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미국 기독교 원조단체

2021-06-06 0 By 월드뷰

월드뷰 JUNE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4


글/ 장금현(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은 세계질서 재편에 힘을 기울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타국에 간섭하지 않는 소위 ‘중립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미국은 국제질서를 새롭게 재편하지 않으면 세계대전과 같은 위기가 다시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중요한 정책을 결정했는데 하나는 전쟁 방지와 평화유지 및 증진을 위한 UN 설립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 사회의 재건과 부흥을 위한 원조였다. 그러나 유럽에 집중됐던 미국의 원조는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로 돌렸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정부 차원에서의 원조이고, 다른 하나는 민간단체를 통한 원조다. 이 글에서 눈여겨볼 것은 후자다.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 정부에서 발간한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대외원조 현황을 보면 민간회원단체들의 지원이 압도적이다. 특히 대외원조 활동에 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월등히 높다.1)

기독교 외원단체들은 효율적인 원조를 위해 연합회를 세웠다. 그 연합단체가 1951년 설립된 한국기독교세계봉사회(KCWS)이며, 1년 뒤인 1952년 1월 KCWS를 중심으로 원조단체연합회인 KAVA를 설립했다. 여기에 시민단체들도 합류했지만, 임원진 구성이나 활동 주체를 보면 대부분 기독교 외원단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원조 활동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표현양식이었다. 미국 교회는 일제 시대부터 해방 이후까지 한국 사회와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북장로교선교회의 경우, 평양에 선교를 재개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을 정도였다. 해방 후에는 그 기금을 남한 사회와 교회 재건을 위해 사용했다. 6·25전쟁이 일어나 대부분의 선교사가 일본으로 피신할 때 아담스(Edward Adams, 安斗華), 힐(Harry J. Hill, 許一), 캠벨(Archibald Campbell, 甘富悅),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元約漢), 킨슬러(Francie Kinsler, 權世㤠), 언더우드 II(Horace Grant Underwood, 元一漢) 등은 한국에 남아서 미국 교회의 도움을 받아 구호 및 재건 활동을 펼쳤다.

둘째로 미국 교회의 원조 활동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맞물려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해 진보주의 계열보다는 복음적인 계열이 더 비판적이었다. 후자는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이념 문제를 넘어선 “영적 전쟁(the Spiritual War)”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의 트루먼(Harry S. Truman)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와의 대립을 정치, 경제, 군사적인 측면을 넘어선 종교적 측면으로 확대했다. 1953년 대통령에 당선된 공화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더 적극적으로 공산주의에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KAVA의 회원단체이면서 기독교를 배경으로 조직된 외원단체들이 적지 않은데, 그중에서 밥 피어스(Bob Pierce)의 월드비전(World Vision), 스완슨(Everett Swanson)의 컴패션(Compassion), 홀트(Harry Holt)의 아동복지회(Holt Children’s Service)가 대표적이다. 다음에는 간단하게 외원단체들의 설립과정과 주요 활동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밥 피어스(Bob Pierce)의 월드비전(World Vision)


성결 운동에 영향을 받은 밥 피어스는 1940년 침례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청소년 기독교단체인 YFC 설립에 참여했던 그는 1947년 전도 집회를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4개월 동안의 전도 집회에서 17,000명의 결신자가 생길 정도로 큰 결실을 맺었으나 많은 선교사가 선교본부와 연락이 끊어진 상태로 힘겹게 살면서도 고아들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고아들에게 관심 갖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영적으로 정치적으로 위기”(spiritual and political crises)에 빠진 중국으로 다시 돌아갈 것임을 전하며, 당시 중국 청소년을 위해 약 67,000달러 이상을 모금했다.2) 이듬해인 1948년 다시 중국에 간 그는 지난해에 만났던 많은 목회자와 선교사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고, 병원과 학교와 선교지가 약탈당하고 파괴된 것을 목격했다.

밥 피어스는 중국의 공산화로 더이상 전도 활동을 할 수 없었게 되자 1949년과 1950년 한국을 방문해서 공산주의에 대응하는 한국 교회를 격려하며 복음 전도에 앞장섰다. 한국을 떠난 지 얼마 후 6·25전쟁을 접한 그는 중국이 이미 공산화되었고, 한국마저 공산화된다면 과연 미국은 안전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는 미국 교회에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고자 1950년 9월 22일 월드비전을 세웠다. 월드비전은 “환상(비전)이 벗는 민족은 망한다(잠 2:18)”라는 말씀을 근거로 설립됐는데, 첫 번째 해에 41,245달러를 모금할 정도로 미국 교회의 호응이 컸다.3)

