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클레시스
2021-07-28
월드뷰 JUL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
글/ 조혜경(소설가)
지금 돌아보아도 내가 그 학교에 들어간 것이 신기하다. 한 분으로부터 소개받기까지 나는 그 학교 이름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문학자로 가르치시면서 소설가로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시는 모교의 교수님처럼 살고 싶었다. 용돈을 벌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노량진의 한 영어학원에서 새벽에만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로 직장인과 대학생이 등록하던 새벽반에 이민목회를 계획하시며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오신 목사님이 계셨다. 목사님께서 어느 날 내게 말씀하셨다.
“조 선생님! 총신대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 공개강좌가 한 달간 열리는데 가보세요!”
라틴어에 뿌리를 둔 영어 단어에 관해 수업시간에 몇 번 설명해 드린 적이 있었다. ‘라틴어 강좌’라는 말이 귀에 쑥 들어왔다. 숭실대 학생 두 명이 동행해주어 낯선 학교에 편하게 찾아갈 수 있었다.
공개강좌 첫날, 교실에 들어선 나는 놀랐다. 삼사 백 명이 넘을 듯 가득 앉아 있는 사람은 모두 남자였다. 그들은 공개강좌에 연결해서 있는 입학시험에 응시할 목사 후보생들이었다. 여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 학교에 여학생이 올 리 없는데 그런 사실을 모르는 나는 첫 수업시간 내내 눈으로 여학생을 찾았다. 오전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 계단을 내려가면서 여자 한 분을 만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반가워 마주 보며 웃었다. 식당은 만원이었고 늘어선 줄이 길어 내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그렇게 첫날 나는 K 집사님과 만났다. 나와 달리 집사님은 신학을 공부하시기 위해 온 걸음이었다. 한 달을 단짝으로 지내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고 입학시험 원서를 내야 하는 날짜가 다가오자 집사님은 내게 정식으로 청하셨다.
“함께 입학해서 같이 공부하자. 조 선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아!”
그때 내 앞에는 몇 개의 길이 놓여 있었다. 대학교 때 따놓은 2급 정교사 자격증 때문에 집안의 할아버지 한 분은 당신이 이사로 계시는 고등학교에 와 면접을 보라고 진즉부터 말씀하셨고, 다른 식구는 외국계 은행을 소개하여 내키지 않는 면접을 보기도 했다. 아르바이트하는 학원에서는 더 나은 보수를 제시하며 오후 몇 시간 강의를 더 맡아주길 은근히 압박했고, 나는 영문과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생각지 않았던 신학대학원에 원서를 냈다. 입학시험은 공개강좌의 헬라어, 라틴어 패스 외에도 성경, 영어, 논술 등 몇 과목을 봐야 하는데 벼락치기로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어쩌면 당연히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함께 공부하기를 간절히 청하시는 K 집사님께 덜 미안할 것으로 생각했을까? 원서를 내고 함께 시험준비를 하자 이상하게 승부욕이 일었다. 시험 전날엔 ‘하나님! 둘 다 합격시켜 주시면 열심히 공부해보겠습니다!’라고 기도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합격했고, K 집사님은 기뻐하시며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장학금이라며 나의 첫 학기 등록금을 내주셨다. 이후부터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게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다.
신학을 공부하는 내내 나는 R을 많이 기억하고 생각했다. R은 나와 친했던 고등학교 친구다. 투박한 외모에 속정 깊은 R은 같은 반 친구의 죽음으로 내가 힘겨워할 때 옆에서 밥을 먹도록 챙겨주고, 자율학습시간에 공부하지 못하고 옥상에 올라가 있으면 따라와 곁에 있어 주었다. 기독교인이던 R이 어느 날부터 내게 성경 구절을 제시하며 그동안 우리가 믿었던 것이 틀렸다고, 참된 진리의 말씀을 믿으라고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나는 친구의 성경 해석에 반박할만한 실력이 못 되었다. 듣고 있으면 뭔가 이상한데 무엇이 이상한지 분별이 안 돼 답답했다. 나를 위로하고 감싸주었던 옥상의 같은 자리에서 R과 나는 집요하게 그러나 일방적으로 내가 밀리는 성경 토론을 벌였다. R을 따라 ‘왕국 회관’에도 가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결코 동화될 수 없음을 오히려 확인했다. 매일 속이 상했던 그때 나는 결심했다. 내 나이 40이 되면 반드시 신학을 공부해보겠다고. 교수가 되고 작가로 글을 쓸 수 있는 나이가 그쯤 될 것이라고 예상했나 보다. 20대 중반, 선뜻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던 배경에는 그러므로 고등학교 시절 R과의 가슴 아픈 논쟁도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R을 끝내 교회로 다시 이끌지 못했고, 그녀는 ‘왕국 회관’에서 만난 청년과 결혼하여 자신의 신앙에 더욱 견고해졌다. 나는 신학대학원의 공부로 여고 시절의 목마름이 다 해갈되지는 않았지만 샘을 팔 수 있는 도구는 손에 쥐게 되었다.
