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티니즘과 성혁명(1): 고대에서 근대까지

리버티니즘과 성혁명(1): 고대에서 근대까지

2021-07-03 0 By 월드뷰

월드뷰 JULY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글/ 민성길(연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리버티니즘(Libertinism)이란 성적 행위에 제약을 두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방탕아(libertine. 난봉꾼, 호색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하나의 철학으로 이론화하고 장식한 사상이다(이는 자유사상. 방종주의 등으로 번역되나, 이 글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영어 리버티니즘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리버틴(Libertine, 방탕아) 또는 리버티니스트(libertinist, 방탕주의자)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육체적 쾌락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다. 역사적으로 리버티니즘이란 용어는 17세기 귀족들이 성적 자유를 즐기던 풍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했다. 정치, 사회적 자유는 리버테리아니즘(libertarianism, 자유주의 또는 자유의지론)과 리버테리안(libertarian, 자유론자)이라는 용어로 대변되었다.

이 글은 고대부터 서구 사회에 있었던 리버티니즘이 어떻게 기독교의 영향을 벗어나 현대의 집단적 방탕(mass libertinism), 즉 성 혁명적 프리섹스 현상으로 발달해 왔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 의학적 부작용을 살피고, 대응책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1.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성문화는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 매춘 그리고 소년애(pederasty) 등으로 대변된다. 남자들 특히 사회적 엘리트 남성은 매춘업소에서 소위 ‘향연’을 즐겼다. 반면 부인은 정숙하게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소년애란 청소년이 성인 남자와 동성애 관계를 맺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소년애를 옹호하기도 또는 그 타락을 경고하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고대사회에 벌써 인간의 삶에 ‘쾌락(pleasure)’에 대한 각종 철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에피큐리아니즘(Epicureanism, 에피쿠로스학파) – 이 철학은 쾌락, 편안함, 그리고 특정한 스타일을 가지는 고상한 삶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는 수단은 철학이었다. 따라서 모든 인간관계는 쓸모를 기준으로 최소화하고, 우정을 중시하며, 욕망을 줄이고 공공적 생활을 하기보다는 은둔해서 조용히 사는 데 있다고 했다. 에피큐리어니즘(Epicureanism)의 윤리는 원칙적으로는 ‘금욕적인’ 스토아학파의 ‘의무의 윤리’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둘 다 절제와 정의를 추구한다.

헤도니즘(Hedonism, 쾌락주의) – 헤도니즘(Hedonism)은 에피큐리어니즘에 비해 더욱 일반적(generic)이다. 헤도니즘의 신조는 ‘쾌락(pleasure)은 좋다’라는 것이다. 쾌락과 행복이 주된 선(good)이 된다.

방탕적 축제 고대 그리스에서의 리버티니즘은 디오니시아(Dionyisia, 디오니소스 축제) 때, 그리고 로마에서는 황제의 파티와 민간의 리베랄리아(liberalia, Liber신 축제)와 바카날리아(bacchanalia, 바커스 축제) 때 표현되었다. 당시 대표적 방탕아로서는 3대 로마 황제 칼리굴라가 있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는 술취한 세이더(satyr,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반인반수)와 미나드(maenad, 광란적인 여자 시녀)들을 거느린다. 디오니소스 숭배의식은 원래 에로틱하고 황홀경적(ecstatic)이며 거의 광란적인 농민들의 축제였는데, 기원전 7, 8세기에 디오니시아로 공식화되면서 합창과 무용과 연극공연으로 순화되었다. 연극공연 전에 관계자들이 퍼레이드를 펼쳤는데, 화려한 춤과 거대한 남근(팔로스) 등 볼거리가 등장했고 저녁에는 포도주 파티가 열렸다.

그리스의 디오니시아가 서기전 200년경에 로마에 들어와 포도주와 생식의 신 리베르(Liber, 자유의 존재라는 의미)를 기리는 축제 리베랄리아(liberalia)와 융합되었고, 나중에 바카날리아로 이어졌다. 박카스는 그리스의 술(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의 로마식 이름이다. 초기 로마의 지배층은 디오니시아의 열광적인 의식과 난폭한 성적 행위 등이 로마 체제를 위협한다고 보고 탄압하기도 했다. 서기전 2세기 중반 이후 바커스(Bacchus), 리베르(Liber) 및 디오니소스(Dionysus) 등은 모두 술의 신으로 혼용되었으며 방탕적 문화로 중세 이후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주제가 되었다.

