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심

어루만지심

2021-06-24 0 By 월드뷰

월드뷰 JUNE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글/ 조혜경(작가)


“엄마 어떡하지? 나 진짜 못하겠는데… 그만둘까?”

마침내 ‘그만둘까’를 언급하는 카톡이 온 것은 아이가 레지던트 일 년 차 일을 시작한 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은 날이었다. 한 대학병원에서 일을 시작한 아이는 첫날부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내용의 문자를 연거푸 보내왔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나 아직 병원 ㅠㅠ’, 새벽 5시에 ‘한숨도 못 잤는데 환자 파악도 다 못 했어 ㅠㅠ’, 낮 2시에 ‘오늘 당직인데 12명 중 내일 오더 겨우 1명 넣었어 ㅠㅠ’.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모양의 모음 ‘ㅠㅠ’가 일상적으로 붙었다. 동문서답처럼 나는 매번 밥은 먹었냐고 물었고, 아이는 번번이 ‘아직’이라고 답이 왔다. 그리곤 급기야 그만둘까, 물어왔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모두 태생적으로 엄살도 수다도 적다. 뭐든 잘 참고 그래서 말도 별로 없다. 남편도 참고 참다가 응급실로 갈 정도가 되어서야 아프다고 말을 해 실제로 응급실만 서너 차례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러므로 아이가 저런 신호를 보내면 정말 힘든 것이다.

계속되는 아이의 글을 받으며 집에서 마음 졸이던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직감했다. 아이는 인턴 때부터 병원 바로 옆에 방을 얻어 혼자 생활하고 있다. 아이 곁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우선 먹여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해 아이 방으로 가는 경부고속도로 광역버스 안, 며칠 전 읽은 칼럼의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의 이 말을 읽을 땐 잠시 아버지를 떠올렸었다. 복싱관람을 즐겨 하셨던 아버지는 어느 해인가 내가 우연히 함께 본 TV 실황 중계 때 우리나라 선수가 챔피언이 되자 ‘딸내미가 함께 응원해서 우리 선수가 챔피언이 되었다’고 억지를 부리셨다. 그리곤 챔피언 매치 중계가 있을 때마다 당신은 목욕재계하는 자세로 샤워까지 말끔히 마치고 앉아 기다리시며 ‘딸내미! 함께 응원 좀 해줘!’라고 애걸(?)하셨다. ‘그럴싸한 계획’은 온갖 행운의 징조를 모으고 기대하는 나의 아버지와 같은 관중도 늘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눈가가 찢어지고 얼굴이 부어 떴는지 감았는지 모르겠는 눈에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통만 한 챔피언 벨트를 매고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일은 어쩌다 있었다. 대개는 ‘처맞’아 무릎을 꿇거나 링 밖에서 큰소리로 더 열심히 싸우던 트레이너가 분한 얼굴로 코너에서 수건을 던져야 하는 굴욕적인 상황이 더 잦았다. 아이에게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마이크 타이슨의 이 말이 왜 떠오르는 것인가. 방심하다가 매섭게 들어 온 어퍼컷에 휙 돌아가는 턱과 튕겨 나가는 마우스피스, 함께 튀기는 핏방울…. 만화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지난 1년, 아이의 인턴 기간 나는 매달 시간표를 전달받아 내 달력에 아이의 당직 일을 표시해 놓고 거의 함께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절대 실수하지 않기를 긴장하며 기도했다. 인턴을 잘 마쳤다고 잠시 방심한 것인가? 별의별 일을 다 겪어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었다.

아이는 밤 11시가 넘어 방으로 돌아왔다. 점심도 저녁도 거르고 간호사 선생님이 갖다 준 초코우유로 요기를 했단다. 예상했던 것보다 아이는 더 지쳐 보였다. 아이는 식탁 의자에 앉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식탁을 침대 앞으로 끌어당겨 주었다. 베개에 비스듬히 기댄 자세로 천혜향 몇 조각을 먹더니 버터에 구운 전복 두 마리와 연어 한 조각, 소고기 두 점을 먹고는 그냥 뒤로 누워버렸다. 그리고 잠들었다. 상큼한 애플 소스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라며 와플 가게 주인이 야심 차게 권했던 아보카도 샐러드는 그대로 남았다. “엄마! 내가 정말 너무 몰라.” “내가 너무 느려.” “일 다 못 끝내서 내일 일찍 나가야 해.” 한 입 먹을 때마다 띄엄띄엄 신음처럼 말했다.

