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시장친화형 복지, 성장이 최고의 복지
2021-12-12
월드뷰 DECEMBER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0 |
글/ 김이석(아시아투데이 논설심의실장)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곤경에 처한 이를 돕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남을 돕는 일을 회피하거나 미루지 않는다. 만약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면 현대국가의 팽창하는 복지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면 어려운 이를 돕자는 취지의 복지제도 팽창에 찬성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찬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복지제도의 팽창이 가진 의미를 간파한다면 착한 사마리아인도 반대할 것이라 생각한다. 더 나아가 아마도 복지제도를 실행해야 한다면 시장 친화적 방식을 권하고, 경제성장의 의미를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자리 복지와 복지제도의 팽창
시장경제는 소비자에게 잘 봉사할수록 보답을 받는 체제다. 이 체제에서 ‘일자리’를 가진다는 것은 생산을 담당하는 일원으로서 남에게 열심히 봉사함으로써 보답으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남들이 나에게 봉사해주는 것들을 구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남들에게 봉사한 대가로 번 돈으로 자신의 생활을 이끌어가고, 여유가 있으면 가까이는 자신의 가족, 멀리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이런 생산(과 교환)이 아니라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얻는 방법은 남의 생산물을 약탈하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프란츠 오펜하이머(Franz Oppenheimer), <The State>).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면 이런 약탈을 멀리하고, 생산과 교환의 방법을 취할 것이다. 여기에서 약탈이란 유랑하는 도적떼가 마을을 습격해서 그들의 생산물을 폭력으로 빼앗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강력한 경쟁자인 태양과 한낮에는 경쟁할 수 없으니 국가가 보조금을 줘야 한다.”라면서 양초업자들이 보조금 입법을 로비하는 ‘법적 약탈’(legal plunder)을 포함한다(프레데릭 바스티아(Claude Frederic Bastiat), <법>).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복지의 경우, 그 재원이 자발적인 기부가 아니라 강제적 세금 혹은 정부의 채권 발행을 통해 마련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재원 조달 속에 법적 약탈의 요소가 담겨있다. 세금의 징수가 납세자들이 진정으로 동의했다고 보기 어려운 수준으로 높아질 수 있고, 정부가 채권을 발행할 경우, 이것이 미래 세대의 부담이지만 이들의 동의를 구한 적이 없다는 치명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사회복지제도의 파탄위기에 있다. 장수는 축복이지만 더 오래 살게 되면서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등 4대 사회보험의 지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출산율의 급격한 하락으로 장차 일해서 보험료를 낼 사람들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채권 발행이 불가피하지만, 이는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법적 약탈’이 빚어지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런 법적 약탈이 자행될수록 생산을 위한 투자기금이 줄어 일자리도 줄어든다. 아울러 이런 법적 약탈은 일을 해봐야 자신의 의지대로 쓸 가처분소득을 줄여서 일할 마음이 내키지 않게 한다. 이런 상황으로 다시 출산율을 낮추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시장 친화형 복지, 교육 바우처가 학교 채플을 가능케 한다
기독교 정신을 건학이념으로 세운 광주보건대학교가 예배 형식의 채플 수업 이수를 졸업요건으로 삼은 것은 종교의 자유를 실천한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단순히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따라 예배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 가치관을 교육하는 것을 포함한 다양한 활동을 할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국가인권위는 이런 졸업요건이 학생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면서 대체수업을 개설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광주보건대학교의 건학이념이 이미 알려진 상태에서 학생이 그 학교를 선택했다면 인권위의 이런 권고는 매우 이상하다. 고등학교처럼 어쩔 수 없이 특정 학교에 배정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권위는 채플 수업을 졸업요건으로 두는 것을 종교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아마도 인권위는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학생들의 ‘종교의 자유’를 생각할 뿐, 학교를 세운 이들의 ‘종교의 자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광주보건대학교가 건학이념에 어긋나게도 인권위의 권고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정부의 지원금이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로서는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지원금을 받는 다른 학교에 비해 더 비싼 등록금을 받아야 하고, 학생을 모집하기 어려워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최근 교육이 ‘기회의 평등’을 실천하는 방법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학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전방위적으로 커지고 있다. 이는 그만큼 종교의 자유를 교육으로까지 확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탈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복지제도의 하나로서 교육에 대한 지원을 늘려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제공자가 반드시 공립학교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공립학교에서 특정 종교에 대해 교육을 한다는 것은 여러 종교의 신자와 무신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시장 친화적인 교육 바우처 제도 아래에서는 종교 교육을 원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존재하는 한 종교 교육도 가능할 수 있다. 원래 교육 바우처 제도가 제안된 것은 학생들을 잘 지도하려는 동기를 상실하고 엉망진창이 된 공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였다. 학부모들에게 일정한 금액의 교육 바우처를 제공하고, 학부모와 학생은 원하는 공립학교를 선택하고 바우처를 학교에 낸다. 이에 따라 공립학교들은 더 많은 수의 학생과 바우처를 확보하기 위해 학부모가 원하는 교육을 더 잘 제공하려고 경쟁적으로 노력한다. 결국, 학부모와 학생들이 외면하는 학교는 문을 닫는다.