그림 내용은 대개 포도와 포도 넝쿨을 왕관처럼 쓴 디오니소스(박커스)의 모습, 술, 나체, 섹스파티 등이다. 술(마약), 나체, 섹스파티, 그리고 이교 등등은 현대 리버티니즘의 핵심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이 풍습은 중세 때 이탈리아 지역의 카니발(carnival)로 이어진다.


2. 중세


서구의 성(性)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적 쾌락을 얻으려 온갖 수단을 부려왔고, 기독교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를 통제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기독교 시대 동안 리버티니즘은 억제되었다. 그러나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서는 매춘과 비교(occult)가 은밀히 번성하고 있었다. 모든 종류의 불륜과 음탕하고 성도착적인 행위들은 sodomy이라는 이름(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 유래함)으로, 또는 Cainites(가인파. 영지주의의 한 분파)라고 불리고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성적 자유를 공식적으로는 일정 기간의 카니발을 통해 허용했다.

카니발(carnival) – 중세 유럽에서 사순절 전에 벌어지는 기독교 전통의 축제이다. 그러나 이는 로마의 바카스 축제(Bacchnalia)와 관련이 있다. 이 축제는 굶주림의 겨울을 끝내고 봄을 기대하면서 흔히 술을 마시고, 남겨둔 음식을 상하기 전에 실컷 먹고, 퍼레이드와 거리 서커스 같은 놀이를 벌이는 행사이다. 이 기간에는 일상의 규범과 법칙들과는 반대로, 마음대로 방자한 행동을 해도 관대하게 허용된다. 특이한 의상, 이성 복장, 과장된 신체 표현(코, 배, 남근 등) 그리고 괴이한 가면을 쓰는데, 이런 가면과 가장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지배계층의 권위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카니발은 평소 억제해야 하는 성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축제이기도 하다. 중세 후기에는 축제 때의 행동들이 너무 과격해 이교(이단)의 행위가 아닌가 하는 교회의 경계를 받기도 했다. 오늘날의 카니발도 애초의 종교적 의미에서 벗어나, 대규모의 화려하고 에로틱한 볼거리로 변모했다. 최근의 유명 카니발들은 프리섹스를 암시하는 듯한 성화(sexualization)가 심하다. 여기에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LGBT)의 퀴어 카니발이 편승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리버티니즘

중세동안 억눌렸던 섹슈얼리티는 드디어 르네상스 시기부터 노골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14세기에 시작된 문예의 르네상스는 섹스에서도 르네상스였다. 엘리트들은 인간의 몸과 관능과 감정을 재발견하고,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또는 ‘예술의 이름’으로 로맨틱한(로마적인), 그러나 실제로는 에로티시즘을 예찬했다. 기독교 이전에 숭배되었던 그리스 신들의 섹스 이야기와 나체가 회화와 조각으로 화려하게 다시 소환되었다. 이전에는 죄가 되었던 것이 이제 죄가 아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술과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찬양되었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은 르네상스 시대가 ‘모순된 중세’의 말기로서, 중세의 특징인 비이성적 사고방식, 가난, 불평등, 무지, 점성술과 마술, 마녀사냥, 종교적·정치적 박해, 전쟁 같은 일들이 르네상스 시대에 더 심했다고도 한다.

성문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는 여전히 가부장적이었으며, 남성은 여성을 억압했다. 당시 결혼은 남녀 두 사람의 연합이 아니라, 두 가문을 묶는 것이었다. ‘로맨틱’은 귀족 남자와 그의 정부(courtesan) 사이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었고, 부인은 집안에서 정숙하고 우아하게 머물러 있어야 했다. 당시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는 부자나 권력을 가진 남자들에게만 해당했다.

또 매춘이 광범위하게 성행했다. 예를 들어 1490년 로마에는 7,000명의 창녀가 있었고, 베네치아의 30만 인구 중에 창녀가 11,654명이었다고 한다. 교회마저 매춘을 은밀하게 용인했다. 대도시의 거리는 사제들과 더불어 매춘부와 소돔인들(sodomites)이 우글댔다. 여기서 소돔인들이란 소도미를 하는 사람으로 남색, 수간 같은 성도착 행동과 성적 방탕을 포함한 모든 성 범죄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통틀어 의미했다. 교회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같은 성도착적인 성행위들이 은밀히 유행했으며, 당연히 매독이 창궐했다. 매독은 현대사회에서의 에이즈에 대한 공포처럼 흑사병, 나병과 더불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를 찬양하려 할 때는 당시의 타락한 성문화도 고려해야 한다.


