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6·25전쟁 참전 결정과 기독교의 역할

미국의 6·25전쟁 참전 결정과 기독교의 역할

2021-06-05 0 By 월드뷰

월드뷰 JUNE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3


글/ 박명수(서울신학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대한민국의 건국과 전쟁의 위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안전한 나라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을 무너트려 한반도를 공산국가로 통일하려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시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다음 9월에 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라는 지시를 했고, 1946년 2월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한 뒤 3월에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11월에는 선거를 실시해 공산주의 체제를 확고하게 만들었으며,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해서 군대를 조직해 1948년 2월 8일 인민군 창설을 선포했다. 동시에 소련제 무기와 대포로 중무장해 잘 조직되고, 훈련된 모습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당시 미군 당국은 북한이 약 20만의 군대를 갖고 있다고 추측했다. 1948년 2월 10일에는 북한의 헌법 초안이 발표되었다.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정치 주체는 인민위원회이고, 수도는 서울이지만 우선 통일될 때까지 평양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국가의 문장은 ‘민주주의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문자와 벼 이삭과 철공업을 상징하는 도안인 낫과 해머’로 구성되었다. 소련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것은 대한민국이 세워진 다음인 9월 9일이었지만 이미 남한보다 먼저 단독으로 정부를 세웠으며, 그들은 대한민국이 뿌리내리기 전에 적화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남한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주는 가장 큰 힘은 주한 미군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승만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9년 6월 말에 미군 철수를 발표했고, 이에 북한에서 월남한 기독교인들의 염려는 매우 컸다. 그래서 1949년 6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 약 11만 명의 신·구교 기독교인이 모여 합동 국가 방위대회를 열고 미군 철수를 반대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대중집회를 개최했다. 여기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도 낭독되었지만, 미군은 계획대로 6월 말 철수하고 말았다. 1949년 초,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한국으로 온 길보른(Elmer Kilbourne) 선교사는 기독교인들의 집회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50년 1월에 쓴 글에서 ‘지금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를 제어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일반적인데, 한국에서는 공산주의가 정지되었으며, 이는 기독교 덕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에 같은 생각이었다. 1949년 11월,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부름바우(Thoburn T. Brumbaugh)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을 때, 한국에서 교회와 기독교의 활동이 어떤 중요성이 있는가를 물었다. 여기에 대해서 이승만은 “우리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적 발전에 관한 모든 희망을 기독교 운동에 둡니다. 그 밖의 어디에 우리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 운동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북한의 남로당은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벌이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이다. 여수에서 일어난 반란이 점차 지리산 지역으로 확산되자, 1949년 말 남원읍 서북교회의 김봉용 전도사가 서울로 올라와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지리산 전투지구에 특별 전도대를 만들어서 전도와 함께 선무 작업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여기에 앞장선 것이 한경직 목사와 선교사들이었다. 당시 한국 교회의 유일한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협의회는 1950년을 ‘구국전도의 해’로 정하고 구국전도운동을 시작했다. 점차 전국규모로 커진 이 운동의 대표는 한경직이었고, 각 교단의 대표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애치슨 라인과 한국전쟁


해방 이후 한반도의 운명은 유엔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연합군의 종전계획에 따르면 패전국은 승전국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고, 패전국의 식민지는 유엔의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협정으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관리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미·소공동위원회는 각자의 입장만 확인했을 뿐 합의가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자 1947년 가을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고, 1948년 유엔의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해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1948년 말에 열린 유엔 제3차 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되었다. 유엔은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법적인 기구이며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본질적으로 유엔의 관할로 간주했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은 워싱턴의 내셔널 클럽에서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로부터 일본을 거쳐 류구 열도에서 필리핀까지 이어진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이 유명한 애치슨 선언이다. 여기에 한국인들은 매우 놀랐다. 한국이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이어서 애치슨은 한반도는 원래 미국의 관할이 아니라 유엔의 관할이었고, 미국은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받아 남침하면 유엔의 결의하에 참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의 방어는 근본적으로 유엔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유엔의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한반도 방어에 반대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특별히 이승만은 여기에 대해서 크게 염려했다.


