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을 찍는 사진 작가 라미 현
2021-06-07
월드뷰 JUNE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5 |
군복의 역사를 담는 사진작가 라미 현(현효제)의 작품을 만났다. 그는 잠실 월드타워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6·25전쟁 71주년을 맞아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전쟁 참전용사, 군복 입은 베테랑의 사진을 담은 <PROJECT SOLDIER_kwv>를 진행 중이었다. 이 일은 군복 전시회에서 참전용사 살바토르 스칼라토(Salvatore Scarlato) 씨를 우연히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물론 유엔군 한국전쟁 참전용사(Korean War Veterans; kwv)들의 군복 입은 모습을 담백하고 기풍있게 담았다.
안: 궁금했습니다. 이미 잊혀진 듯한 한국전쟁의 참전용사를 찾아다니며 사진 찍고 앨범을 선물한다는 것이요. 어떻게 이 일을 하시게 되셨는지 들려주세요.
현: ‘프로젝트 솔져’는 참전용사로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셨던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남기려고 기록하는 작업입니다. 원래는 2013년부터 군인들의 모습을 전시했는데, 우연히 미 해병대 참전용사 살바토르 스칼라토 씨가 전시회를 지나다가 보셨어요. 그분은 군복에 관심이 많았고 자부심도 엄청났어요. 눈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그런 사람은 처음 봤어요. 저는 바빴고, 군인들을 찍고 있어서 ‘촬영해 드리겠습니다.’하고 사진을 찍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눈이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스튜디오 가서 보니까 그런 자부심이 그대로 눈에 담겨 있는 거예요. 도대체 뭐가 남의 나라 전쟁터에 왔다가 자부심을 갖게 했을까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베테랑들에게서 똑같은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당시에는 국가기관이나 교회 같은 곳에서 참전용사를 초대하는 행사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촬영을 요청하면 이런 작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돈 벌려고 이용하려는 줄 알고 사기꾼 대하듯 대하더군요. 아무래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제가 제 돈으로 외국에 나가서 찾아보자 생각한 겁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할 생각이 없었고, ‘그냥 한 번만 더 해보자.’ 그런 식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2019년 7월에 영국에서 베테랑들을 만나고 돌아왔는데, 그곳의 회장님이 12월에 이메일을 보내셨습니다. 혹시 그때 찍었던 사진을 언제쯤 받을 수 있는지, 돈이 없으면 자신들이 모금해서 비행기 푯값을 보내주겠다고요. 어떻게 사시는지 뻔히 다 아는데 어떻게 그걸 돈 받아서 가겠습니까. 상황 봐서 가겠다고 하고는 이것저것 팔아서 경비를 마련해서 갔습니다. 그런 식으로 한 번 더 가야 하는 이유가 매번 생겼습니다. 마지막을 생각할 때 또 기회가 생기더군요.
안: 그런데 방송에 출연하신 다음 국내 분위기가 달라졌다면서요?
현: 방송이 무서운 게 작년까지만 해도 제가 돌아왔을 때 허리 다쳤지, 돈 다 떨어졌지, 장비 다 망가졌지. 그래서 ‘이제 끝났나?’ 하는 생각으로 우울했습니다. 그런데 유재석 씨가 진행하는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 나간 이후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됐습니다. 가끔 ‘왜 평화를 얘기할 타이밍에 전쟁을 얘기하느냐?’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사함을 전할 뿐인데 왜 그렇게 정치적으로 보는지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그 방송 이후로 10대, 20대와 특히 여성 팔로워가 많이 늘었습니다. 사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참전용사 집안이거든요. 하지만 손자 손녀들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미 돌아가셨는데 감사하다는 말을 한 마디도 못해 드려 안타깝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진전을 통해 할아버지 세대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래서 할아버지가 계신 현충원에 가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자신의 할아버지를 찍어달라는 사람도 있었고요. 이 작업이 어른들에 대해 다시 얘기하고 기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됐습니다.
안: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전쟁을 직접 치렀어야만 했던 세대와 그것을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세대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작가님이 해주셨습니다.
현: 사진을 배울 때 선생님께서 사진이라는 것은 멋지게 돈을 벌 수도 있지만 “현재의 것을 기록해서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매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분들 희생의 가치라든가 그 이유를 더 늦기 전에 기록해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진예술이 본업이지만 가장 중요한 게 돈보다 만족감입니다. 제가 작은 걸 했을 때 이분들은 자기 인생을 보상받은 것처럼 좋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잊혔다고 생각했는데 목숨 걸고 싸웠던 나라의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주며 고마워하니까요. 이분들이 원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참전용사로서 한국에서 목숨 걸고 싸웠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진으로 기록되면 자신의 가족이 보고 또, 누군가가 보고 기억되는 거죠.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그런 만족감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하는 것 같습니다.