순서가 바뀌었을 뿐 신학 공부를 마치면 나는 나의 길을 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원 2학년 때 뜻밖에 남편의 청혼을 받고 결혼을 하고, 졸업하고, 첫 아이를 낳고, 남편이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 뒤돌아 내려갈 수 없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것처럼 나의 삶은 내가 한 번도 꿈꿔보지 않은 자리로 확고하게 밀려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미국에 갔지만,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는 대신 한인교회에서 교역자로 일했다. 뉴욕 플러싱의 교회 사무실에서 또 사택에서 매일 밤늦게까지 수십 권의 주석을 읽고 담임목사님의 설교자료를 준비해드리며, 필라델피아에서 목사님의 설교집 출간을 위해 쉼 없이 원고를 정리하며 문득문득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매 순간 내가 결정하며 나아갔지만 내 자리, 내 모습은 내가 꿈꾸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철저히 타인을 돕는 조력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되는 내 일을 하고 싶었다. 남편이 공부하는 동안 나도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와주었다. 남편도 ‘이제 자기도 학교에 등록하고 공부하면 좋겠다’고 권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입덧이 시작되었다. 남편이 학위를 하나씩 딸 때마다 나는 훈장처럼 딸을 한 명씩 얻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신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같이 공부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어볼 때 나는 매우 부끄러웠다. 심지어 졸업 후 20년 만에 모인 여고 동창회에 처음 나갔을 때는 한 친구로부터 ‘매년 신춘문예 기사가 뜰 때마다 혜경아! 나는 네 이름을 꼭 찾았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어? 나도 그랬는데!’라고 함께 둘러앉은 친구가 동조할 때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곤혹스러웠다. 나는 약속한 일이 없었지만 그들의 일방적인 기대를 배반한 사람 같았고,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음에도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게으르고 나태한 그래서 무능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내가 어쩌다 그때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공개강좌에 발을 들여놓았던가, 내가 어쩌다 K 집사님의 권유에 마음이 흔들려 그 학교에 들어갔던가, 지난날을 되짚어보곤 했다.
벼락 치듯 한 장면이 떠올랐던 것은 언제였을까?
중학교 시절 내가 살았던 도시의 도청 광장에서 큰 전도 집회가 열렸다. 나는 교복을 입고 새벽마다 집회에 참석했다. 미국에서 온 목사님이 설교하시고 한국 목사님이 통역하셨다. 집회 마지막 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앞으로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겠다고 결심하신 분은 일어서주십시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교사님은 일어선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주셨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산다’는 것을 교회 강 선생님처럼 사는 것이라고 나는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시며, 성가대에 서시고, 시시때때로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맛있는 간식을 대접하며 돌봐주시던 강 선생님과 사모님. 나도 선생님처럼 살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날의 ‘결단’은 내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해서 오히려 까마득하게 잊었다.
교회사에 보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두 개의 큰 산맥과 같은 거대한 부흥 운동이 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으로 이어졌던 20세기 전반에 있었던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1974년의 엑스폴로 74, 1977년 민족복음화성회로 연결되었던 20세기 후반의 부흥운동. 내가 중학교 시절 참석한 집회는 빌리 그래함의 동역자였던 선교사님들이 전국의 주요 도시로 퍼져 예배를 인도하며 마지막 날 주를 위해 헌신할 자를 일으켜 세워 결신하게 했던 그 집회였다.
그날 새벽 내가 도청 광장에서 일어섰던 그 장면이 언제 섬광처럼 떠올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교수도 작가도 아닌 목사의 아내가 되어 목회현장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내 모습이 사실은 나의 결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벼락 치듯 깨달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강도 높은 헌신이었을 뿐이다. 주께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에 세심하게 개입하시고 주도면밀하게 인도하셨음을 나는 비로소 알았다. R과의 논쟁으로 심어진 신학의 씨앗, 그저 용돈을 벌기 위해 찾아간 학원에서의 내 강의에 찾아오신 총신 출신의 목사님, 공개강좌 첫날 만난 K 집사님(졸업 후 지금까지 미국 한인교회 전도사로 영아부 교육에 크게 헌신하시며 여전히 나의 평생 동역자이신), 그리고 남편의 청혼…. 매 순간 매우 섬세하게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이끌어주셨음을 나는 깨달았다.
신약 성경에 ‘권면’ ‘위로’ 등으로 번역되는 ‘파라클레시스(παρἁκλησις)’라는 단어가 있다.
옆에서(παρα) 소리치다(καλἑω)는 ‘파라칼레오’의 명사형이다. 이 단어는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주자 옆에서 끝까지 함께 달리며 격려하는 코치의 힘내라는 소리, 링 밖에서 권투선수보다 더 열심히 뛰는 트레이너가 목이 터져라 독려하는 파이팅 소리를 생각나게 한다. 더 나아가 장대를 들고 날 듯이 높이 뛰기를 할 때 아슬아슬하게 바에 걸릴 듯한 선수의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려주심으로 안전하게 바를 넘겨주시는 도우심의 손길이 연상된다.
‘라틴어 강좌에 가보세요’ ‘함께 입학해서 공부하자’
이 말씀들은 그러므로 내 곁에서 소리치신 하나님의 파라크레시스였다.
‘뉴욕 우리 교회로 와! 내 옆에서 나 좀 도와줘!’ ‘이 원고를 책으로 출판할 수 있도록 정리해주세요’ ‘나와 결혼해주시겠어요?’
사람의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나는 그분들의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의 조력자로 힘껏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으며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노래했다(시 84:10). 네덜란드의 최고 신학자요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삶을 우선순위에 두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는 말씀을 평생 묵상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교회 마당에서 놀던 내가 주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일어섬으로 결단하자 하나님은 내게 하나님 집의 문지기와 같은 사람 옆에서 평생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주를 좀 더 가까이할 수 있는 복이었다. 돌아보면 천지 분간도 제대로 못 한 젊은 날 사람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파라클레시스의 음성에 내가 순하게 순종했다는 것이 지금 돌아보아도 신기하고 감사할 뿐이다. 어리고 어리석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기에 귀가 둔했던 나에게 하나님의 권면을 소리쳐주었던 그분들처럼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파라클레시스를 전하는 자가 되고 싶다. 날마다 깨어 주의 음성을 사모할 일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 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 했다. 저서로는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