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가득한 빛깔

세상에 가득한 빛깔

2021-06-25 0 By 월드뷰

월드뷰 JUNE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3


글/ 김민정(성균관대 생활과학연구소 연구원)


시골을 자주 다닌다. 처음에는 일 때문에 가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시골을 좋아하게 되었다. 흙을 만지고, 감자며 열무, 옥수수를 심고 가꾸는 일이 즐겁다. 그리고 매 순간 아름다움을 느낀다. 젖은 흙의 건강한 냄새, 허브의 상쾌한 향기, 맑은 새 소리… 아름다운 것들이 도처에 있다. 그중에서 가장 감탄스러운 것은 색깔이다. 세상을 가득 채운 빛깔들은 신비로울 정도로 다양하고 아름답다.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래에 소개할 그림책은 시골에 갈 때 종종 가지고 가는 책들이다. 책을 보고 실제를 보든, 실제를 보다가 책을 보든 즐거움이 두 배가 된다.


봄의 빛깔은 하양. 흰 눈


계절은 꽃으로 온다. 얼었던 땅이 풀리고, 날이 한결 푹해지고, 해가 퍽 길어진 느낌이 들면 ‘겨울이 가는’ 것 같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흰 목련들이 가로등보다 밝게 켜지고, 바람에 벚꽃잎이 흩날리면 그건 진짜 봄이 ‘온’ 것이다. 공광규 시인의 시에 주리 작가가 그림을 그린 <흰 눈>은 꽃으로 봄을 데려오는 그림책이다. 그림책의 봄은 흰빛이다.

시는 봄에 보는 흰 꽃들을 겨울에 못다 내린 눈이 내려앉은 것이라 노래한다. 시행의 구조는 단순하다. “못다 내린 눈은 -에 앉고, 어디에 앉고, 그러고도 남은 눈은-”으로 이어진다. 시가 각종 봄꽃의 이름을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불러주는 동안, 그림에는 겨울에서 봄이 되는 시간이 흘러간다. 그림 속에서는 시가 노래한 봄꽃들이 누군가의 생활공간 여기저기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미처 겨울에 못다 내린 눈과 소박하고 정갈한 어르신의 삶이 그림 속에서 곱게 얽혀 있다.

시작하는 장면에서는 낮게 깔린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 흩날린다. 눈이 제일 먼저 찾은 자리는 매화나무 가지다. 매화나무에 눈이 내려앉는다. 새벽빛을 받은 가지마다 매화가 하얗게 빛난다. 다음 장을 넘기면, 날이 밝아져 아침이 된다. 아직 남은 겨울눈은 벚나무 가지에 앉고, 어르신은 잠자리를 정리하고 툇마루로 나선다. 댓돌에 놓인 신발을 신고 닭 모이를 주러 가신다. 닭장 근처에는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 내려앉아 흰 조팝꽃이 만발이다. 그래도 남은 눈이 장독대 옆 이팝나무를 온통 하얗게 뒤덮고, 어르신은 그 곁에서 이불이며 옷가지를 빨아 너신다. 이렇게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 부지런히 앉을 자리를 찾아 꽃마다 흰빛을 더하는 동안 어르신도 집안일이며 밭일에, 동물들을 돌보시느라 여념이 없다. 각자 바쁘던 둘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만난다. 앉다가, 앉다가 더 앉을 곳이 없어진 눈이 어르신이 꽃나무 가지인 줄 알고 가만가만 내려앉은 것이다.

눈과 어르신이 모두 조용하게 움직여서 그림책을 큰 소리로 읽기가 민망하다. 글밥이 얼마 없는데 빨리 넘겨지지도 않는다. 하루 같지만, 한 계절이기도 한 그림책 속에 담긴 시간의 밀도가 묵직해서 그렇다. 그림 속에서는 새벽부터 밤까지의 시간이 흐르는 동시에 한창 겨울이라 아직 봄기운을 느끼기엔 이른 시기에 먼저 피는 매화부터 곧 더위가 찾아올 초여름에 피는 산딸나무꽃, 찔레나무 꽃이 차례로 등장한다. 시간의 흐름을 책과 함께 호흡하면서 천천히, 나지막하게 시를 읽으면 그림책의 시간과 공간으로 서서히 잠겨 든다. 차분하게 그림책 속 세계를 둘러본다. 각종 흰 꽃들이 예쁘다. 흰 꽃들은 주변과 다 잘 어울린다. 무슨 색이든, 어떤 물건이든 흰 꽃 곁에 있으면 환하게 보인다. 어르신이 아름답다. 어르신이 그 세계의 구경꾼인 나의 마음까지 환하게 밝히는 걸 보면 흰 눈이 어르신께 내려앉은 건 착각이 아니었다. 어르신은 꽃나무 중 꽃나무였다.

종반에 어르신의 뒷모습이 등장하는 장면이나 어르신의 표정이 클로즈업된 마지막 장면은 그림이 아쉽다. 어르신의 감춰져 있던 백발이 드러나면서 살금살금 다가오던 은근했던 정서가 갑작스럽게 흐트러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흰 눈>은 아름답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옅게 번져 점점 더 진하게 스미는 봄을 만난다. 계절과 시간이 나에게 다가와서 그림책에 손을 뻗으면 봄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옆에 있지만, 일부러 손을 대지 않고 기다리는 간질거리는 설렘을 느낄 수 있다. <흰 눈>으로 희고 빛나는 봄의 세계를 누린다.