아이는 첫 달 혈액종양내과로 배치받고 16명의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조혈모세포를 이식받기 위해 입원한 환우들의 느닷없는 고열, 설사, 감염의 비상 상황에 대처하고, 적절한 오더를 내는 일을 아이가 맡고 있었다. 환자의 상태는 위중한데 아이는 의학지식이 부족하고, 판단이 서툴고, 대처와 기록에 느리다고 했다. “엄마, 심지어 내가 꼼꼼하지도 못해.” 아이는 모든 일에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고 있었다. 잠든 아이의 양말을 벗기고 바로 누이며 ‘레지던트 1주 차가 어떻게 그런 일을 잘해? 잘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 누군가에게 항변하듯 내가 속으로 외쳤다. 당직까지 40시간 넘게 일하고 와 곯아떨어져 버린 아이. 잠든 얼굴조차 황폐해 보였다.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그때 나도 어떤 일에 집중하며 많이 힘들었다. 학교로 가는 대신 반대 방향인 천변을 따라 걷다가 한벽루에 올랐다. 한벽루 옆으론 기찻길이 지나고 기찻길을 품고 있는 커다란 굴이 있었다. 오전 시간엔 늘 아무도 없었는데 그날은 정자에 학교에 앉아 있어야 할 초등학교 3, 4학년으로 보이는 한 꼬마가 가방을 메고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내가 서 있곤 하는 자리였다. 나는 아이와 좀 떨어져 섰다. 조금 후 멀리서 소리가 들리고 기차가 굴을 통과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습관적으로 지나는 기차의 칸을 셌다. 아이도 나처럼 기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빠르게 기차가 지나고 우리는 잠깐 눈이 마주쳤다. “기차 몇 칸인지 알아?” 내가 아이에게 물었다. “열한 칸요.” 조금 후 아이는 터덜터덜 정자를 내려갔다. ‘열한 칸요’라는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꽁꽁 언 몸에 따뜻한 물 한 모금이 들어온 것처럼 이상하게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함께 기차의 칸을 셌다는 그것이 뭐라고 황폐한 내 마음에 위로가 되었는지 지금도 정확히 설명할 길은 없다.

지금 이 딸에게 무엇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먼저 몇 분께 기도를 부탁했다. 그분들은 아이의 성장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의전원 시험 볼 때, 의사고시, 인턴, 레지던트 시험 등, 시마다 때마다 아이를 위해서 함께 기도해주셨던 분들이다.

문제의 핵심은 레지던트 한 달 차가 감당하기에 일의 양이 너무 많고 아이의 실력이 부족한 것이지만 그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자신의 오판으로 환자 상태가 나빠질까 봐 겁을 내고 있었고, 다른 동료들은 다 잘하는 것 같은데 자신만 계속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먹고 자는 것도 부실하니 심신이 허약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가족의 양해를 구하고 나는 밤마다 아이에게로 왔다. 일단 한 끼니라도 잘 먹여보기로 했다. 로뎀 나무 아래 앉아 생명을 거둬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지쳐 잠든 엘리야에게 천사가 준비해주었던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왕상 19:6)을 떠올렸다.

다행히 아이의 퇴근이 11시에서 10시로 9시로 조금씩 일러졌고, 매일 밤 똑같은 메뉴를 별말 없이 먹어주었다. 일이 조금은 익숙해지고 있는 것인가 추측할 즈음, 아이의 귀가가 다시 자정 가까이 늦어졌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잘 마친 환자 한 분의 상태가 좋지 않아 지켜보느라 늦는다고 했다. 식탁에 앉아 너무 늦은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 태블릿을 검색하며 혼잣말을 했다. ‘하아… 왜 복수가 차기 시작했지?’ ‘신장 쪽 검사도 괜찮다고 했는데…’ ‘이 약이 문젠가? 그럴 수도 있나?’ 급기야 내게 물었다.

“엄마! 왜 복수가 찰까? …너무 답답해서 갈 때마다 내가 그분 배를 계속 쓰다듬어봐.”

답을 기대한 질문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안타까워 대답했다.

