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은 어린이 편인가? (그림책 텍스트 안에 숨겨진 네 번째 어른)

그림책은 어린이 편인가? (그림책 텍스트 안에 숨겨진 네 번째 어른)

2021-08-18 0 By 월드뷰

월드뷰 AUGUST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3


글/ 현은자(성균관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그림책과 세 종류의 어른


문학 이론가이자 윤리비평가인 웨인 부스(W.C. Booth)는 <우리의 친구: 픽션의 윤리학(The company we keep: the ethics of fiction, 1988)>에서 픽션을 세 종류의 친구 관계(friendship)에 비유했다. 첫 번째는 모종의 쾌락(pleasure)을 선물로 제공하는 친구이며, 두 번째는 즉각적인 유익(profit or gain)을 주는 친구이고, 세 번째는 쾌락과 유익도 주지만 좋은 것(good), 그 자체를 주는 친구라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 그들이 우리에게 쾌락과 유익을 더 주지 않게 되면 친구 관계는 끝나지만 세 번째 친구는 본래 쾌락이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정 그 자체를 추구하는 관계이므로 평생 친구 사이가 지속된다는 차이가 있다(173).

그림책의 분류에도 이 비유를 차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그림책은 일반적으로 어른이 만들고 어린이가 읽는 도서이므로, ‘친구’ 대신 ‘어른’이라는 단어를 써보겠다. 즉, 어린이에게 쾌락을 주고자 하는 어른, 어린이에게 당장의 유익함을 주고자 하는 어른, 그리고 이 쾌락과 정보와 함께 진(眞), 선(善), 미(美)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전달하고자 하는 어른으로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책의 코드는 소설보다 더 복잡할 수 있다. 소설과는 달리 그림책은 성인의 손을 거쳐 어린이에게 주어지므로 태생적으로 어린이의 뒤에 있는 성인의 존재를 의식해 왔으며 그 사회를 유지시켜 온 전통과 질서, 가치관을 전달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 안에 숨겨진 네 번째 어른


최근 그림책의 독자는 0세부터 100세라는 담론이 힘을 얻고 있다. 그림책 독자 연령의 크로스오버(crossover) 현상은 내용적, 형태적, 서사적인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즉, 어린이가 즐기는 그림책에 성인도 공감할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고, 형태적으로는 다양한 연령의 독자들이 그림책이라는 형태를 가진 도서를 찾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서사적으로는 그림책의 서사 전략에 관심을 가지는 독자층이 늘어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지막 요인으로 인한 성인 독자층의 확충은 그림책 문화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로 인해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가 ‘다른 성인에게 눈짓하는 어른’의 출현이다. 이 어른이 겨냥하는 텍스트의 내포 독자(implied reader, 그 텍스트가 기대하고 있는 상상 속의 독자)는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이다. 그는 언뜻 보아 위에서 소개한 세 종류의 어른과 구별하기 어렵다. 단순한 서사구조, 의인화된 동물들, 쉬운 어휘, 짧은 문장, 모종의 교훈 제공 등 ‘어린이용’으로 보이는 텍스트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어린이가 아니라 그 텍스트를 보고 있는 또 다른 성인에게 은밀히 눈짓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모든 성인이 그의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눈짓의 의미를 해독할 수 있는 자만이 자격을 얻는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부모와 교사가 그 코드 풀기에 실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예를 들어 강경수 작가(2020)의 <고민 해결사 펭귄 선생님 (시공주니어)>을 보자. 강경수 작가는 만화가로 출발하여 다수의 그림책을 창작했고, <거짓말 같은 이야기>로 2011년 볼로냐 아동 도서전 논픽션 부문에서 라가치상을 수상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글과 그림이 엮어내는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인 펭귄 선생님은 높은 언덕 위에서 내담자들을 받는 상담사이다. 첫 장면에서 그의 머리는 단정히 빗겨져 있고 책상 위에는 메모지와 펜, 컵, 책, 스탠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등 뒤의 벽에는 달력과 함께 몇 개의 액자들이 걸려있다. 뇌 구조를 보여주는 그림과 아들의 사진, 밝은 색채로 그려진 단순한 문양의 그림, 그리고 COSMO라는 단어와 함께 대문자 C가 그려진 액자 등이다. 상담실 문밖에는 개구리와 악어, 카멜레온, 원숭이, 그리고 곰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다. 상담실 벽의 시계가 10시를 가리키자 동물들이 한 명씩 상담실에 들어와 긴 의자에 누워 (마치 프로이드가 환자들에게 최면을 걸기 위해 사용했다는 가구와 흡사하다) 펭귄 선생님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개구리는 겨울이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잠이 쏟아진다고 고민을 늘어놓고, 악어는 자기 이빨이 너무 많은 건 아닐까 고민이고, 카멜레온은 기분에 따라 얼굴색이 바뀐다고 하고,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꾼다고 하고, 곰은 이제 연어를 먹기 지겹다고 한다.