은은하고도 화려한 자연의 색, 꽃이 핀다


백지혜 작가의 <꽃이 핀다>의 계절은 전혀 다른 빛깔이다. <꽃이 핀다>는 ‘자연에서 찾은 우리 색’이라는 부제에 걸맞은 색의 그림책이다. 표지부터 색감이 대단하다. 덧표지 전체가 갓 결혼한 새색시가 정성 들여 다려 입은 것 같은 선명하고 고운 다홍빛이다. 덧표지 앞부분에는 다홍빛을 배경으로 찔레꽃이 한 송이 그려져 있다. 찔레꽃 부분만 질감이 달라서 빛이 비치면 꽃이 반짝이는 것으로 보인다. 한 송이인데 화려하고 멋스럽다. 덧표지를 벗기면 배경색을 쏙 뺀 소담한 찔레꽃 한 다발을 만날 수 있다. 덧표지에서 느낄 수 없었던 비단의 질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배경의 색깔이 다를 뿐인데, 한 송이가 한 다발보다 화려하고, 한 다발이 한 송이보다 소담하다. 덧표지와 책의 본 표지를 비교해서 보면 같은 재료로 만든 전혀 다른 요리 같아서 빛깔에서 향과 맛이 느껴진다.

책을 펼치면 본격적으로 빛깔의 향연이 시작된다. 펼침면마다 왼쪽은 글, 오른쪽은 그림인데, 오른쪽 그림은 시선을 쉬이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작가가 우리 색과 멋을 그대로 전하고 싶어서 비단 위에 옛 어른들이 쓰던 천연물감과 전통 채색 방법을 그대로 써서 그렸다는 그림에는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자연의 빛깔이 가득하다. 빨강 동백과 노랑 민들레, 자주 모란, 연두 버들잎 등이 한 면을 가득 채운다. 그림에는 꽃과 풀, 나무가 실제보다 훨씬 크게 그려지거나 어느 한 부분만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되어 있어 꽃과 풀, 나무의 자태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꽃송이가 큰 모란은 꽃의 얼굴만 클로즈업하고, 손톱보다도 작은 꽃을 피우는 꽃마리는 실제보다 열 배는 더 크게 그렸다. 그림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인 데다가 실제 자연에서의 모습을 떠올리는 재미가 더해져 한참 동안 들여다보게 된다. 겨울을 붉게 수놓는 동백에서 시작해 깊은 가을 알알이 맺힌 송악으로 마무리되어 한 해를 색깔로 즐길 수 있다.

<꽃이 핀다>는 정보책이다. 오른쪽 면을 몽땅 그림에 내어주고, 왼쪽 면에만 글이 있다. 중앙에 “빨강, 동백꽃 핀다.”, “노랑, 민들레꽃 핀다.”와 같이 ‘색깔 이름 + 색깔 이름의 꽃이 핀다.’라는 글이 있고, 오른쪽 아래에 해당 색깔과 꽃에 대한 정보가 간략하게 소개된다. 그 내용을 읽다 보면 정보에도 온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색깔의 이름과 전통적인 의미, 꽃이 피는 시기나 특성 등을 알려주는데, 정보가 다정하고 따뜻하다.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그림과 어우러진 그 정보로 사랑하는 것,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전해진다. 맛집을 알게 되면 가족들에게 맛보이고 싶은 것과 같은 마음이라 독자가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다.

그림책을 보는 건 잠깐이지만, 색감이 뛰어난 그림과 따뜻한 정보로 멋진 일 년을 지낼 수 있다. <꽃이 핀다>는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한해살이에 아름다운 순간들이 얼마나 많을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언제나 아름다운 빛깔에 둘러싸여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의 빛깔


고운 빛깔이 담긴 그림책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빛깔을 생각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빛깔이 있다. 손톱 크기의 반의반도 안 될 정도로 자그마한 꽃도 자기 색깔이 있다. 온 산이 초록이어도 그중에 같은 초록은 없다. 한 나무에도 새로 나는 잎의 부드러운 초록이 있고, 해를 묵은 잎의 단단한 초록이 있다. 공장에서 만든 건 이것이든 저것이든 같은 색인 것과는 참 다르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 중 아름답지 않은 빛깔은 없다. 먹구름도 예쁘다. 비가 멀리서 오기 시작해서 빗소리는 들리는데 아직 내가 있는 곳까지 비가 도착하지는 않았을 때, 고개를 들면 가까운 하늘로 먹구름이 다가오는 게 보인다. 먹구름이 얼마나 깊고 오묘하고 세련된 회색빛인지 모른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 중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색은 없다. 사람이 저렇게 옷을 입었으면 참 촌스럽겠구나 싶은데 꽃이 붉고, 잎이 초록인 건 예쁘기만 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은 그렇다.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우리는 모두 그럴 것이다. 저마다 지닌 서로 다른 색깔이 고울 것이고, 그 어우러짐이 아름다울 것이다.

<chulsucomeon@naver.com>


글 | 김민정

성균관대학교 아동문학미디어교육 전공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그림책 전문가 과정’ 강의를 하고 있으며, 동 대학의 아동청소년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