3. 근대


왕정복고(Restoration) 시대의 리버티니즘

리버티니즘이란 용어는 17세기 영국의 “왕정복고 시대의 리버티니즘(Restoration libertinism)”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했다. 17세기 크롬웰의 청교도혁명이 끝나고 왕정이 복고되면서, 청교도적 가치관에 대한 반동이 나타났다. 권력에 복귀한 왕들은 크롬웰이 만들었던 금욕적인 법을 없애고, 사회에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다시금 왕궁과 귀족 사회에 섹스와 술, 에로틱한 연극 등 쾌락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유행했다. 이를 “왕정복고 시대의 방탕주의(Restoration libertinism)”라고 부른다. 당시 방탕 문학이라는 장르가 유행했는데 시, 미술, 소설, 연극 등을 통해 남녀 간의 연애, 방탕한 삶의 방식, 그리고 카니발의 정신(carnivalesque) 등을 묘사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방탕아(libertine)로 비도덕적인 풍자시와 풍자극을 썼던 영국의 존 윌모트(John Wilmot, 2nd Earl of Rochester)가 있는데, 그는 자신이 보좌하던 방탕아 군주 찰스 2세(Charles II)에 대한 풍자시를 썼다가 궁중에서 쫓겨났다. 그는 돌팔이 의사가 되어 여자의 불임을 고친다고 하며 자신의 정액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결국, 매독에 걸려 33세의 나이에 죽었다.


계몽사상과 리버티니즘

17세기 서구에서 계몽사상이 나타나 18세기부터는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다. 계몽사상가들은 구시대의 기독교적 신념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 사상의 목표는 지식, 자유, 그리고 행복(쾌락)이었고 계몽의 내용은 개인주의, 진보와 과학에 대한 믿음, 자유와 평등, 진보, 관용, 온정, 헌법의 정부, 국가와 종교의 분리,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신론(회의론) 등을 증진하는 것이었다. 계몽사상가들은 인간의 발전에 한껏 자만심을 가졌고, 개혁이라는 “빛을 비추는(enlightening)” 희망에 불탔다.

계몽사상가들은 자유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했으며, 당연히 섹스에 관해서도 토론했다. 성에 관한 토론은 주로 당시 성장하던 도시의 살롱에서 상류층 남자들과 고급 매춘부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성적 욕망은 도덕적으로 용인할 만한 쓸모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이르면 이성적 (합리적) 정신에 따라 삶에 있어 쾌락의 역할에 대해 상호 반대되는 두 가지 경향성이 나타났다. 칸트(Immanuel Kant)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성적 절제를 주장했지만,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은 성 해방을 주장했다. 사드는 그 자신이 ‘방탕아’로서 일탈한 섹스로 유명한 작가 겸 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쾌락주의적 철학과 포르노를 결합해 환상적이고 폭력적인 섹스 그리고 소도미와 신성모독적인 이야기들을 썼다. 현대 이탈리아 철학자 아우구스토 델 노체(Del Noce)는 사드의 극단적 음란(외설)을 이해하는데 과학주의(scienticism)가 그 핵심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이 없다면 기독교는 사기가 되고, 성 억압은 나쁜 범죄가 되는 것이다. 19세기 성(性) 학자들이 그의 아이디어에 따라 “사디즘(sadism 가학증)”이라는 말을 만들었다(그러나 사드가 실제 즐긴 성행동은 단지 하녀를 때리거나, 여러 창녀와 성 파티를 한 수준이었다). 그는 소도미 행동과 포르노를 썼다는 죄목으로 생애 74년 중 무려 32년간을 감옥 또는 정신병원에 갇혀 지냈다. 사드의 과학관과 섹슈얼리티 사상은 20세기에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가 발굴했는데, 그는 정신분석가이자 공산주의자로서 1930년대에 <성 혁명>이라는 책을 썼다.

이 시대에는 성적 추구가 작가와 예술가들의 특권(privilege)처럼 되었다. 계몽주의 작가들은 전통적 기독교 성 윤리에 반하는 노골적인 성을 묘사한 책을 씀으로 최소한 섹스에 대한 기독교적 죄의식을 공공연하게 무시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과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성 윤리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성문화는 점차 개방적이 되었다. 리버티니즘에 성적 일탈(transgression)이라는 의미가 더욱 부여되었다.