그런데 앉아서 그들의 고민을 듣고 있는 펭귄의 태도가 수상하다. 그의 얼굴은 내담자를 향해 있지 않고, 그에게 말을 건네는 법도 없다. 대신 다리를 꼬고 앉아 메모지에 무엇인가를 끄적이기도 하고, 팔짱을 끼고 바닥을 바라보기도 하고, 컵의 물을 마시기도 한다. 상담을 마친 동물들은 모두 밖에 모여 펭귄 선생님 덕분에 자신의 고민이 다 해결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한다. 그다음 장면에서는 동물들이 신나게 언덕을 내려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펭귄의 모습과 함께 “고민이란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 줄 상대가 필요한 법, 펭귄 선생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동물들의 고민을 경청했습니다”라는 글 텍스트가 적혀 있다.

그다음 화면에서는 벽시계가 오후 6시가 되었음을 알리고, 펭귄의 머리는 부스스하고 얼굴빛도 어둡고, 아침에 잘 정돈되어 있던 책상 위의 물건들은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고, COSMO라는 글자가 새겨진 액자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펭귄의 외모와 주위 사물들은 온종일 내담자들의 고민을 들어주어야 했던 펭귄의 피로감을 전하는 듯하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자 대단한 반전이 일어난다. 펭귄이 귀에서 귀마개를 ‘뽁’하고 빼며 ‘퇴근 시간이군’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 장에서 “보람찬 하루를 보낸 펭귄 선생님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라는 글 텍스트와 함께 주인공 펭귄은 차의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귀가한다.


이 작품에 대한 독자 반응


독자들은 이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온라인으로 아동문학을 수강하고 있는 학부 학생 45명과 대학원생 2명, 총 47명에게 이 작품을 읽어주고 서평을 써보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그들은 그동안 격주에 한 작품씩, 총 여섯 편의 그림책 서평 과제를 수행했으므로 그림책 읽기에 익숙한 독자라고 할 만했다(이것이 일곱 번째 과제였다). 그런데 그들이 반전 장면에서 보인 반응은 내게 놀라울 뿐 아니라 기이(奇異)하기까지 하였다. 대부분의 학생이 그 부분에서 배반감과 당혹감을 느꼈다고 언급하기는 했으나, 펭귄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 행위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겨 버리거나 유머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들의 서평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학생들은 경청이라는 교훈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역시 경청의 힘은 대단하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고민을 늘어놓을 때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등이다. 두 번째 반응은 ‘고민’의 본질을 언급한 것이다. 즉, 고민의 해답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니 상담사의 태도는 어차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결과론적으로 해석하는 태도이다. 펭귄이 경청은 하지 않았지만, 동물들의 고민은 해결되었으니 펭귄의 태도는 문제 될 것 없다. 심지어 귀마개를 꽂고 있을지라도 오랜 시간 동안 그들 옆에 있어 준 펭귄의 태도는 칭찬할 만하다는 서평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적극적으로 작가를 두둔했다. “타인의 고민을 들어줄 때 조언하려고 하기보다는 경청하려는 태도, 남을 배려하는 자세를 어린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강경수 작가는 보다 따뜻한 세계관을 가지고 상당히 즐거운 방법으로 그것을 전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오직 두 명의 대학원 학생과 한 명의 학부생만이 펭귄의 위선적 태도를 비판했을 뿐이다.

