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생’을 통해서 보는 중국 현대사
2021-07-30
글/ 김수인(고등학교 교사)
1940~1960년 중국 공산화 과정 속 3대 비극과 인민의 희생
엄밀히 말해 소설은 허구이며 영화는 허구를 기반으로 영상화한 것이지만, 때로는 단순한 사실보다 더욱 통렬한 인생의 진실을 담아낸다. 누군가의 눈으로 바라보고 몸으로 체험한 사실을 가장 적나라하고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아낼 때 영화는 어느 역사책보다 더욱 강력한 진실을 전하는 매체가 된다.
위화(余華)의 <인생>이라는 소설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장예모(張藝謀) 감독의 ‘인생’ 또한 깡마른 농촌 노인이 풀어내는 회한이다. 고해의 인생을 견뎌낸 누군가의 애잔한 회상이지만, 중국 현대사의 3대 비극인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을 차례로 보여주기에 격동의 시대를 이해하는데 꽤 볼만한 영화이다. 중국의 5세대 감독 중 하나인 장예모 감독은 데뷔 초기 중국 인민공화국에 대한 체제 비판적 생각을 섬세하게 영화에 담아냈다. 그는 농촌 민중의 삶을 역사적 사실과 연관 지어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작가주의 성향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며, 한때는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영상에 담아 전체주의 혁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던 소위 위험한 예술인 중 한 명이었다. ‘붉은 수수밭(1988)’, ‘홍등(1991)’은 현대 중국인들의 애환을 강렬한 붉은 색채에 담아낸 대중적 예술 영화였다. 이렇게 장예모가 체제 비판적 감독이 될 수밖에 없던 것에는 개인적인 배경도 있었을 것이다. 국민당 소속 장교였던 아버지가 타이완으로 도피하고, 의사인 어머니가 문화혁명 기간에 비판받고 좌천된 경험 그리고 문화혁명 시기에 학업 중단을 강요받고 청년 시절 혁명 재교육을 위해 농장과 방직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형성된 비판의식이 아마도 그의 초기 작품들 속에 녹아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중국의 국력이 커지며 장예모 감독은 이념적인 영화보다는 중국 왕조시대를 자랑하는 대규모의 상업적인 영화를 연출했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 내에서 표현에 대한 제재가 더 심해져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최근에는 현 중국 공산당을 미화하는 듯한 관점의 작품을 만들며 그에 대한 실망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장예모의 초창기 영화 ‘인생(1994)’은 격동의 시대를 견뎌냈던 중국인들의 담담한 회고록이다. 영화는 1940, 1950, 1960년대 3부분으로 나누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며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의 비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들풀처럼 살아낸 중국인들의 고백을 담아내고 있다. 영화 ‘인생’의 배경으로 펼쳐진 사건을 살펴보고 중국인들의 한과 정서를 조명해보는 것은 영화를 음미하는 동시에 중국의 민중사를 이해하는 흥미로운 방법이 될 것이다.
영화는 1940년대 도박과 유흥으로 공허함을 달랬던 중국의 어느 새벽 뒷골목을 비추며 시작한다. 주인공 ‘푸궈이’는 이름처럼 부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도련님으로 살며 자기의 두 다리로 걷지 않고 늘 하인들에게 업혀 다니는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지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술과 노름에 빠져 ‘룽얼’이라는 자에게 사기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게 되고, 결국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오던 대저택을 빼앗긴다. 이에 임신한 아내 ‘자전’은 딸 ‘펑샤’를 데리고 친정으로 떠나고, 가산을 탕진한 아들에 대한 충격으로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푸궈이는 뒤늦은 후회로 정신을 차린다. 푸궈이가 홀로된 노모를 모시고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며 도박을 끊고 성실히 살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 자전은 딸과 갓난 아들을 데리고 돌아와 그와 재결합한다. 이제 푸궈이는 처자식과 함께하는 소박한 인생을 꿈꾸며 전통 그림자 인형극단을 꾸려 재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달콤한 일상도 잠시,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그는 뜻하지 않게 국민당군으로 전쟁에 끌려간다.
