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교향곡

은혜의 교향곡

2021-07-29 0 By 월드뷰

월드뷰 JULY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3


글/ 김현경(경인교육대학교 외래교수)


연구원에 출근하면 사무실이 항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상쾌한 사무실 공기를 마시며 자리에 앉아 있노라면 내 마음까지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우리 연구원에는 청소 직원이 따로 있지 않다. 그렇다고 매일 연구원 직원들이 구석구석을 청소해 놓고 퇴근하는 것도 아니다. 직원들의 눈을 피해 마치 우렁각시처럼 몰래 청소를 해 놓고 가시는 분이 계신데 놀랍게도 바로 우리 연구원의 이사님이시다. 이사님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게 움직이신다. 우리 직원들이 깨끗하고 정돈된 환경에서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손수 구석구석을 닦고 책상을 배치하고 온습도를 조절하신다. 지난겨울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밤사이 내린 폭설을 헤치고 연구원에 겨우 출근하였더니 어찌 된 일인지 우리 건물 앞은 눈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또 이사님이셨다. 이사님은 우리 직원들이 행여 넘어져서 다칠까 봐, 혹은 업무에 지장이 있을까 봐, 이른 새벽 홀로 연구원에 나와 건물 앞의 눈을 쓸고 염화칼슘을 뿌려놓으셨다. 내가 안전한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는 것, 깨끗한 책상 위에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이사님의 그 감사한 마음이 느껴지자 나도 우리 연구원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게 된다. 쓰레기가 떨어져 있진 않은지, 전구를 갈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모 윌렘스(Mo Willems)가 글을 쓰고 앰버 렌(Amber Ren)이 그림을 그린 그림책 <때문에>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사님이 떠올랐다. 연구원에서 화려한 행사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때마다 이사님은 강연을 맡은 강사와 진행을 맡은 사회자에게 공을 돌리셨다. 하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겸손한 자리에서 항상 많은 것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손길이 있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다. 당연한 것 같은 그 많은 인생의 히스토리 가운데에는 사실 크고 작은 은혜의 손길, 성실한 발걸음이 있다. 지금의 ‘나’는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그 깊은 메시지가 그림책 <때문에> 속에 참으로 아름답게 녹아 있다.

그림책 표지를 보면 커다란 제목 글자 아래에 지휘봉을 든 소녀가 눈에 띈다. 소녀는 음악회 무대 위에 서 있는데,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어두운 실루엣으로만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고 지휘자와 등을 맞댄 작은 소녀는 빨간 옷을 입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작은 소녀에게서 둥글게 퍼져나가는 노랑과 연둣빛의 멜로디는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며 마치 독자에게 어서 책장을 넘겨보라고 손짓하는 듯 표지를 휘감고 지나간다. 제목과 연결 지어 그림을 이해해 보자면 이 소녀는 무슨 까닭으로(Because) 이 자리에 서 있는 걸까 궁금해진다.

