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의 망상(1):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답하다

사피엔스의 망상(1):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답하다

2021-09-13 0 By 월드뷰

월드뷰 SEPT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5


글/ 손원준(UC Irvine 의과대학 뇌공학자)


20세기 초반, 뉴욕의 브롱크스 동물원에서 아프리카계 흑인을 고릴라와 한 우리에 넣고 유인원과 인간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라며 관광객에 전시하자, 이것을 보려고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몰렸다. 오타 벵가라는 이 아프리카계 흑인은 아프리카 노예 무역장에서 구매한 피그미족 청년이었다. 무려 114년이 지나서야 동물원 운영을 책임진 야생보호재단(WCS)의 크리스티안 샘퍼(Cristian Samper) 회장은 “우리의 잘못을 더 일찍 사과하지 못해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준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라며 사과했다. 인종차별에 의한 사망사고 한 건으로 온 나라가 시위와 폭동에 휩싸인 현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어떻게 미국에서 일어났을까? 이것은 인종차별에 대해 시대적 감수성이 부족했던 시대에 일어난 그저 몰상식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일까? 아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생학은 그 시대의 주류 과학의 지지를 받는 커다란 조류였다. 미국의 어느 유명 자연사 박물관은 20세기 초 우생학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홍보했으며 카네기 재단, 록펠러 재단, 해리만 재단 등 주요 과학 재단은 우생학을 지지하는 연구를 전면적으로 지원했다. 미국 유수 대학의 진화생물학자들과 기타 과학자들이 양심의 가책 없이 과학의 이름으로 우생학을 지지한 결과 국가 주도의 인종차별, 강제 불임수술, 인종학살이 만연했던 증거는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의 인종청소와 홀로코스트가 미국 과학자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진실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다. 한 세기가 지난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히” 범죄인 일들이 그 당시 과학계 패러다임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과학은 객관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선의 기준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주류 과학계의 기준이 1세기 후에 “절대” 범죄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오타 뱅가가 “인간 동물원”이었던 브롱크스 동물원에서 전시된 채 침팬지를 안고 있다 (좌측 상단). 오타 뱅가가 원숭이들과 함께 전시되는 것을 항의했으며, 그가 풀려났을 때 보호자가 되어준 제임스 고든 목사(좌측 하단).


과학은 세상을 더 윤리적으로 만드는가?


이 질문은 “과학은 세상을 더 윤리적으로 만드는가”라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바꿔 볼 수 있는데,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다소 의외의 태도를 보였다. 의외인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과학’이라는 용어 정리를 먼저 해야 한다. 이는 과학이라는 용어만큼 오·남용되어 오해를 낳는 용어도 드물기 때문이다. 우선 영어의 과학(science)은 라틴어 scientia(지식)에서 왔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과학은 가설-연역적 방법론(Hypothetico-deduction)과 같이 지식을 얻거나 적용하는 체계적인 방법론적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일반적 오용으로 범죄자의 사진을 보고 “관상은 과학이다”라고 한다든지, 반복되는 패턴을 보고 “이 정도면 과학이네”라고 하는 것에서 ‘과학’은 대중에게 정확도 높은 확률이라는 개념을 반영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과학의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때로는 과학은 전기자동차나 스마트폰과 같이 첨단 제품에서 볼 수 있는 “기술적 진보”의 대용어로도 사용된다.

이와 달리 위의 “과학은 세상을 더 윤리적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에서 ‘과학’은 자연주의 세계관(Naturalism)과 물리주의적 유물론(Materialism)에 의한 철학, 사상적 도그마를 지칭한다. 중요한 점은 철학적 자연주의는 자연과학 그 자체보다 진리를 위한 더 높은 법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측정 가능한 자연현상 외에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이기에 배타적 세계관에 속하며, 유신론적 세계관과 양립 불가능한 강한 무신론을 동반한다. 굳이 이런 배경설명을 첨가하는 이유는 다소 생소한 용어인 철학적 자연주의, 물리주의적 유물론이라는 사상적 도그마가 주는 메시지와 그에 따른 세계관의 함의가 특별하기 때문이며, 이점을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혁명이 일어난 이후 과거보다 더 도덕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가? 인류의 과학적 진보에 따른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는 이들의 근거는 기술의 진보에 따른 식량 문제의 해결, 계몽된 사람들과 이성에 의한 평화, 국제 교류와 견제를 통해 전쟁과 폭력을 방지하는 세계에 대한 전망 등이다.