주인공은 도대체 이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국민군이 이기든 공산당이 이기든 관심도 없다. 오직 살아서 잔인한 전쟁의 겨울을 견디고 가족 품으로 돌아갈 생각뿐이다. 푸궈이와 전우들은 차갑게 죽어가는 부상병을 보며 살아서 고향에서 돌아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한다. 국민당군으로 들어갔지만 결국 살기 위해 투항해 공산군의 포로가 되고, 전쟁터에서도 중국 전통 그림자극으로 전쟁에 지친 공산군들을 위로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공산당이 점령한 고향에서는 토지혁명과 사회주의 3대 개조가 한창이었다. 도박으로 푸궈이 가문의 재산을 가로챈 룽얼은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인민 공개 재판으로 총살된다. 마오 만세와 신중국을 건설하자는 인민들의 함성 사이로 총성이 울린다. 어쩌면 룽얼의 자리에서 자신이 공개 총살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푸궈이는 오줌을 지린다. 푸궈이와 자전은 자신들이 더이상 지주 계급이 아니고, 혁명에 참여한 일반 빈민 신분이 된 것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한때 욕망과 명예의 상징이었던 지주 신분은 서슬 퍼런 문화대혁명기에는 이제 그들을 위협하는 위험한 것이 되어버렸다.
고난을 고난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고, 비극이 반드시 비극이 아닐 수 있다는 인생의 아이러니 속에 문화대혁명이 남긴 아픔을 스스로 위로하고자 하는 중국인들의 자조적 내면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그는 해방군에서 인부로 일한 공로로 혁명 참여를 증명해주는 확인서를 액자에 고이 걸어 놓는다. 그림자 인형극 공연은 문화대혁명 때에 이미 혁명의 선전도구와 인민혁명의 흥을 돋우는 도구로 퇴색되었지만 푸궈이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1950년은 대약진 운동의 시대였다. 마을별로 모든 쇠붙이를 거둬 가는데, 푸궈이의 마을에서도 며칠씩 주민들이 잠도 못자고 제련에 참여한다. 주인공은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하고 고된 노동에 지친 아들 유칭을 억지로 깨워서 업고 학교에 보내지만, 유칭은 담장 밑에서 졸다가 후진하던 트럭에 부딪혀 무너진 담에 깔려 죽는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그 운전자는 하필이면 전쟁에서 푸궈이와 생사를 함께한 소중한 동지 춘성이었다.
유칭을 보낸 아픔을 겪고 푸궈이 가족은 문화대혁명이 완성되는 1960년을 맞이한다. 귀먹은 딸 펑샤는 열성 공사당원이자 자랑스런 노동자 계급의 청년에게 시집을 가게 되고 곧이어 임신을 한다. 혁명 기간에 노련하고 경험 많은 의사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축출한 병원에는 의료경험이 없는 어린 학생들과 실습생만 돌아다닌다. 이 어린 학생들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빨간 완장을 찬 홍위병이다. 경험 없는 실습생인 아이들은 산모의 상태를 걱정하는 가족에게 환자가 무조건 괜찮다고만 한다. 펑샤는 아들을 해산하며 푸궈이 가족에게도 기쁜 출산 소식을 전하지만 곧 출혈이 멈추지 않는 응급상황을 맞이한다. 당황하는 의료진을 대신해 수용소에 끌려갔던 산부인과 전문의 왕 선생을 급히 찾아 모셔왔지만, 그는 며칠 동안 굶다가 만두를 먹고 급체해서 정신을 잃고 만다. 펑샤는 울부짖는 어머니 자전의 눈앞에서 창백하게 숨을 거둔다.
영화 속 ‘만두’는 중국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이자 참혹한 공산화의 굴레에 희생되어야 했던 그들의 소박하고도 순수한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을 표상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자전이 싸준 만두 도시락을 채 먹지 못하고 트럭에 깔려 죽어야 했던 아들 유칭의 운명, 만두를 먹다 급체해 기절한 한 산부인과 왕 교수로 인해 아들을 안아 보지도 못하고 어이없이 죽은 딸 펑샤의 슬픈 운명까지도 ‘만두’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결말이 소망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은 펑샤가 낳고 간 손자의 이름을 ‘만두’라고 하면서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 공산주의의 피바람 속에서도 여전히 중국의 민초들은 소망을 낳고 우리의 인생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자위적인 결말을 맺는다.