표지를 넘겨 그림책의 앞 면지를 보면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의 교향곡 제8번 B 단조의 악보가 그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슈베르트의 음악에서부터 시작된다.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아름다운 음악이 있었기에(because) 슈베르트는 영감을 얻어 자기 곡을 써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은 사람이 슈베르트의 음악을 듣고 싶어 했기에(because) 오케스트라가 꾸려진다. 물론 이 오케스트라가 꾸려질 수 있었던 것은 한 남자가 어려서부터 꾸준히 연습했기 때문이고, 또 한 여자가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만으로 오케스트라 공연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슈베르트 음악 콘서트 포스터를 멋지게 만들었기에(because) 입장권이 잘 팔릴 수 있었고, 누군가는 기차를 잘 운행했기에(because)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콘서트홀에 잘 도착할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사서가 악보를 잘 준비했기에(because)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리허설을 잘할 수 있었고 콘서트홀 관리 직원들이 조명과 좌석을 점검하고 바닥을 깨끗이 닦았기에(because) 콘서트가 차질 없이 준비되었다. 음악회 관중석에 앉아 공연을 보고 들으며 누가 과연 이러한 생각까지 할 수 있겠는가? 사실 오케스트라가 공연하기까지 여러 사람의 수고가 있었다.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소임을 다했기에 청중이 쾌적한 자리에 앉아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Because’의 마법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삼촌의 감기’로부터 시작된다. 누군가의 삼촌이 때마침 감기에 걸렸기에, 누군가의 숙모는 삼촌의 입장권을 다른 특별한 누군가에게 주기로 한다. 그 누군가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작은 소녀이다. 숙모 옆자리, 그러니까 감기만 아니었다면 삼촌이 앉았어야 할 C열 14번 그 자리에 앉은 작은 소녀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었고, 그것이 바로 소녀의 삶을 바꿔놓는다. 콘서트홀을 나서는 소녀가 그 아름다움에 얼마나 감동되고 들떴는지는 멜로디를 타고 날아다니는 듯 그려진 소녀의 그림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때부터 소녀는 음악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배우고 작곡을 시작하고 악기를 연주한다. 소녀가 아주 열심히 노력했기에 그녀의 음악은 누군가에게 발굴되었고, 콘서트홀에서 공연해 달라는 초청을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녀의 곡은 C열 14번 자리에 앉은 삼촌에게 헌정된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그녀의 음악을 들은 한 소년이 그녀가 어릴 때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의 음악에 매료되어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실상은 끝이 아닌 새로운 역사의 시작인 셈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림책의 뒷면지에 소개되어 있다. 책의 앞면지에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8번 B 단조 악보가 실려 있었던 것처럼, 책의 뒷면지에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힐러리 퓨링턴(Hilary Purrington)의 곡 <추위(Cold)>의 악보가 실려 있다.

이 그림책을 홍보하는 출판사의 글에는 이 이야기를 ‘인생의 우연한 기회와 발견과 인내, 기적을 작곡한 강렬한 교향곡’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있다. 우리 인생은 우연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안에서 주님과 주님의 일꾼들이 신실하게 반응하며 역동적으로 이루어 가는 ‘은혜의 교향곡’임을 말이다.

그림책 <때문에>는 수많은 성경 속 인생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인생을 우연의 연속이라고 여기는 세상의 관점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불우했던 요셉이 운 좋게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것일 거다. 하지만 “형님들이 저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여기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창 45:5).”라고 말했던 요셉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 삶의 이야기를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은혜로서 개입하신다. 그런데 이에 더해 우리의 삶은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 덕분에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스토리로 가득 차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명령체계에 따라 작동하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와 친히 교제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우리 각 사람의 스토리가 더욱 의미 있다. 만일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말을 듣고 결단하지 않았다면, 룻이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따르지 않았다면, 마리아가 주의 뜻이 여종에게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교제하며 주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손을 내밀어 주시니 하나님과 우리의 동역이 더욱 놀랍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그림책에 대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번역 제목이다. 원본의 제목은 영어로 ‘Because’이기에 ‘때문’이라고 번역한 것도 무리는 아니며, ‘때문’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정의가 어떤 일의 원인이나 까닭이므로 잘못 번역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때문에’는 우리말에서 대체로 누구의 탓으로 돌리는 부정적인 어감을 갖고 있기에 이 그림책에서 전하고 있는 은혜로운 이야기에 썩 걸맞지는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이 그림책을 읽으며 누구의 탓이 아니라 누구의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 삶의 히스토리 곳곳에 보물처럼 숨겨 놓으신 은혜를 세어보며 주님 덕분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또, 주님께서 초청해주신 동역의 자리에서 오늘 내가 무엇을 결단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가 누군가에게는 매우 귀중한 ‘because’로 이어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우리의 작은 움직임이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 받는 것도 참으로 주님의 은혜 ‘덕분’이다.

<dasarom_kim@naver.com>


*힐러리 퓨링턴의 곡 <추위>는 작가의 홈페이지 뉴스에서 들어볼 수 있습니다.
http://www.hilarypurrington.com/news.html

※ 이 글은 <어린이 교육전문가가 엄선한 100권의 그림책 (현은자, 김정준 외, CUP)>에 실린 저자 집필 원고 내용을 기초로 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글 | 김현경

성균관대학교 아동문학미디어 교육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캠브릿지대학교 교육학과 부설연구소 the PLACE에서 방문연구자를 역임하였다. 현재 (사)한국문예원언어콘텐츠연구원에서 연구하고, 경인교육대학교 유아교육과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