자연주의 신봉자인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그의 책 <다시 계몽의 시대로(Enlightenment Now)>에서 인류의 삶은 이성, 과학, 인본주의와 진보에 의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낙관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이로 인해 20세기 세계대전과 같은 악몽은 다시 재현되기 힘들며 자연주의적 세계관 안에서 윤리의 기반을 발견할 수 있고, 인류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핑커는 “기독교적 윤리 기반의 영향력이 감소해가는 세계적인 추세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귀결로 세상이 윤리적 타락의 방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관점을 강하게 거부한다. 오히려 세상은 기독교의 도움 없이 점점 좋아지기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오늘날 지식의 윤리적, 정신적인 가치들을 안내하는 세계관은 과학에 의해 주어진 세계관”이라며 기독교를 거부한 계몽주의를 진보의 주요한 근원으로 꼽았다. 핑커 교수의 주장은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반박할 수 있는 주장도 있지만,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연주의와 과학주의적 세계관이 고시대 인류의 타락을 극복하고 세상을 더 윤리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낙관주의 입장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학주의, 인본주의와 진보에 의한 낙관주의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하라리의 솔직한 고백: 과학주의 도그마는 윤리 질서의 토대를 붕괴시킨다.


그런데 <사피엔스>에서 하라리는 이런 낙관주의적 생각에 동의하는 이들을 불편하게 한다. 하라리가 보는 인류의 역사는 윤리적 진보의 역사와 거리가 멀며,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자연과학의 발견들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개인의 인권, 자유, 평등과 같은 자유주의적 신념을 유지하는 삶과 현재 과학을 최고의 권위로 두는 삶이 서로 상충된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쉽게 말하면 모순적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주의적 정치, 사법제도는 모든 개인이 신성한 내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 나누거나 바꿀 수 없는 이 본성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근원이 된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개인의 내면에 자유롭고 영원한 영혼이 거한다는 전통 기독교 신앙의 환생이다. 하지만 지난 2백 년에 걸쳐 생명과학은 이런 믿음을 철저히 약화시켰다.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내적 작동방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거기서 아무런 영혼도 발견하지 못했다. 인간의 행동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호르몬, 유전자, 시냅스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펴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침팬지, 늑대, 게이의 행동을 결정하는 바로 그 힘 말이다. 우리의 사법 정치체계는 그런 불편한 발견을 대체로 카펫 밑에 쓸어 넣어 숨겨두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생물학을 법학과 정치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벽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334)

서두에 띄운 질문에 대한 하라리의 답변이 의외였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과학주의와 자연주의 도그마가 함의하는 세계관의 모습에 대해 핑커와 같이 낙관주의로 포장하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개념의 원문적 의미를 가감 없이 솔직히 진술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위 문단을 포함한 장(chapter)에서는 말이다. 하라리는 과학이 근본적으로 사회를 윤리적으로 만들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소극적 부정을 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터져야 할 시한폭탄과 같이 과학이 사회 윤리 질서의 토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적극적 부정을 한 셈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하라리의 정직함을 높이 샀다. 적어도 기만적인 태도로 대중의 호감을 얻어 이기기 위한 감성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라리는 <사피엔스> 전반에 걸쳐 이 부분에 대해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여주지는 못했는데, 일관성의 부재는 이 책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로 꼽힌다. 하라리는 자기 삶의 철학을 지지해주는 한도 안에서만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옹호할 수 있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 세계관이 인간에게 주는 차가운 함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거나 일관성 있는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다음 호에 계속)

<wonjsohn@gmail.com>


글 | 손원준

UC Berkeley 전자전산공학과 (B.S.)를 졸업하고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전자공학 석사(M.S.), 의료생명공학 박사학위 (Ph. D.)를 받았다. 현재 UC Irvine에서 운동장애가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재활공학과 뇌-기계 인터페이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