아들 유칭에게 “우리 집은 병아리지만 닭이 되고, 닭이 크면 거위가 되고, 거위가 크면 양이 외고, 양이 크면 소가 되고, 소가 크면 공산주의가 되고, 공산주의가 되면 마음껏 매일 만두와 고기를 먹을 수 있다”라고 속삭이던 푸궈이는 이제 노인이 되어 손자 만두에게 병아리를 선물해 준다. 그리고 “병아리가 크면 닭이, 되고 닭이 크면 거위가, 거위가 크면 양이, 양이 크면 소가 그리고 소가 크면 만두가 된다”라며 공산주의가 아닌 본연의 인간의 순수한 모습이 궁극적인 결론이 되어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만두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살기가 좋아질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로 그들의 고단한 삶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한 자락을 남긴다.
영화에서는 비교적 희망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이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시기는 중국뿐만이 아닌 세계적으로도 매우 잔인하고 절망으로 가득한 시대로 기억되고 있다.
국공내전의 잔혹사, 1948 장춘 홀로코스트
1948년에 인류의 현대사는 참으로 치열한 모멘텀을 지나고 있었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1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고, 한반도에서는 4.3사건의 혼돈 이후 제헌국회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일본 패망 후 남과 북이 혼돈의 이념 대립을 겪던 1945년, 중국 또한 대한민국과 닮은꼴의 역사를 거친다. 1945년 8월, 일본군은 국민당에게 일본군의 주둔지가 명시된 전쟁 지도를 넘긴다.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은 소련군이 이미 점령한 만주지역을 제외한 중국, 타이완, 프랑스 인도차이나의 위도 16선 이북 지역을 모두 장제스에 이양해야 했지만, 공산당은 연합군과의 조약을 무시한 채 일본의 주둔지로 달려갔다. 일본군의 항복을 먼저 접수하려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치열한 각축전은 특히 만주 점령에서 가장 긴박하게 펼쳐졌다.
1946년 항일 투쟁을 위해 잠시 힘을 합쳤던 국민당과 공산당의 평화회담이 깨지며 국공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처음에는 미국의 지지를 받던 국민당이 자금력, 군사력 면에서 우세한 듯 보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국민당의 내부 부패, 미국의 간섭에 대한 반발 등으로 민심을 잃는다. 반면, 공산당은 토지개혁, 공산 사회 건설 등의 기치를 내걸며 인민들의 호응을 얻어간다. 1946년 6월 당시 병력으로 치면 국민당이 430만으로 공산당의 3배, 토지는 7백 3십만㎢로 3.5배, 도시는 1,500여 개로 3배, 인구는 3억 3천 9백만 명으로 각각 공산당 비교 3배나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3배의 전력은 불과 2~3년 만에 내전을 통해 역전되었다. 어떻게 1948년 공산당은 10배나 앞서던 국민당의 중화기 무장병력을 대등하게 만들 만큼 역전하게 되었을까? 이 대역전극의 뒤에는 은폐되었던 1948년, 장춘 홀로코스트가 있었다.
1946년 봄까지만 해도 장제스(蔣介石)는 선제적인 군사작전으로 남만주를 탈환하는 등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거의 모두 점령해 공산군을 송화강 이북까지 몰아낸다. 그러나 린뱌오(林彪)가 공산군의 전열을 가다듬고 1948년부터는 승기를 잡는다. 린뱌오의 승리 비결은 바로 차단 작전이었다. 우선 장춘, 진저우, 선양 등 중국 내륙의 교통 요충지에서 국민당군을 고립시키는 군사작전을 구사한다. 특히 만주지역의 소도시였던 장춘은 19세기 말 양대의 철로가 개통되며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장춘은 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이국적인 건물이 들어서며 세련된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1946년 5월 23일 장개석의 국민당 제1병단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장춘을 점령하지만, 그해 겨울 국민당의 제1병단이 요서의 사평으로 옮기며 장춘에는 10만의 병력만 남게 된다. 그리고 황포 군관학교 출신의 린뱌오가 이끄는 공산당 팔로군과 대치하게 된다.
