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비관적 낙관의 대상이다

국가는 비관적 낙관의 대상이다

2021-11-04 0 By 월드뷰

월드뷰 NOV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글/ 이호선(국민대 법대 교수, 변호사)


들어가며


대선의 계절에 매우 유의미한 논쟁 하나가 등장했다가 금세 사그라졌다. 국가란 무엇이고, 개인의 삶을 국가가 어느 정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하는 담론이 나왔었지만, 지속성을 잃고 말았다. 참 아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권력 쟁취를 위한 경쟁의 계절과 코로나 위기가 겹친 이 시기에 우리는 국가의 한계가 무엇인지, 우리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국가는 무엇이며, 우리가 국가에 대해 어떤 것을 기대해야 하고, 국가를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정리되어 있다는 것은 이 땅에서의 시민으로서 뿐만 아니라 천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확립과도 직결된다.


성경적 국가관


성경이 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왕을 구할 때,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서 엿볼 수 있다. 사무엘은 왕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통치체계로 인해 백성은 필연적으로 피지배자의 멍에를 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사무엘상 8:11~17).

중앙집권적 권력 체계 아래에서 백성은 통치구조를 지탱하는 관료들을 위해 노동· 시간·물질을 제공해야 할 뿐 아니라, 그 희생이 순전히 공적인 영역을 넘어 지배자들의 사적 이익에 봉사하게 될 것을 보여준다. 그 와중에 대다수 백성은 종이라는 하위 계급으로 떨어지게 된다. 실제로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분열 왕국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는 열두 형제의 지파 후손이라는 평등 호혜의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을 남용하는 왕들과 속절없이 그 앞에 희생당하는 백성으로 이분화되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성경이 무정부주의, 국가 무용론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도바울이 권면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 공동체가 필요하고, 이를 이끌어가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도 필요한 것이다(디모데전서 2:2).

무엇보다 예수님은 저 유명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누가복음 20:25)’라는 교훈을 통해 이 땅의 나라의 효용에 대하여도 인정하고 살 것을 말씀해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 어떤 ‘나라’인지가 중요한 것이지, ‘나라’ 즉 국가 자체가 불필요한 것으로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우리가 사는 국가가 어떤 국가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을 해야 하고, 국가를 위한 기도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타락과 국가관


그러나 이런 숙제를 늘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해서, 이 땅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처럼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비성경적이다. 모든 것이 죄로 인해 타락했다는 성경의 선포 속에는 당연히 국가의 질서도 포함된다. 권력을 담당하는 개인의 죄성과 부패함은 국정 운영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죄로 인한 타락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권력자 그 누구도 개인적 타락의 개연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이 땅의 나라에 대하여 장밋빛 환상을 갖지 못하게 한다. 성경은 아주 냉정하게 오늘의 의인이 내일의 악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에스겔 33:18).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로 통치에 성공했던 솔로몬의 말년에 대하여 성경은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 자(열왕기상 11:6)’로 기록하고 있고, 그 아들 르호보암의 오만과 무지는 왕국을 분열시키고 말았다.

두 번째로 권력은 집단적 타락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타락에 취약한 개인들은 집단 속에서 자기의 죄책감을 덜게 되고, 이것이 권력과 결합하게 되면 악에 악을 더하게 된다. 평범한 자들의 악은 권력이라는 토양 속에서 급속히 배가된다. 열왕기상 21장에는 나봇의 포도원을 음모로 빼앗은 아합 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는 아합에게 못된 꾀를 알려준 것은 그의 아내 이세벨이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나봇과 같은 지방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고발과 위증을 사주하여 재판의 형식을 빌려 무고한 나봇을 신성모독으로 몰아 돌로 쳐 죽이게 하고, 그의 포도원을 아합 왕이 탈취하도록 했다. 가장 비열하고도 잔인한 권력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데, 불행하게도 이것은 성경이 보여주는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지금도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우리의 현실이고, 집단과 조직의 이름 속에서 양심의 가책 없이 역할을 분담하는 보통사람들의 악이 그 과정에 에너지가 되고 있다.

이것은 국가의 작동이 개인이나, 몇몇 심지어 나아가 다수가 되더라도 타락의 궤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비단 아합 왕을 조력하여 사법살인을 저지른 자들의 행위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의 권력 쟁취를 위해 다음 세대의 문제는 도외시한 채 기성세대가 미래 자원까지 서슴없이 끌어다 쓰도록 하는 현대의 정파 정치는 성경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창세기 1:28)’하도록 하라는 창조주의 선한 명령과 배치된다.