밥 피어스는 중국의 청소년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 차원에서 영화를 제작한 경험을 토대로 6·25전쟁과 고아들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하며, 한국을 위한 모금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가 제작한 <38선(38th Parallel)>은 즉시 “금세기에 만들어진 영화 센세이션”이라는 제목으로 홍보되었고, 1954년에는 “한국이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기 전에 나온 마지막 완성되고, 사실에 충실한 필름 다큐멘트”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에는 공산당에 집을 빼앗기고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월남하다가 붙잡혀 수천 명이 살해당한 이야기가 담겼다. 이들은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쓰레기 처리장에 세워진 수용소에서 하루 2~3센트를 벌고자 애쓰고, 1살 미만 아기의 70%가 죽어가는 모습을 영화에 담았다.4) 이 외에도 일제 시대에 고난받았던 한국 교회, 외국에 선교사를 보내는 유일한 아시아권 교회,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성도들, 참된 회개와 성령의 역사도 포함됐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 도전받은 미국 교회는 한국 사회와 교회를 돕고자 물질로 헌신을 표했다.

월드비전의 초기 사업은 한국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한 육아원, 영아원, 맹아원, 농아원 등의 시설지원 사업이 주를 이루었다. 지원 초기에는 의식주 중심의 지원을 했으나 점차 시설 아동의 교육, 신앙, 의료분야에 대한 지원으로 확대했다. 1954년부터는 아동병원을 설립해 1980년까지 약 54만 명의 시설 아동과 영세 가정을 위한 무료 의료지원사업을 추진했다. 1959년에는 서울 남대문 5가에 설립한 ‘월드비전 특수 피부 진료소’는 이후 약 20년 동안 약 42만 명의 나병 환자를 치료하며 대한민국에서 나병을 퇴치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1960년 선명회 합창단을 창단해 시설 아동들의 정서함양과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모금 활동을 펼쳤다. 월드비전은 1971년 ‘음성 나환자정착촌 지원사업’, 1972년 ‘선명회 직업보도소’ 개설, 1974년 최초의 사회복지관 ‘성남사회복지관’ 개관 등으로 “그들의 필요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특히 1991년 10월은 월드비전의 중요한 전환 시기였다. 그동안 받아온 원조를 멈추고 자립을 선언했다. 이제는 원조 수여국에서 제공국으로 바뀐 대한민국의 월드비전은 해외 원조사업을 수행하며 1994년부터 북한 지원사업도 시작했다. 그동안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계로 확산하는 중이다.5)


스완슨(Everett Swanson)의 컴패션(Compassion)


1913년 12월 13일 일리노이주의 한 농장에서 태어난 스완슨은 1923년 4월 부활주일에 시애틀의 퀸아네침례교회(The Queen Anne Baptist Church)에서 주일학교 예배를 드리던 중 회심을 체험했다. 17살이 되던 해 전도대에서 활동하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순회전도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50년 7월 22일 스완슨은 더 큰 사명을 깨닫고 1년 안에 세계를 순회하며 전도하고자 미국을 떠났다. 그 첫 번째 선교지가 바로 한국이었다. 그는 6개월을 한국에서 보내면서 파괴된 건물과 무너진 집을 떠나 방황하는 수만 명의 고아, 미망인, 굶주림에 병든 이들을 목격했다. 1년 뒤에 그는 한국군에게 전도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 기간에 그는 전쟁고아들의 비참한 참상을 목격하고 그들을 돕고자 1956년 스완슨 복음전도회(Everett Swanson Evangelistic Association)를 세웠다. 이것이 컴패션의 모태다.

스완슨은 한국의 고아들을 돕기 위해 깡통을 들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첫 번째 고아원이 삼척 부평리에 설립됐다. 그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고아원을 짓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세운 여러 열악한 고아원의 지원도 맡았다. 개인, 가족 또는 교회가 한국의 어린이와 1:1로 결연 맺도록 도움을 주고, 후원자는 매달 후원금을 보내며 편지로 어린이를 격려하고 어린이는 후원자를 부모처럼 받아들였다. 이것은 컴패션의 큰 흐름이기도 하다.