바이런의 시집 <돈 후안> (바이런도 당대의 대표적 방탕아였다)


낭만주의(Romanticism) 시대의 리버티니즘

18세기 말에 계몽주의에 뒤이어 낭만주의가 나타났다. 흔히 낭만주의는 인간의 감정을 발견했다고 한다. 감정은 정신의학적으로 본능을 실현할 때 또는 본능 실현이 방해받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다. 본능은 크게 두 가지인데, 성 본능과 공격성이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결국 관능과 로맨스의 발견이다. 낭만주의는 자연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새로운 미적 범주에 접했을 때 경험하는 순전한 희열, 불안, 공포, 경외 등을 강조하며(미학적이다), (어린아이처럼)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동경한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일반적으로 과거(원시)와 자연과 추억을 미화하고 개인주의를 강조했다. 특히 심오한 종교적, 신비주의적 감정을 중시했다. 1790년대 초의 독일 낭만주의의 키워드는 ‘영원에 대한 뜨거운 갈증’,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추구’,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랑’, ‘세계정신에 대한 통찰’, ‘신에 대한 동경’ 등이었다. 이러한 낭만주의는 당시 신학에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환상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계몽주의와 더불어 낭만주의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기대하면서, 종교에 의해 억압된 인간성, 즉 감정표현과 정치적 자유를 얻으려는 혁명에 기여했다. 그 결과 왕의 지배를 거부하는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전쟁), 그리고 혁명의 결정판인 프랑스혁명이 나타났다. 프랑스혁명은 폭력과 반동으로 끝났지만, 미국의 독립혁명은 기독교 정신 때문인지 명예롭게 지속되었다.

성문화 사회의 엘리트들은 자유로운 섹스를 논하고 즐기고 있었지만, 다수의 일반인은 여전히 기독교적 성 윤리에 순응하고 있었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정신(puritanism)과 독일의 경건주의는 사회변화에 따른 성적 타락을 경계해, 전통적 기독교적 성적 도덕성을 고수하거나 재강화하려 했다. 그들은 당시 만연하던 매독을 신의 징벌로 보았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행동에 대한 새로운 다양한 규제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다양해지고 있었다. 프리섹스의 이미지는 당시 돈 환(돈 지오반니), 카사노바, 시라노 드 벨주락 같은 난봉꾼이나 호색가 이야기로 나타났다. 이미 17세기에 성적 쾌락에 대한 출판물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가명으로 익명의 저자가 1684년에 저술한 <Aristotle’s Masterpiece>은 임신하지 않고 성을 즐기는 매뉴얼이었다. 18세기 전반부에는 본격적인 포르노 서적이 등장했다. <Fanny Hill: Memoirs of a Woman of Pleasure>에는 이성애, 동성애, 매질(사도마조히즘) 등이 묘사되었다.

산업혁명에 따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매춘이 성행했다. 직업으로서 매춘은 두 형태로 진화했는데, 거리의 매춘부(prostitute. 길거리와 매음굴(brothel)의 매춘부)와 고급 매춘부로 구분되었다. 고급 매춘부(Courtesan)들은 고대 그리스의 헤 타이라(hetaera)처럼 개인 살롱을 운영하며 선택된 부자와 엘리트 손님들을 받아 향연을 베풀었다.

당시 성 문화는 로코코 미술에 그려진 상류 여성의 내실(boudoir) 풍경에서 잘 나타나 있다. 로코코 양식은 특히 회화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림의 내용은 대개 현란한 스타일, 퇴폐, 부유함의 과시 그리고 지루함과 한가함 속의 품위 없는 경박한 성적 유희 등등을 혼합한 것이었다. 초상화는 귀족의 정부를 그린 것이 많은데(인체의 아름다움보다), 유혹적이고 상당히 노골적인 누드화가 많다. 이런 로코코 미술은 “18세기 플레이보이(The 18th Century Playboy)”라는 말을 듣는다.

이 무렵에 낭만적인 연애 시(詩)들이 나오면서 ‘자유연애(free love)’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조금씩 성을 허용하는 사회가 되어갔다. 대표적으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있다. 이를 계기로 책 시장에서 구애, 결혼, 정조 그리고 여성의 독립 등이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작가들은 자유연애나 유혹의 위험성, 매춘, 난봉꾼(libertines)과 유명인의 성적 행태, 음란물 등 노골적인 성을 묘사한 책을 출판했다. 에로물(erotica)은 금서가 되었음에도 신흥 인쇄산업과 철도 등의 발달로 빠르게 넓은 유럽에 퍼졌다. 그러나 남성우월주의는 여전했고, 여성의 성은 억압되었으며, 매춘과 매독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LGBTQ에 관련해서는 성적 자유론자들 중에서 동성애 경험을 표현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동성애자는 발견되면 처벌되었다. 여전히 매독이 만연했으나 지식인들은 섹스에 대한 기독교적 죄의식을 공공연하게 무시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이런 변화된 풍조와 갈등했다.

<skmin518@yuhs.ac>


글 | 민성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종신회원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및 효자병원 원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최신정신의학>, <임상정신약리학> 등 다수가 있으며 국제신경정신약리학회 선구자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