더구나 최근 몇 년 사이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에서조차 전통적인 민주주의(democracy)의 가치가 파괴되고, 도적정치(kleptocracy)화 되는 경향이 심화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이 땅에서는 궁극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개인의 죄, 집단적 타락, 권력의 추악함, 국가의 한계 등을 그대로 인정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가. 물론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를 명하신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모형의 일부라도 이 땅의 국가에서 제시할 책무가 있음을 뜻한다. 국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그런 점에서 ‘비관적 낙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토피아가 이뤄질 수는 없다는 냉철한 현실이 비관적이지만, 이 땅 역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아래에 있기에 ‘개선을 위한 노력’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낙관적인 것이다.

종교 개혁 이후는 물론 그 이전에도 숱한 믿음의 선배들이 이런 관점으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도 이 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소명은 오늘 우리의 몫이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이 소명이 향하여야 할 바를 그의 저서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까지>에서 이렇게 제시한 바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책임져야 할 것은 국가의 내적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국가를 비롯한 여러 기관들이 사람의 유익을 도모하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땅의 국가가 지니는 생래적 한계를 감안할 때 월터스토프의 말은 매우 유용한 지침이다. 이런 관점에서 국가가 갖춰야 할 점,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소명 의식을 갖고 추구해야 할 방향을 생각해 보면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국가의 우선적 기능으로 무엇보다 공정하고 바른 재판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은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신명기 1:17)’이라고 한다. 시편 82편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서는 불공평한 판단을 하고 악인의 낯을 봐주는 자들에 대하여 준엄한 경고를 하고 있다. 제대로 역할을 하도록 우리가 감시하고, 세워줘야 할 일차적 국가 기관은 사법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연방주의자 논고(Federalist Papers)>에서 국가 권력 기관 중에서 칼도 돈도 갖고 있지 않으며, 사회적 힘이나 부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어떤 것도 주도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법부가 제대로 작동할 때 권력의 전횡을 막고 억압을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시각은 미국 헌법의 정신적 뿌리가 되어 있다.

둘째, 행정부를 비롯한 국가 기관들이 직접 나서서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공동선을 달성함에 있어 하부기관들 (또는 개인들)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보다 상위의 기관들이 나서서 그 기능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 이를 보충성의 원리(principle of subsidiarity)라고 한다. 국가는 가능한 개인의 자율을 보장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나 상위 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주도권의 실행은 온전한 인간 계발의 필수적 요소로, 국민 개인은 자유의 이용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부여받고, 그와 같은 자유를 실현할 충분한 기회를 얻어 그것에서 경험을 얻어내는 만큼 성숙할 수 있다. 유럽연합(EU) 같은 경우는 아예 이 원칙을 창설조약에 명기하고 있다.

셋째, 국가 기관들이 해야 할 일은 기회균등의 보장이다. 현대 국가의 시급한 당면 과제 중의 하나는 사회 양극화 해소, 빈곤이라는 질병의 세습을 퇴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장점은 부의 극대화에 있지만, 단점은 극대화된 부가 편중된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 의한 규제와 조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 아니면 막시즘처럼 생산 수단의 국가 소유가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으나, 일단 후자와 같은 공산주의식 해결은 집단소유라는 가면 속에서 새로운 특권계급의 대두, 기이한 형태의 가혹한 탈취와 인간성에 대한 모독으로 실패작으로 판명된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전자가 성공적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희년 제도로 대표되는 출발에서의 균등함이 인간의 자율적 책임을 살리면서 불평등의 문제, 빈곤의 세습도 해결할 수 있는 제3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가, 아니 엄밀히 말하면 권력자들이 공동체 내의 사후적 분배에 끼어들기보다, 사전적 기회균등을 보장하도록 감시하고 독려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 후견주의가 대두될 조짐이 보인다. 국가 만능주의는 따지고 보면 권력을 가진 자들의 만능주의에 다름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에서 권력자들의 만능주의는 예외 없이 부패와 폭압으로 이어졌고,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hosunlee@kookmin.ac.kr>


글 | 이호선

국민대학교 법과 대학을 졸업하고,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수료 후, 영국 리즈 대학교(University of Leads)에서 ‘EU 및 국제비지니스법’을 공부했다. 2005년부터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총무처장과 기획처장, 성곡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경실련 법제위원, 대한변협 기획의원, 사단법인 전국법과대학 교수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 교수모임(정교모)’의 공동대표로 있다. 저서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정의>, <질문이 답이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 밀로반 질라스의 <위선자들>을 비롯하여 <완역 유럽연합창설조약>,<기적의 자신감 수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