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수교 140주년의 의의와 기독교의 사명

한미수교 140주년의 의의와 기독교의 사명

2021-11-09 0 By 월드뷰

월드뷰 NOV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9


글/ 박명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내년(2022년)은 한미수교 14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1882년 5월 22일 맺어진 조미수호통상조약(이하 조미조약)은 한반도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근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수교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질서에 속해있었다. 그러나 1882년 5월에 맺어진 조미조약을 통해서 한국은 서구 근대질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한반도의 긴 역사 가운데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동안 조선은 중화질서의 일원으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미국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질서의 일원이 된 것이다.

지금부터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중심에 있었다. 과거 유교를 통해서 중화질서가 이 땅에 들어온 것처럼, 개항 이후 기독교를 통해서 서구 근대질서가 이 땅에 들어왔다. 이런 점에서 한미수교 14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기독교가 이 일을 기념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조미조약의 배경: 동북아시아의 변화와 미국


먼저 조미조약이 체결될 당시의 국제적인 배경을 설명하자면, 미국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과 교역하고자 태평양 방면으로 진출하며 1844년에는 중국, 1854년에는 일본과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아직 조선과는 조약을 맺지 못했다. 미국은 조선과의 조약을 통해 미국 상인의 아시아 항로를 완성하려고 했다.

사실 조선은 먼저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서구 여러 나라와 접촉을 했지만, 이들 나라는 각자 자국의 사정 때문에 조선에 적극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신흥 강대국인 미국은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67년에 서구 열강은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을 갖는다는 점에 합의했다. 당시 중국은 러시아가 동북아의 질서를 흔든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땅을 갖고 있지만, 바다로 나갈 수 있는 항구가 없었기에 한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중국은 조선이 친(親) 중국, 결(結) 일본, 연(聯) 미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중국은 미국을 끌어들여서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조미조약이 맺어진 것은 아시아 항로를 확보하려는 미국의 이익과 러시아를 막으려는 중국과 조선의 이익이 서로 합치했기 때문이다.

조미조약이 맺어진 데에는 미국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질서에 깊이 빠져있던 조선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국가와 기독교에 강한 반감이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주일 공사관 참찬관 황준헌(黃遵憲)은 <조선책략>을 써서 조선의 왕에게 보냈다. 이 작은 책자에서 그는 미국은 땅이 넓어서 다른 나라의 영토에 관심이 없으며, 미국 종교인 개신교의 “본의, 또한 사람을 권해 착해지도록 하는 데 있으니, 우리 중국의 주공이나 공자의 도보다 어찌 몇 만 배 낫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고종은 여기에 감명을 받고, 미국과 수교를 결심하게 된다. 따라서 조미조약은 미국에 대한 인식전환으로 가능했다.


조미조약 체결과정: 탐색, 함포, 그리고 협상


1882년 조미조약을 맺는 데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조미조약의 출발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파선된 사건에서 출발한다. 이 배에는 조선에 온 최초의 선교사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와 미국인 3명이 타고 있었다. 그다음 해인 1867년 초, 미국은 슈펠트(Robert W. Shufeldt)를 파견해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이때 조선 정부에 과거 조선 해안에서 조난당한 미국인들을 도와준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는 말과 함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은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1871년 소위 함포 외교로 조선을 열고자 했으나, 조선은 결사적으로 대항했다. 이것이 신미양요이다. 미국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지는 못했다. 조선 역시 미국의 요구는 막았지만, 그 피해는 엄청났다. 이로써 한동안 조선과 미국의 관계는 소강상태에 빠졌다.

미국과 조선의 관계는 1880년에 다시 시작한다. 이때 미국은 1867년 조선을 방문한바 있는 슈펠트 제독을 다시 조선에 파송해 조미조약을 맺도록 한다. 미 국무성은 조선과 조약을 맺는데 있어 무력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1882년 미국은 중국 이홍장(李鴻章)의 도움을 받아 평화적으로 조선과 조미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은 무력으로 이루어졌으나, 조미조약은 평화적으로 맺어진 것이다. 슈펠트는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은 함대를 끌고 와서 일본은 개항했지만, 자신은 군대 없이 평화적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고 자랑했다.


조미조약의 의미: 조미조약과 오늘의 대한민국


조미조약은 한반도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조미조약 이후 미국을 통해서 자유와 독립과 같은 근대적인 사회사상을 배웠고, 이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본가치인 자유민주주의, 자유무역, 그리고 종교의 자유의 바탕이 된다.

1882년에 맺어진 조미조약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첫째, 조미조약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한 것이다. 사실 조미조약을 체결하는 데 중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되, 중화질서 안에서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기 주권을 갖지 못하는 나라와의 조약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국공법이 말하는 국제질서이다. 조선은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된 것과 같이 우리도 언젠가는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 조미조약의 제1조는 주변 강대국의 부당한 간섭에서 미국은 거중조정(good office), 즉 좋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는 러시아가 위협이었고, 일본도 중국도 조선을 자신들의 지배 아래 놓기를 원했다. 고종이 조미조약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바로 거중조정(居中調整)이다. 그래서 어려울 때마다 이 조항에 근거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약속을 잊어버렸다. 러일전쟁 시기에 미국은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했다. 한국은 이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고, 결국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또한 6·25전쟁에서는 한국을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지켜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1953년에는 한미동맹을 맺어서 계속되는 공산국가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보호해 주었다.