안: 그게 계속 일하게 만드는 에너지로군요. 그분들께서 희생에 대한 보람을 되찾게 되니까 너무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작가님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 목표는 휴전 70주년인 2023년까지 참전용사들의 나라를 모두 방문하는 것입니다.
안: 이 사진에 개들이 많이 나오네요.
현: 해병대 부대원들 사진들인데, 보시면 다 누렁이입니다. 뭐냐고 물어봤더니, 전쟁 중 야간에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기습이 많아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주인이 없는 떠돌이 강아지가 귀여워서 데려다 키웠는데, 우연히 야간에 경계병들이 개를 데리고 나갔더니 으르렁거리더라는 겁니다. 적들이 매복해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미 해병대에서는 작전에 개를 데려가고, 특히 야간 작전에는 항상 개를 데려간다고 합니다. 지뢰밭에 갈 때도 그렇죠. 그러니 사실 누렁이는 한국전 참전 군견입니다.
사진의 이 한국인(오병하)은 14살 때 참전했습니다. 아버지는 지주라는 이유로 개성에서 총살당했고, 서둘러 개성에서 도망 나와 서울 시내 길바닥에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우연히 미 해병대 1사단을 만났는데 ‘북에서 온 애들 있냐?’라고 해서 밥은 먹겠다 싶어 손을 번쩍 들었더니, 북에 가서 부족한 정보를 알아 오라고 하더랍니다. ‘이 길이 아버지 복수도 하고 나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당시 개성 송악산에 북한군 동굴 벙커 기지가 있었는데 여기에 숨어있다가 밤에만 나와 공격을 하니, 진격도 못 하고 아군 피해가 컸답니다. 친척 집에서 배운 인삼 캐는 경험으로 심마니처럼 산을 돌아다니면서 북한군 보초들을 인삼으로 회유해 6개월 동안 4개의 벙커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정보로 미국이 정밀 폭격해서 전세를 역전시켰다는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푸에르토리코는 원래 스페인 땅이었다가 미국의 자치령이 됐습니다. 제주도의 5배 크기인데, 한국전쟁에 이 섬에서만 6만 1천 명이 참전했습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은 거의 다 참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5년 뒤 전쟁이 났으니, 미국에는 모집할 인원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왔는데, 이분들은 영어를 못 하고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게다가 푸에르토리코가 하와이 날씨니,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왔답니다. 인천상륙작전 때는 어디에 가는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인천이 가까워지는데, 해안선 멀리 떨어진 곳에 내리게 하면서 갯벌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아 갯벌에 무거운 장비와 함께 내리다가 익사한 전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익사한 전우를 밟고 살 수 있었답니다. “more Fuerto Ricorian(푸레르토리코인들 더 데려와라)” 이들이 너무 잘 싸우니까 다른 군인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흥남 철수 때도 적과 가장 가까이서 맞선 사람들입니다. 이들 덕분에 성공적인 철수가 가능했습니다. 이분들에게 한국전쟁 하면 생각나는 건 세 가지랍니다. 눈, 추위, 배고픔.
많은 참전용사들이 액자값을 물을 때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69년 전에 지불하셨습니다. 저는 그 빚을 조금 갚는 것뿐입니다.”
그러자 윌리엄의 표정이 안 좋아지셨어요.
“You have so wrong idea. 너희가 빚진 것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미국인, 영국인 상관없이 자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의무가 있어. 그 의무는 자유가 없거나, 자유를 잃게 생긴 사람들에게 자유를 전하고 지키게 하는 거야. 우리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그 자유를 지키고 전달하기 위해서야. 우리의 의무지. 다만 우리가 너희에게 준 자유를 얻었으니 너희도 의무가 생긴 거야. 북쪽 동포들에게 자유를 전달하는 것. 그것이 너희들의 의무야. 그 의무를 다했으면 한다.”
그 밖에도 전쟁 통에 소식이 끊어져 잃었던 여자친구를 50년 만에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 여생을 함께하게 된 영국 여왕 기마병 출신의 영국 장교 빅터 이야기, 세계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장진호 전투 최전방에 섰던 미 해병대 1사단이 중국군을 향해 박격포 폭격을 요청했는데, 박격포탄 통신암호 ‘투시 롤(Tootsie Rolls)’을 이해하지 못했던 통신병의 실수로 캐러멜 투시롤 수백 상자를 하늘에서 우박처럼 떨어뜨렸고,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엄청난 추위에 모든 음식이 어는 전쟁터에서 투시롤이 군인들의 열량을 보충해 준 덕분에 생존해 싸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을 다녀간 참전용사들은 자기 나라에 가서 만나는 동료들에게 “한국에 가라. 치유된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자신들은 잊혀진 베테랑이 아니고, 목숨 걸고 지켰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자유와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인터뷰 정리 / 안석문 아침교회 담임목사)
라미 현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AAU (Academy of Art University)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자비로 비용을 부담하며 국내·외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직접 찾아가 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다. 사진액자와 함께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으며, 한국전쟁 참전영웅들의 모습을 다음 세대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