모든 학부모에게 바우처를 제공하고 이 바우처를 사립학교에도 낼 수 있게 하면, 교육세를 내면서도 종교 교육을 하는 사립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싶어 하는 중산층 학부모들이 종전에는 사립학교 학비 전액을 부담해야 하지만 이제는 바우처만큼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공립학교에 대한 바우처 도입은 ‘효율적’ 교육을 위한 제안이었지만, 이를 사립학교까지 확장하면 ‘종교의 자유’를 원하는 학교와 불필요한 갈등 없이 해결하는 제안이 될 수 있다(김이석, <번영은 자유주의로부터>, 116~150)
만약 학교 바우처 제도가 국·공립학교로 제한되어 적용되지 않고 종교 교육을 건학이념으로 하는 사립학교에도 적용되도록 한다면, 인권위가 건학이념인 기독교 정신에 따라 행하는 채플 수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국가 복지제도의 팽창과 민간의 자조적 복지 활동의 퇴화
착한 사마리아인을 닮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복지제도가 팽창할수록 민간의 자조적인 상부상조 활동이 위축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흔히 시장경제가 발전할수록 개인이 원자화되고 공동체적 유대가 파괴된다고 하지만, 시장경제의 발전이란 생산과정에 참여해 소득을 얻고 그 소득을 나의 가치관에 따라 쓰는 교환의 과정이 세분화되고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렇게 번 돈으로 열심히 가족을 부양하면서 끈끈한 가족의 유대를 이어간다면, 또 자신의 종교 생활에 충실하다면 왜 이것이 가족의 유대를 비롯한 종교 공동체 속의 유대를 약화시켜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번영은 자유주의로부터>, 178~204). 오히려 복지국가의 기능과 범위가 확장될수록 가족 공동체의 유대가 약화될 것이라는 논리와 경험적 사례는 존재한다.
현재 복지국가는 유모 국가(nanny state)로 진화하고 있다. 국가가 아이를 낳는 것에 보조금을 주고, 우윳값을 보조하고, 유치원에 보낼 때 비용 일부나 전부를 지급한다. 이처럼 국가가 낳고 기르고 가르치는 데 힘을 쓸수록 그리고 노후를 책임져줄수록 실은 남에 대한 관심은커녕 자신의 부모와 자식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가족 간의 유대는 국가와 개인 간의 유대로 대체된다. 여기에서 국가는 사람이 아니므로 개인들은 원자화되는 것이다(<번영은 자유주의로부터>, 185).
개인적으로 미국 유학 시절, 당시 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복지제도가 발달해서 1주일에 한 번씩 뉴욕시에서 혼자 사시던 할머니의 장보기를 지원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까운 친족들에게 알리는 데만 1주일 이상이 걸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경제성장을 경시하지 말아야
착한 사마리아인을 닮고자 하는 종교인 가운데 어쩌면 정신적인 것을 중시하고 물질적인 혹은 경제적인 것을 경시하며, 이것을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으로 치부하려는 성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앞의 광주보건대학교 사례에서 보았듯이 채플 수업과 같은 건학이념을 따르는 광의의 종교 활동조차 정부의 지원금이라는 물질적 제약 앞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질적 혹은 경제적 수단은 언제나 그것이 무엇이든 개인들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수단을 통제당하면 결과적으로 목적을 통제당하는 것이 된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자유만 통제되고 다른 자유들은 보존한다고 선전했지만, 실은 삶 전체를 통제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하이에크(Friedrich Hayek), <노예의 길>). 그렇다면 어려운 이들을 돕고자 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이라고 해서 경제성장을 경시할 이유가 없다. 다른 사람들을 더 잘 돕기 위한 경쟁적인 생산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더 많은 개인이 더 많은 소득을 얻고, 이를 자신의 가치관에 맞게 더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경제성장을 한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아마도 더 많은 여가(餘暇)를 내어 더 깊이 정신적, 혹은 종교적 구원을 위한 활동에 나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복지제도의 팽창이 가진 의미를 간파하기만 한다면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도 어려운 이를 돕자는 취지의 복지제도 팽창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아마도 복지제도를 시행해야 한다면 교육 바우처와 같은 시장 친화적 방식을 권할 것이고, 경제성장의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혹시 독자들 가운데 이와 관련된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다고 여기는 분이 있다면 이 글을 쓴 보람이 있는 셈이다.
<kimyisok@daum.net>
글 | 김이석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뉴욕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회예산정책처, 한국경제연구원 등을 거쳐 현재 아시아투데이 논설심의실장, 시장경제제도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번영은 자유주의로부터>, 역서로 <노예의 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