1947년 5월 팔로군은 첫 번째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고 10월에 두 번째 공격을 하는데, 도시 주변을 장악한 팔로군은 도시로의 곡물과 전기를 차단한다. 1948년 5월부터 10월까지 약 5개월간 장춘은 20만의 공산군에게 완벽하게 포위되어 죽음의 도시로 변해가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95km의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다시 한번 그 안에 65km의 작은 철조망을 이중으로 설치했다. 50m마다 보초를 세워 철조망 넘기를 시도하거나, 밀수하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이 발포했다. 수만 명이 외부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민간인을 비롯한 국민군도 그들이 쳐놓은 죽음의 철조망을 넘을 수는 없었다. 공산군에게 공항까지 점령되어 장춘으로 공수가 불가능해지자, 낙하산을 이용해 공중투하까지 하지만 포위 작전은 시간이 갈수록 국민당에 더 불리해졌다. 굶주린 사람들은 말, 개, 고양이, 쥐, 새 등 닥치는 대로 동물을 잡아먹고 또 인간의 시체를 동물에게 먹이고 다시 잡아먹기도 했다. 두 달이 넘자 아사자가 속출하며 인육을 판매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공산군의 지휘부 내부에서도 잔인한 형국을 보며 술렁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지상에서 적의 식량을 그 근원까지 반드시 다 끊어야 한다. 이점만 확실히 하면 완전한 승리이다’라는 마오쩌둥의 전문을 받은 린뱌오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공산군의 군기를 잡았다. 일부 난민을 몰래 보내주는 공산군들도 생겨날 정도로 잔인한 포위 작전에 국민당과 공산군 모두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두 죄의식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1948년 5월 23일에서 10월 19일까지 5개월간 지속된 장춘 포위전의 희생자는 최소 12만 명에서 최대 33만 명으로 추정된다. 철조망 안에서 국민당군은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죽어갔다. 인민해방군의 포위 속에서 중국 인민들이 죽어가는 역설적인 비극이 펼쳐진 것이다. 영화 속 죽은 듯이 혹은 잠들어 있는 듯한 한 무리의 국민당군을 비추는 장면은 국공내전의 참상을 떠올리게 한다.
대기근으로 귀결된 대약진 운동
영화 ‘인생’에서도 중국의 대약진 운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듯한 장면이 있다. 영화 중반 아침이 밝아오는 거리에 온 마을 사람들이 죽은 듯, 혹은 약에 취한 듯 탈진한 상태로 누워있다. 마을별로 할당된 강철생산량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농사일을 그만두고 제련에 동원된다. 솥이나 자물쇠 등 철이라는 철은 모두 헌납을 강요한다. 마을에서 제련한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모습의 강철 덩어리를 보고 그들은 다시 한번 대만 해방의 프로파간다를 자랑한다. 미제에 압제당하는 남조선 인민을 해방해야 한다는 선전에 세뇌당한 북한 동포들과 비슷한 모습이다.
1958년부터 1960년 사이 일어난 대약진 운동으로 중국은 장춘 포위전 이후 다시 한번 대량 아사를 경험한다. 영국과 미국을 수년 내에 따라잡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완성하겠다는 야심찬 선전 아래 인위적으로 무리하게 공업 생산량을 늘리고, 농촌의 인력을 제철, 철강 등의 중화학 공업에 과도하게 차출했다.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무리하게 노동력만으로 서구 선진국의 생산량을 따라잡으려다가 나라의 근간인 농업을 등한시하고 자연재해와 흉작이 이어져 중국 내 기근과 아사자가 속출했다. 구성원 개개인의 합리적인 선택과 결정을 무시하고 사회의 자연스러운 성장과 발전의 과정을 생략한 채 정치적 구호를 세뇌해 이루어지는 사회 운동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중국 현대사는 그대로 보여준다.