덜레스의 방한과 유엔의 참전 결의


미국은 한국의 염려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은 국무부 고문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강화회의를 위해서 일본을 방문하는 기회에 한국에 가서 이런 염려를 불식시키기를 원했다. 미국 공화당의 상원의원을 지낸 정치가이자, 신실한 장로였던 덜레스는 이미 유엔총회에서 한국 문제를 깊이 다룬 바 있는 베테랑 외교관이었다.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애치슨 선언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덜레스는 국무부와 상의해서 유사시에 미국은 유엔과 협의해서 한국을 지키겠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애치슨의 입장을 보완한 것이다. 덜레스가 한국에 도착하자, 선교사들은 덜레스를 초청해 한국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특별히 기독교의 현황을 알렸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델레스를 영락교회에 초청해서 당시 그곳에서 열리고 있던 월남 기독교인들의 기도 모임을 보게 했다. 이것은 덜레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그는 국회를 방문해서 미국은 결코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나중에 덜레스가 일본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곧바로 “소련군의 반격 위험이 있다고 해도 미군이 개입해야 한다. 만일 미국이 이것을 좌시하면 반드시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즉시 안보리에 이 문제를 회부할 것을 건의했다. 실질적으로 북한의 침략이 알려진 바로 그 날 25일(현지시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렸고, 유엔은 이것을 유엔에 대한 소련의 공격으로 이해했다. 오후 6시에 9:0으로 북한 당국의 무력사용으로 인한 평화파괴 행위로 결의한 유엔은 북한의 남침을 공식화했다. 이어서 27일(현지시각)에 유엔 안보리가 다시 모여 북한의 침략을 막아 낼 것을 결의하고, 7월 6일 유엔군 사령부 결성을 결의했다. 이런 과정에 소련은 참여하지 않았다. 덜레스와 미국이 가장 염려한 것은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제안에 반대하리라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당시 소련이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섰으므로 안보리 이사회에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아니라 모택동의 공산당 정부가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보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일부 학자들은 소련이 미군을 한반도에 끌어들여 유럽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려고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소련의 안보리 불참에 관한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어쨌든 안보리에 소련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이제 한반도는 미국 그리고 유엔과 운명을 함께하게 되었다.


미국의 참전 결의와 미국 기독교의 여론


미국이 그렇게 빨리 유엔을 끌어들여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 것은 트루먼의 국제정치 인식 때문이었다. 1946년 5월, 트루먼은 자신의 친구 폴리(Edwin Pauley)를 한반도에 보내 전쟁 이후의 배상문제를 조사하도록 했다. 여기에서 폴리는 한반도는 군사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이곳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역이며, 여기에서 미국이 소련에 진다는 것은 곧바로 민주주의가 공산주의에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여기에 동의하며 한국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의 공격에 계속 밀리고 있었다. 특히 동유럽의 공산화는 미국민들에게 공산주의가 얼마나 강력한 이데올로기인지를 알게 했다. 이것을 본 트루먼은 소위 봉쇄정책을 세웠지만 계속 소련에 밀리고 있었다. 1949년 모택동은 결국 장개석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중국의 공산화와 함께 선교사들은 철수해야 했고,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았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막는 것은 기독교를 지키는 것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6·25가 일어났고, 미국이 남한을 지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특별히 6·25 직전에 한국을 다녀간 덜레스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방송을 통해 미국민들에게 전달했다. 덜레스는 1950년 7월 1일 미국 CBS 방송에 출연해 월남 기독교인들과 6·25 전쟁의 관계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미국이 왜 한국전쟁에 참여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했다.


밥 피얼스와 빌리 그래함


덜레스가 미국 정부와 언론에 한국 기독교의 중요성을 설명했다면 밥 피얼스(Bob Pierce)와 그의 동료들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한국에 대해서 보고했다. 밥 피얼스는 1919년 3월 한국을 방문해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많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전도 집회를 개최했다. 이 전도 집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피얼스는 남한이 공산주의의 위협 아래 있지만, 남한의 기독교는 신앙으로 무장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을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한국을 알렸다. 빌리 그래함은 이미 1949년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을 들으며 스탈린과 공산주의는 미국 기독교가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이라고 말했다. 이런 빌리 그래함의 메시지는 미국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졌다.