“그 환자 지정의 교수님께 여쭤봐. 펠로우나 2년 차 선생님과도 상의해보고. 한 달 차 레지던트에게 원하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을 거야. 환자를 충실히 관찰하고 그 결과를 잘 보고해주는 정도 아닐까?”

처음 며칠은 늦은 저녁을 먹고 이도 닦지 못하고 곯아떨어지던 아이가 이제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 책을 보고 태블릿을 검색했다.

새벽 6시, 샤워를 마친 아이는 나가려다 1분만 쉬겠다며 다시 침대 위에 주저앉는다. 밤새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건만 눈 뜨자마자 영혼이 탈탈 털린 것 같은 얼굴로 어제 아침에도, 그제 아침에도 했던 소리를 또 한숨처럼 뱉었다.

“아! 정말 가기 싫다!! 엄마! 이렇게 살아야 할까? 어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막 화가 났어!”

‘한 달만 견뎌보자. 그래도 아니다 싶으면 그때 결정하자’라는 똑같은 대답 대신 내 입에선 다른 말이 나왔다.

“‘복수’ 환자 괜찮으실까? 밤새 별일 없었겠지?”

대답 없이 아이는 시계 초침에 밀리듯 일어나 나갔다. 4층에서 유리창 문을 열고 아이가 아직 어두운 골목을 벗어나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고등학교 2학년, 피부병으로 절망적일 때 등교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12층 복도에 서서 아침마다 지켜보던 일이 생각났다. 링 위로 수건을 던져야 했다면 당시 그것은 나의 몫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예 수건 자체를 손에 쥐어본 적도 없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럼에도 아직 귓가에 남아 있는 아이의 한숨을 털어내지 못해 나는 아이 방을 서성였다. 7평이 채 안 되는 방 곳곳에 성경 구절이 붙어 있다. 포스트잇에 아이가 볼펜으로 써서 붙여 놓은 것이다. 유월절 이스라엘 백성이 문설주에 발랐던 양의 피처럼 현관문엔 요한복음 15장 15절과 스바냐 3장 17절이 나란히 붙어 있다. 화장실 문에도 세탁기가 있는 작은 창고 문에도 성경 구절이 붙어 있다. 식탁에 앉으면 보이는 장롱 옆면 눈높이엔 사무엘하 22장 29절 말씀이, 그리고 그 옆엔 <약한 나로 강하게>의 찬송 한 구절이 적혀 있다.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었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얼마를 서성였을까. 방 안이 환해진다. 채광을 위해 낸 동쪽의 작은 창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온다. 그곳에 아이는 어린 시절 함께 영국을 방문했을 때 선물로 받은 헨리 8세의 초상화를 커튼 대신 걸어두었다. 남쪽으로 난 커다란 미닫이창엔 함께 선교여행을 갔던 브라질의 해변에서 산 진초록 빛깔의 커다란 스카프와 정사각형 식탁보를 매달아 두었다. 식탁보 자리엔 얼마 전까지도 아이의 외할머니가 수를 놓은 천이 매달려 있었다. 할머니의 유품인 수놓은 천은 옛날 벽에 옷을 걸고 그것을 덮는 용도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가진 할머니의 유일한 유품이 햇빛에 바랠까 봐 보관해두었다고 했다. 작은 냉장고 위의 스노우볼, 동생의 웃는 사진, 작은 나무 십자가, 스티커를 모아 붙여 놓은 카드, 캐릭터 엽서, 환우로부터 선물 받은 하트모양의 수예품, 그리고 어느 늦은 밤 함께 걷다가 고른 화병 속의 파란색 카네이션 세 송이…. 식탁 밑까지 환하게 밀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모든 소품이 가만가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아이의 정 깊은 감성과 공유했던 기억이 함께 살아난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옛날 어린 꼬마로부터 ‘열한 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연타로 맞은 잽에 잠시 휘청였으나 휴식 시간에 뛰어 올라온 트레이너의 마사지와 격려를 받고 다시 기운을 얻어 파이팅을 외치며 뛰어나가는 복서처럼 아이도 이 방에서 아침마다 새 힘을 얻어 나갈 것을 나는 믿는다. 작고 허름하지만 정겨운 이곳에 로뎀 나무 아래 엘리야를 찾아오셨던 천사가 밤마다 찾아와 곤한 몸과 영혼을 어루만져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준비해야겠다.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하는지라 (왕상 19:5)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 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 했다. 저서로는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