예술인들을 위협하는 다섯 개의 칼, 문화대혁명
영화 ‘인생’의 주인공 푸궈이는 타고난 예술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공연예술인이자 한 가정의 아버지이다. 푸궈이가 그림자극의 천막을 찢는 장면은 공산당 혁명 이후 중국 예술인들의 힘겨운 운명을 담고 있다. 1930년대 사회주의 혁명이 시작된 이래로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예술인과 순수한 전통과 예술의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인들 사이에서 많은 이념적 분쟁이 있었다. 특히 예술인에게 정치적 이념은 이미 실존적인 선택으로 다가왔다. 자신들의 이념에 동조하는 예술인에게는 정치적인 특권과 우대를 제공하고, 그렇지 않은 예술인은 반동분자로 분류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1950년대 말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약세에 몰리게 되자 마오쩌둥(毛澤東)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국민 또한 사회주의 노선 수정을 요구하며 일부 자본주의 정책을 채택한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이 새로운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마오쩌둥은 다시 한번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전국 각지의 청소년으로 홍위병을 구성해 1966년 천안문 백만인 집회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구습을 타파한다는 명목 아래 모든 전통적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배격하며 당 간부를 비판했다. 이로써 다시 한번 마오쩌둥은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전체주의적인 헤게모니를 잡게 된다.
후펑(胡風)은 한때 마오쩌둥을 신봉하던 당대 대표적인 문인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모두가 똑같은 생각만을 강요당하는 사상개조 운동에 반발하고, 공산당이 억압하는 예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저항하는 목소리를 모으면서 본의 아니게 정부의 눈 밖에 나게 된다. 후펑은 다섯 개의 칼이 문인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칼은 작가가 완벽한 세계관(유물론,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 두 번째 칼은 작가는 오로지 노동자, 농민, 군인만을 소재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압박, 세 번째 칼은 사상개조 이후에만 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는 압박, 네 번째 칼은 전통적 양식만이 민족양식으로 허용되는 낡은 발상, 다섯 번째, 특정 주제가 다른 주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관료들의 독단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는 마오쩌둥의 추종자였다가 나중에는 예술인들의 반동을 이끄는 분자로 정치적 심판을 받아 24년간 체포, 구금되고 1980년에서야 복권되었다. 중국인들은 그를 사상의 자유를 부르짖던 문화대혁명에 저항했던 유일무이한 문예인으로 기억한다. 그는 문화예술의 독립성을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른 대표적인 중국의 지식인 중 하나였다.
격동의 혁명과 내전의 시기를 잔잔하게 다루고 있지만 굵직한 배경들을 담고 있는 영화 ‘인생’은 위화의 소설 ‘인생’과는 다르게 담담하고 긍정적인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비극의 연속인 푸궈이 가족은 비바람을 맞는 갈대처럼 유순히 그들의 삶을 견뎌 낸다. 김수영 시인의 ‘풀’에 나타난 질긴 생명력을 가진 민초를 연상케 한다. 강한 나무처럼 꿋꿋하게 살았다가는 부러지기 십상인 혁명의 광풍이 불던 시대에 ‘인생’의 인물들은 격동의 중국 현대사의 비극에 대해 분노하거나 저항하기보다 그저 담담히 견뎌내며 애달픈 중국인들의 삶을 묘사한다. 대다수 중국인은 1940~60년대를 겪으며 숨죽여 살았고 혁명의 찬란한 구호와 서슬 퍼런 시대의 장막 뒤에서 애환과 울음을 삭였을 뿐이었다.
영화 ‘인생’의 배경이 된 사건들은 중국인들에게 마주하고 싶지 않으며, 여전히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공산화의 이면이다. 다만 영화 <인생>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 나름의 희망과 의미를 갖고 살아가려는 중국인들의 슬픈 자화상을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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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인
고려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글로벌교육협력 석사과정에서 시민교육을 전공했다. 9차 개정 교육과정 영어 능률교과서 집필위원과 바른교육학부모연합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데릭 프린스의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을 번역했다. 현재 고등학교 교사이며, 트루스포럼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