학생들이 펭귄의 거짓 행위를 문제시하지 않은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첫째 그들은 그림이 보여주는 반전에도 불구하고 펭귄이 경청했다는 화자의 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둘째, 사회 전반적으로 경청의 당위성이 인정되다 보니 글과 그림의 비일관성에 주목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세 번째로는 “고민 해결사 펭귄 선생님”이라는 제목이 주는 선입견과 네 번째는 국제적인 상을 받은 강경수 작가의 명성을 지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도덕 불감증을 방증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책 뒷 면지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고민은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해결할 수 있는 고민은 고민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고민으로 걱정하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이 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는 펭귄 선생님처럼 말없이 고민을 들어주는 존재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작가의 변(辯)도 납득하기 힘들다. 그 자신이 인지 부조화를 겪고 있거나 독자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내담자들 몰래 귀마개를 꽂고 있었던 펭귄 상담사를 ‘말없이 고민을 들어주는 존재’라고 칭할 수 있을까.

비평가의 눈으로 볼 때 이 작품은 글과 그림의 다양한 조합이 가능한, 그림책의 매체적 특징을 매우 잘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문자 기호와 그림 기호의 모순 관계를 이용해 제3의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 화자는 펭귄이 내담자의 고민을 경청했고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고 진술하지만, 그림은 펭귄의 위선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글과 그림의 모순 관계는 블랙 코미디 혹은 풍자의 문학적 효과를 자아낸다. 블랙 코미디란 원래 드라마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서 악의적이거나 순진무구하거나 혹은 서투른 캐릭터가 등장하며, 코믹하고 공포스럽고 비합리적이며 긴장을 자아낸다는 장르적 특성을 갖는다. 또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익살스럽게 꼬집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일종의 풍자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내담자들과 상담사를 각각 다양한 생태적 조건을 갖춘 동물들과 위선적인 상담사로 형상화해 ‘고민하기’와 ‘상담하기’의 무의미함을 풍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을 글과 그림 읽기와 장르적 특성을 통합적으로 고려해 세계관적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자조(自嘲)하는 냉소주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모와 작가의 책무성


인터넷 서평란을 살펴보니 서평자들은 이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Y 인터넷 서점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회원 리뷰가 21건, 평점은 10점 만점이었다. 서평의 내용은 주로 두 가지였는데, 매일 쓸데없는 고민만 하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과 아이들은 물론 자신도 경청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펭귄의 거짓된 행동을 문제 삼은 서평은 거의 발견할 수 없었으며, 몇몇은 그 플롯 전체를 유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 역시 글과 그림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것일까. 부모가 그림책 해석에서 저지르는 오류는 가치 평가에서의 오류를 가져오며, 그것은 어린이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텍스트의 글과 그림의 불일치로 인해 어린이는 인지적, 윤리적으로 혼란을 겪을지 모르며, 더 나아가 이 세상을 불신하게 될지 모른다. 성인에 대한 신뢰로 살아가는 그들이 그림책에서 거짓된 행동을 당연하게 그리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만약 작가에게 이 점을 지적한다면,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면서 자신은 어린이 독자만을 위해 창작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변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눈짓을 받아줄 소수의 성인 독자보다 다수의 실제 독자(어린이)에게 성인으로서의 책무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네 번째 어른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우선은 기본적인 그림책 읽기에 충실해야 한다. 자신의 고정관념, 작가의 명성, 인터넷 서평, 혹은 작가의 변(辯)이나 출판사의 그럴듯한 홍보 문구에 휘둘리지 않고 글과 그림을 촘촘히 읽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어린이에게 가치 있는 것을 선사할 수 있는 세 번째 어른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그 어른은 다른 성인에게 눈짓하지 않고 직접 어린이와 소통하기를 원하는 자이다. 그는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어린이 같은(childlike)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으므로 어린이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가 사용하는 어조는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경박하지 않으며, 밝고 유쾌하지만 진지하다. 월드뷰 그림책 칼럼의 독자들이 이곳에서 그런 어른을 조우(遭遇)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hyunej6029@gmail.com>


글 | 현은자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후 Eastern Michigan University에서 석사,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부설 생활과학 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에서 기독신앙과 그림책 읽기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