6·25전쟁의 발발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촉각을 세우던 많은 미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의 공산화에 이어 한국까지 공산화된다면 미국은 안전한가? 당시 복음주의의 새로운 인물로 부상하고 있던 빌리 그래함은 7월 14일에 트루먼 대통령과 면담을 약속해 놓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복음화와 공산주의의 저지를 주요 과제로 생각했다. 그래함은 트루먼에게 전보를 쳤다. 빌리 그래함은 이 전보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트루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지금 공산주의와 마지막 결전을 벌일 것을 강력하게 권고함. 세계의 어느 지역보다도 인구비례 상 한국은 기독교가 많음. 우리는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음”이라는 전보를 보냈다.1) 빌리 그래함은 아마도 피얼스로부터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트루먼은 6월 30일 한국에 지상군을 파병하기로 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대통령 임기 중에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고 밝혔다. 빌리 그래함은 7월 14일에 트루먼을 만났다. 빌리 그래함은 트루먼에게 한국인들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고 있으며, 한국인들을 격려해 주라고 요청했다. 빌리 그래함은 또한 트루먼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 이런 시련을 미국이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2) 중국 기독교 역사가인 하가(Kai Yin Allison Haga)는 당시 미국 사회는 이승만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미국이 한국을 도와야만 하는 것은 이승만 정부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한국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문화적 접근이 성공했다고 평가한다.3)


NCC의 한국전쟁 관련 선언


전쟁이 일어난 다음 날, 한국기독교협의회 총무 남궁혁은 미국에 있는 국제기독교협의회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에 대규모의 군대가 남침하고 있으며, 미국으로부터 즉각적인 도움을 바란다는 전보를 보냈다. 여기에 대해서 미국 교회는 즉각적인 회의를 소집했으며, 유엔에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회신을 보냈다. 아울러서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유엔과 함께 미국도 한국 문제에 최선을 다할 것을 요청했다.

7월 9일부터 15일까지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WCC 중앙위원회에서도 이 문제가 다루어졌다. 1950년 7월 13일 중앙위원회에서 채택된 성명서 “한국 상황과 세계질서”에서 위원회는 가장 객관적인 UN 한국위원단의 보고서에서 이번 전쟁의 침략적 성격이 잘 드러났다고 지적한다.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보면 이번 전쟁은 북한의 군대에 의해서 비밀리에 준비되고, 시도되었으며 이 전쟁은 정교하게 계산되고 기획되었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앙위위원회는 유엔에 침략에 맞설 수 있는 즉각적인 행동과 이것을 수행하기 위한 경찰 규범(Police Measure)을 요구하는 한편, 각 정부는 유엔과 타협과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여기에서 WCC 중앙위원회는 유엔의 참전을 강력하게 요청하면서도 타협을 통한 문제해결을 주문하고 있다.

아울러서 이번 전쟁은 한민족이 분단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이번 전쟁이 “하나의 자유롭고, 통일되고, 독립적인 한국(a free, united, independent Korea)”을 만드는데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국전쟁과 미국 기독교


미국의 진보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교회는 다 같이 한국전쟁의 원인은 공산주의의 남침이며, 미국과 유엔이 참전해 북한의 남침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기독교는 한국 기독교인을 생각하며 미국과 유엔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와 단호한 전투를 주장한 데 반해, WCC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타협을 통해 이 전쟁이 해결되기를 원한다고 주장하며 한국전쟁에 대한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 같은 태도는 아직도 대북문제에서 나타나고 있다.

<mspark@stu.ac.kr>


1) Nancy Gibbs and Michael Duffy, The Preacher and Presidents: Billy Graham in the White House (New York: Center Street, 2007), 16. 밥 피얼스와 빌리 그래함에 관한 부분은 본인의 논문, “한국월드 비전의 배경과 창립과정” [한국교회사학회지] (2021년 4월)을 차용하였음.
2) Nancy Gibbs and Michael Duffy, The Preacher and Presidents: Billy Graham in the White House (New York: Center Street, 2007), 16. 밥 피얼스와 빌리 그래함에 관한 부분은 본인의 논문, “한국월드 비전의 배경과 창립과정” [한국교회사학회지] (2021년 4월)을 차용하였음.
3) Kai Yin Allison Haga, “An Overlooking Dimension of the Korean War”, 330.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다. 저서로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 정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