에 실천적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핵심은 사회복지실천에 대한 기독교 영성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육신적인 기독교 영성적 사회복지실천의 구현


기독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실천을 동시에 추구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기독교적 영성은 이러한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하나의 관점 내지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사회복지실천은 영성에 토대를 둔 영성 사회복지실천이어야 한다. 아울러 영성 사회복지실천의 핵심은 성육신적 사회복지실천이 되어야 한다. 결국, 영성적 사회복지실천은 성육신 영성의 관점으로 수행되는 기독교 사회복지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성육신 영성에 근거한 사회복지실천은 인간의 생명이 참된 생명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면서 생명다운 생명의 삶을 살 수 있게끔 한다. 즉 성육신적인 영성 사회복지실천은 생명 존중의 인권에 기초하면서 동시에 진정한 사회적 연대를 구현한다. 동시에 이는 지역사회를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데에 그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적극적으로 지역사회를 복지 친화적으로 재구성하는 전문적인 활동이다. 성육신적인 영성 사회복지실천은 단지 지원하고 후원하며 돕는 활동에 그치지 않고,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과 상황까지 고려할 뿐만 아니라 복지서비스 이용당사자와 그가 사는 지역사회 자체를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구조로 ‘탈바꿈(transformation)’ 시키고자 노력하는 활동이다. 여기에는 경제적이며 정치적이고 환경적‧문화적‧사회적 영역과 같은 거시적 차원을 포함하며, 동시에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영역도 아우른다. 특히 성육신적인 영성 사회복지실천은 관 주도적인 공공적 사회복지서비스 체제에 종속되지 않고, 민간의 자원과 역량을 최대로 끌어내 공공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자원을 연계하며 동시에 전문적인 서비스개입 실천을 수행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또한, 자발적 사회봉사와 후원 등이 선의를 가진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잠재된 지역사회의 자원을 인적‧물적으로 ‘사회자본’화하는 활동이 되기도 한다. 나아가 이는 빈곤과 지역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사회적 문제들을 예방하는 사업까지도 비중 있게 다룬다. 그러므로 당연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지서비스 이용당사자의 관점에서 그들의 권리와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하면서 이용당사자들과 지역주민들 스스로 노력할 의욕을 북돋우며 주체적인 역량을 갖게끔 하는 서비스개입 활동이다.


한국 사회복지의 과제


오늘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과제는 사회통합의 실현이다. 사회복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책무 또한 사회적 갈등과 간격을 좁히거나 상쇄시킴으로써 진정한 사랑과 화해로 통합된 사회를 실현하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도 외로움과 허무함에 빠졌고, 삶의 의미를 상실했으며, 희망과 소망을 포기한 이들이 어떻게 이 문제들을 극복시켜 나가느냐가 한국 사회복지의 과제이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정책과 서비스 실천의 과정이 사회복지사의 주관적 관점이나 국가 통치자의 이념에 따라 각기 작용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사회복지실천은 일관성 있는 개념에 준거해 시행되어야 한다. 기본적이며 추상적인 가치가 실천과정에서 조직화 되어 나타나야 한다. 윤리와 가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현 사회의 모든 관념을 포용하고 사회복지의 기본이 되는 패러다임의 정립이 필요하다. 사회적 관점을 초월하는 것이 영성이다. 특히 성육신적인 기독교 영성의 패러다임은 실천 현장을 세속적 가치와 인본주의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한다. 성육신적인 기독교 영성은 사회복지 실천의 기본이다. 이러한 영성은 개인 치유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곳에 작용한다.

성육신적인 기독교 영성의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정책과 서비스들을 한 자리에 펼쳐놓고 면밀하게 검토할 때가 되었다. 선택과 집중의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복지정책이 국가와 국민을 신바람 나게 하는 근원이 되게끔 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서비스를 공급하는 입장의 관행에서 벗어나 수요자나 이용당사자의 관점에서 이용자의 권리에 부합하는 서비스 방향을 설정하고, 동시에 서비스 투입에 따른 성과를 ‘개인의 주체성과 공동체 공생성의 함양’까지 염두에 두는 사회복지정책과 서비스 실천을 국가적 과제의 하나로 실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 정부의 사회복지 전반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상황이다. 국민의 진정한 행복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제도로서의 사회복지로 재구조화해야 한다. 복지 때문에 망하지 않고 복지 때문에 더 잘 살기 위한 묘안을 짜내야 할 때다. 복지는 사업이 아니라 생활이다. 복지는 돈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대와 신뢰에 기반한 상생 운동으로 펼쳐져야 한다.

<knudeaf@kangnam.ac.kr>


글 | 이준우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미국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부와 대학원 수화언어통번역학과 교수이며, 사회복지사, 수어통역사, 목사,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