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1930년대의 여성운동
2021-07-04
월드뷰 JUL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 |
글/ 전혜성(행복한다음세대연구소 대표, 바른인권여성연합 사무총장)
조선 시대는 유교라는 국가이념에 따라 남녀의 역할과 책임을 엄격히 구분하는 강력한 가부장제와 남존여비 사상을 통해서 여성들을 억압했던 시대였다. 특히 여자가 학문을 닦는 것은 부도(婦道)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겨 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1886년 스크랜턴(Scranton) 부인에 의해 조선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세워진 후, 1887년 조선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 엘러스(Annie Ellers)에 의해 ‘정동여학당’이 세워졌다. 평양의 정의여학교(1894), 부산 일신여학교(1895), 평양 숭현여학교(1896), 인천 영화여학교(1897), 서울 배화여학교(1897) 등 기독교 학교가 전국에 세워졌고, 근대적 여성 교육은 여성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이 글에서 1920~1930년대에 일어난 여성운동의 흐름을 정리함으로써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돌아보고 교회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근대교육과 여성의 자기인식 변화
남존여비 풍조로 인해 인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조선의 여인들에게 복음은 자기 존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휘장 세례의 주인공인 전삼덕은 재물과 명성을 모두 갖춘 양반가의 여인이었지만, 남편의 첩살이도 묵묵히 감수하며 양반가의 법도에 따라 규방에 갇힌 삶을 살아가던 여인이었다. 홀(Hall) 선교사가 건네준 전도 책자들을 통해 예수교를 접하고 1895년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은 후 그녀의 인생은 바뀌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으로 활동하다가 학동교회를 세우고 1917년에는 숭덕학교를 설립하여 교사로서도 활동했다.
내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자유하지 못했더니 이제 예수를 믿고 난 후 이처럼 기쁘고 행복하다. 그런데 아직도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나와 같은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또한 좋은 일 아닌가?1)
당시 내외법에 의해 활동 범위가 가정 내에 한정되어 있던 여성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되어, 전삼덕처럼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 땅의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육하는 일에 앞장섰다.
1898년 9월 서울에서 조직된 부인회인 ‘찬양회’는 조선 최초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아야 한다는 선언과 함께 여학교를 설립하자는 요구를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여성 인권선언문이자 근대적 여성운동의 기원으로 평가되는 여권통문(女權通文:여학교설시통문)이다.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구국을 위한 인재양성의 필요성이 더욱 확산되면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여성 교육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 시기의 기독교는 복음전파와 여성 교육을 통해서 유교적 인습에 갇혀있던 조선의 여성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에 눈을 뜨는 놀라운 의식의 변화와 함께 실용교육을 통해 전문적인 직업을 가질 기회를 주기도 했다.
여성, 가정·사회·국가 변혁의 중심이 되다
근대화를 맞이한 조선인들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봉건적 인습 극복이었다. 근대사회 건설을 위해서 봉건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 가정의 변혁, 특히 여성의 변혁이 필요했다. 따라서 초기 여성운동은 전통적 봉건사회를 타파하기 위한 조혼금지와 문맹 퇴치, 가사와 육아에 필요한 과학적 지식 보급 등 교육 계몽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 통치가 본격화됨에 따라 지식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하기 위한 항일애국 운동에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여성의 현실 참여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일으키면서 전국적으로 여성단체들의 항일운동을 이끄는 견인차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민족주의적 여성운동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침체되고 계몽운동 차원으로 위축되었다. 여성 계몽운동을 주도했던 배화학당 교사인 차미리사는 3·1운동 직후인 1920년에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하여 부인야학강습소를 열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1921년 6월 10일부터 10월 10일까지 4개월간에 걸쳐 전국 13도의 73개소를 순회하며 계몽강연회를 개최했다.
3·1운동 이후 본격화된 또 다른 여성운동은 여성해방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주역은 ‘모던 걸’이라 불린 신여성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신여성의 등장이 세계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곳곳에서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남녀평등과 참정권을 요구하는 여성운동이 한창이었다. 1893년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뉴질랜드에 이어 1902년 호주, 1906년 핀란드, 1913년 노르웨이, 1915년 덴마크가 여성 참정권을 도입했다. 1917년 소비에트 연방, 1918년 캐나다, 1919년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도 여성 참정권이 확립되었다. 여성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며 남성과의 동등한 법적, 사회적 권리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를 추구하는 이 자유주의의 물결이 억눌렸던 조선의 여인들을 덮었던 것이다. 1920년 3월 김일엽이 창간한 여성 잡지 <신여자>는 여성해방운동 등장의 신호탄과도 같았다. 1923년에 천도교에서 창간한 또 다른 여성 잡지인 <신여성>을 통해 신여성은 중등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여성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신여성들은 직업과 가정을 양립하거나,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 부부 중심의 가정을 꾸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민족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여성운동에 있어서 여성해방은 새로운 자기인식에서 출발해 봉건적 인습에서 벗어나 남녀 간의 자유연애와 결혼으로 맺어지는 부부 중심의 새로운 형태의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정도의 의미였다.