셋째, 미국의 입장에서 조미조약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자유로운 통상이다. 이것을 위해 조난구조를 명시하여 안전한 항해를 확보했고, 조선의 관세 주권을 인정하여 앞으로 무역통상의 기초를 마련했다. 조선은 원래 외국과 통상을 금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이 조항으로 통상을 시작했고, 이것으로 조선은 국제통상 무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미국과 맺은 이 통상조약은 다른 나라와도 이어졌고, 그 결과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10위 안에 들어가는 무역 대국이 되었다.

넷째, 조미조약은 상호 언어와 문자를 배울 수 있는 문화교류의 항목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기독교 선교가 시작될 수 있었다. 사실 신앙의 자유는 조미조약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조선은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의식해서 선교 금지를 명문화하려고 했지만, 미국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미조약에는 중국이나, 일본과의 조약에 명시된 선교의 자유 항목이 없었다. 그 대신 문화교류라는 명목으로 선교사들이 올 수 있었고, 이 바늘구멍과 같은 작은 통로를 통해서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그 결과, 즉 조미조약 덕분에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한국은 아시아에서 종교의 자유가 가장 잘 보호되고 있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조미조약과 기독교: 한미관계 기본구조


사실 위에서 언급된 조미조약의 네 가지 의미 가운데서 세 가지는 별로 발전하지 못했다. 조선이 독립국이 된 것도, 미국의 거중조정도, 국제무역 통상도 사실은 씨만 뿌려졌지 열매를 맺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 조약에서 가장 희미하게 시작된 기독교 선교는 엄청나게 발전하며 수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게 되었고, 한국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선교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평양에는 세계최대의 미국 장로교 선교부와 미국 가톨릭 메리놀(Maryknoll) 선교부가 있었다. 이런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한국은 아시아 최대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한국과 미국은 정치와 경제의 부분에서는 별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선교사를 통해서 미국을 알게 되었고, 미국 사회를 자신들의 모델로 생각했다. 많은 한국인이 선교사를 따라서 미국에 가게 되었고, 이들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유 통상을 꿈꾸게 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식 근대화를 주장했지만, 이승만과 같은 기독교인들은 앞으로 세워지는 나라는 미국과 같은 자유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드디어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여 한반도에 민주국가를 만들려고 했을 때, 이를 전적으로 후원한 것은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미 한국에는 선교사들로부터 자유를 배운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이들이 미국과 더불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들의 이런 태도는 주변 강대국의 미움을 받았다. 1941년 미국과 전쟁을 벌인 일본은 한국 기독교인들을 친미세력이라고 박해했다. 당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수많은 지식인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해방 후 소련은 이 땅을 공산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이들의 가장 큰 반대세력은 기독교였다. 그래서 수많은 기독교인이 북한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다가 월남했다. 사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종교의 자유를 믿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와도 싸우고, 소련 공산주의와도 싸웠다. 해방과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과 미국은 매우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은 항상 긴장 관계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이 둘을 서로 이해시키려고 큰 노력을 했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미국에 가서 왜 한국에 반공 정권이 필요한지를 말해주었고, 같은 시기에 동료 한국인들에게는 왜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주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한미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왜 한미동맹은 강화되어야 하는가?


현재 우리나라는 개항 이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오랫동안 미국을 통해 중화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질서에 편입하여 자유 독립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우리의 이런 꿈을 20세기 전반에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짓밟았고, 20세기 후반에는 소련의 공산주의가 방해했다. 그런데 새로운 도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과거의 봉건주의와 20세기의 공산주의를 결합해 신중화주의를 만들며 주변의 국가들을 위협하고 있다. 지금 가장 큰 과제는 이렇게 우리를 위협하는 신 중화질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다. 중국은 자신들이 과거 아시아에서 가졌던 동북아 패권을 다시금 되찾으려고 한다. 아시아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중국몽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다. 이런 과거 회귀적인 위협을 극복하고 개항 이후 가졌던 자유의 꿈을 지속하려면, 우리는 자유 세계의 지도자인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주변의 자유 세계와 연대해서 지금까지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발전시켜야 한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지도자 이승만 박사의 꿈을 기억한다. 그는 미국과 국제사회를 향해 우리는 일본에서 독립하여 아시아에서 첫 번째 기독교 민주국가가 되기를 원하며, 이런 새로운 대한민국은 미국과 함께 아시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미수교 140주년을 앞두고 우리는 다시 한번 이승만 박사의 꿈을 되새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미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며, 아시아의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아시아의 복음화와 민주화가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많은 한국인 그리고 미국 기독교인들과 미국 시민과 함께 이 꿈을 나누기를 원한다. 이것이 한미수교 14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소원이다.

<mspark@stu.ac.kr>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다. 저서로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 정치>(북코리아, 2015)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