스완슨은 대구에 사무실을 두고 16개 복지시설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의식주를 지원하며 정기 의료검사를 받게 했다. 스완슨 복음전도회가 설립된 지 7년만인 1963년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마 15:32)” 예수님 마음에 근거해 컴패션을 설립했다. 이때까지 보육원에서 약 1만 명의 어린이가 1:1 양육을 받았다. 이듬해인 1964년 어린이 콰이어 팀을 구성해 미국 80개 도시의 교회를 다니며 순회공연을 하고, 많은 후원자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1965년 스완슨이 질환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미국 교회 후원자들은 추모기금을 마련해 서울 컴패션 사무실의 건축비를 지원했다. 컴패션은 1968년부터 활동 범위를 월드비전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세계로 향했다. 41년 동안 10만 명 이상의 어린이를 1:1로 양육한 컴패션은 각종 사업을 마무리하고 1993년 한국에서 철수했다. 2003년 수혜국에서 원조국으로 재탄생한 한국컴패션은 10번째 후원국으로써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교회를 매개체로 여러 나라에서 사역하고 있다.6)


홀트(Harry Holt)의 아동복지회(Holt Children’s Service)


가정예배를 통해 신앙이 성장한 홀트는 신실한 침례교인이었다. 그는 결혼 초기 소작농을 할 정도로 어려웠지만, 1937년 오레곤 주에 정착한 뒤 제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6·25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색전증(塞栓症)으로 죽을 고비를 겪었던 그는 1954년 12월 14일 저녁, 밥 피어스가 월드비전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 참석했다. 강연회 중에 보여준 영화 “휴가 중인 사자들”과 “잃어버린 어린 양”을 통해 홀트 부부는 순교 당한 목회자의 삶과 전쟁고아들과 미망인들이 겪는 고통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돕기 위한 많은 기독교 외원단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홀트 부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만든 것은 혼혈아들이었다. 밥 피어스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한국의 참상과 혼혈아들의 문제,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언급하면서 자원자를 모집했다. 이에 홀트 부부는 한국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매월 10명의 후원비 10달러씩을 월드비전을 통해 후원하기 시작했다.

홀트아동복지회는 1955년 10월 12일 12명의 한국 어린이를 미국 가정에 입양시키면서 시작했다. 이 중 8명을 홀트 부부가 주도해서 홀트 가(家)에서 입양했다.7)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55년부터 1960년까지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한 현황은 다음과 같다.8)

1956년 2월 한국에 입국한 홀트는 홀트씨해외양자회를 세우고 본격적인 입양사업을 시작했다. 미국에도 입양기관 설립의 필요성에 의해 같은 해 10월 미국 “고아재단기금법”에 근거해 <고아재단기금>을 설립했다. 이 법인은 1962년 정식 입양기관인증서를 취득하고 홀트양자회(Holt Adoption Program)로, 1974년 홀트국제아동기금으로, 1975년에는 홀트국제아동복지회로 발전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9)

1972년에는 한국홀트아동복지회를 사회복지법인으로 변경하고, 1974년에는 한국기독교양자회와 합병했다. 2011년 캄보디아 홀트드림센터, 2014년 몽골홀트드림센터, 2017년 네팔 홀트드림센터와 탄자니아 홀트드림센터를 각각 개설하는 등 해외로 사역을 점차 확대하고 있으며, 2017년에는 UN 경제사회이사회 특별협의 지위를 획득해 그 책임을 다하고 있다.10)

밥 피어스의 월드비전은 1955년, 스완슨의 컴패션은 1962년, 홀트의 아동복지회는 1964년 KAVA에 각각 가입했다. 이 외원단체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외원단체는 6·25전쟁이라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세워졌다. 둘째 설립자는 복음주의 교회의 목회자였거나 성도였다. 셋째 그들이 세운 외원단체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성장했다. 넷째 한국에서 시작했으나 국제조직으로 발전했다. 다섯째 원조를 받다가 원조하는 단체로 바뀌었다. 이상의 특징을 지닌 복음적인 외원단체들은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내재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시작했다. 6·25전쟁으로 고통받던 한국 사회와 교회는 미국 교회의 도움을 자양분 삼아 기력을 회복하고 재건할 수 있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jgh0347@hanmail.net>


1) Arthur C. Ringland, “The Organization of Voluntary Foreign Aid: 1939-1953”, The Department of State Bulletin (Washington: White House Press, 1953), 391.
2) David P. King, God’s Internationalist: World and Evangelical Humanitarianism (Philadelphia, PA: University of Pennsylvania, 2019), p. 37.
3) 위의 책, 44.
4) 위의 책, 46.
5) https://www.worldvision.or.kr/business/worldvision/kor_worldvision/history.asp
6) https://www.compassion.or.kr/about-us/about
7) 홀트아동복지회, 『홀트아동복지회 50년사』 (서울: 홀트아동복지회, 2005), 108-115.
8) 위의 책 122.
9) 위의 책, 159.
10) http://love.holt.or.kr/about/history


글 | 장금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로 박사 학위(Ph. D.)를 취득했고, 세계사이버대학 교목실장과 한민족연구소 소장, 명지대학교 사목으로 사역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 역사 관련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변화하는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운동>, <한국 사회 형성과 기독교 학교(공동)>, <해방 후 한국 정치와 기독교인(공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