이 신여성운동은 여성을 계몽하고 여성 인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를 제기했지만, 1920년대 초반부터 몰아친 사회주의의 세례로 인해,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자유주의 신여성운동에 대해 봉건적인 여성이 삶의 부분적인 변화에 만족하며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들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의 논리 위에서 새로운 여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이후 자유주의적 여성운동이 타격을 입고 침체된 틈을 타서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은 1923년 무렵부터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Karl Marx)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베벨(August Bebel)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이론의 영향을 받아 여성 문제를 봉건주의나 식민지와 관련된 쟁점으로가 아니라, 계급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가 조직되었고, 1925년에는 허정숙, 주세죽, 김조이 등이 주축이 된 경성여자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특히 경성여자청년동맹은 급진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들은 사회주의 이론에 근거해 여성운동을 남성의 억압에 대한 투쟁, 무산계급의 투쟁으로 전환했다.
여성운동이 양분화된 가운데 1927년 2월 통합된 항일운동을 위해 민족협동전선운동을 표방한 신간회3)가 창립되자, 여성계에서도 여성운동 통합론이 일어났다. 이에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과 계몽운동에 힘쓰던 기독교 여성 지도자들이 함께 1927년 5월 근우회를 조직했다. 근우회는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이라는 2대 강령과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는 여성 자신의 해방과 일제 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2대 목표를 천명했다. 이것은 조선 여성을 우매하고 순응적인 인간으로 만들려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따라서 근우회에 대한 일제의 강도 높은 탄압이 이어졌고,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 여성운동을 추진했던 유각경·김활란·황에스더·최은희 등이 근우회에서 퇴진하자 근우회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로써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통합 운동이라는 설립 취지가 퇴색하고 자금난까지 겹치자 1930년부터 근우회 운동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이런 내부적 상황과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나가면서
철저히 남성 중심이었던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했던 조선의 여인들은 1900년대 초 비로소 여성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학교 교육을 통해 여성이 봉건적이고 억압적인 가족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적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도왔다. 깨어난 신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자유롭게 연애하며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소박한 꿈을 꾸게 되었다. 이들을 향해 여전히 봉건적 남녀인식에 머무를 뿐이라며, 여성을 억압하는 가족제도 자체를 사회모순으로 보아 계급투쟁으로서의 혁명을 외치는 여성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1920~1930년대 여성운동은 일제 하에서 민족 해방이라는 시대적 사명 앞에서 자유주의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모두 항일독립운동으로 포섭되어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엄격한 남성 중심적 봉건사회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조선의 여성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주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동시에 시대적 사명을 위해 남성의 조력자로서, 협력자로서의 역할도 기꺼이 감당했다. 때로는 남성들보다 더 강렬한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개인의 삶을 포기한 채 치열한 투쟁의 자리에서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유례없는 남녀 갈등으로 혼란스럽다. 남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여성의 권리 주장이 도를 넘었다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도 한다. 남성들이 사회 기득권인 양 행세하며 여성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사회도 옳지 않지만, 여성 인권에 관한 주장이 여성우월주의로 가는 것도 옳지 않다. 이런 사회 흐름 속에서 특별히 교회는 이 세대에게 성경의 진리라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올바른 남녀관계를 제시해주는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 일에 힘써야만 한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등하게 지음받은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나타난 급진적 페미니즘이 이 진리를 외면한 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남녀의 존재를 왜곡하고 남녀의 건강한 관계를 공격하고 가정을 이루지 못하도록 남녀를 가르고 있다. 급진 페미니즘으로 인해 젊은 여성들은 스스로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혀 비(非)연애, 비(非)성관계, 비(非)혼, 비(非)출산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사상의 프레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페미니즘의 공격은 교회에도 가해지며, 성경적 남녀관계를 파괴하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창조의 섭리를 회복하기 위해 창세기의 진리로 돌아가는 것일지 모른다. 대립과 혐오, 반목으로 치닫는 이 시대, 젊은 남녀들 사이에서 화목케 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들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더 늦기 전에 진리로 다음 세대를 세워야 한다.
<happyngi@naver.com>
1) 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 홍성사, 2014.
2) 찬양회에 의해서 서울에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인 ‘순성여학교’가 설립되었다.
3) 신간회(新幹會)는 1927년 2월 15일에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좌파들이 결집해서 창립한 항일단체로, 1931년 5월까지 지속한 독립운동단체이다. 전국구는 물론 해외 지부까지 두고 있는 단체로 회원 수가 3~4만여 명 사이에 이르렀으며,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 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 지원, 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주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글 | 전혜성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총신대학교에서 선교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5년간 평신도 청소년 사역에 헌신 후 국제아프리카내지선교회(AIM) 간사 및 이사로 섬겼다. 다음 세대의 올바른 가치와 윤리를 세우기 위해 설립한 ‘행복한다음세대연구소’의 대표이자 바른인권여성연합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오세라비 작가와 함께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