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건지신 하나님
2021-06-04
월드뷰 JUNE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 |
글/ 구재서(예비역 소장)
들어가는 말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족장 시대를 지나 민족을 이루면서 출애굽 과정에서부터 수많은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가히 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 주변국 즉, 블레셋, 모압, 에돔, 아람 등과 크고 작은 전쟁을 비롯하여, 강대국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과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 국가의 운명이 수없이 바뀌어 왔다.
대한민국도 5천 년 역사 가운데 천여 회에 가까운 전쟁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현대사에서 한국전쟁이 오늘의 대한민국에 끼친 영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모든 영역에서 실로 엄청난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전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한국전쟁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성경에서 전쟁의 승패는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다1)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단순히 병력이나 무기의 수량 즉 눈에 보이는 수치화된 전투력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수많은 전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한국전쟁 또한 그러하다.
한국전쟁 직전 남북한 상황
한국전쟁 발발 전 남북한의 유형 전투력 지수만으로 단순 비교하면 남한은 북한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병력 면에서 북한은 우리의 2배에 가까웠다.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더욱 차이가 난다. 당시 북한은 중국의 지원 아래 중국 내전에서 실전경험이 풍부한 조선족으로 구성된 부대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북한은 소련제 최신예 전차 240여 대를 가진 데 반해, 우리는 전차를 한 대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전투기는 어떤가? 우리는 북한의 1/10에도 미치지 못했다.
국제관계 등 외부적인 지원역량 면에서 남북한의 격차는 더욱 두드러진다. 북한은 김일성 정권 수립 직후부터 소련과 중국의 절대적 지원 아래 전쟁을 준비해왔다. 북한은 전쟁 승리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1948년 12월 북한 내 소련 점령군을 일방적으로 철수시키는 전략적 기만을 시행했다. 일부에서 ‘중국이 미국보다 늦게 한국전쟁에 개입했으며 한국군과 유엔군이 중국 국경선까지 진출했기에 중국이 참전했다.’라는 주장도 하지만, 이것 역시 완전한 기만에 가깝다. 1950년 5월 전쟁 직전에 모택동이 북경에서 김일성을 만났을 때 “우리는 약 7만 명의 조선족 중공군부대를 북한으로 이동시켰고, 약 40만 명의 병력을 이미 동북지역에 배치했으며 12만 명의 야전부대를 신속하게 북·중 국경선에 투입할 수 있도록 중국의 중앙지역에 위치하도록 명령했다.”2)라고 말했다. 반면에 대한민국은 미국의 극동방어선인 애치슨 라인3)에서 이미 제외되었고, 미군이 벌써 철수한 상황4)이어서 북한에 확실한 오판의 빌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남한은 북한을 제외하고 단독정부 수립과정 중에 정치적, 이념적으로 극심한 대립과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당시 군내 침투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제주도(9연대), 여수(14연대), 대구(6연대)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이의 진압에 많은 군 역량을 투입하고 있었다. 더욱이 군 수뇌부는 이런 국내외적인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인 1950년 농번기를 맞아 많은 장병이 휴가 및 대민 지원 중에 있었다. 그렇기에 북한이 침략한 지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게 되고, 전쟁이 일어난 지 1개월여 만에 낙동강 일대를 제외하곤 국토 대부분을 북한에 빼앗기게 되었다. 전쟁 초기 군사력을 포함한 여러 측면에서 남북한은 비교조차 안 될 정도였기에 이러한 초기의 충격적인 패전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전쟁 개관
당시 한국전쟁의 진행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첫째,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당시의 남북한 국경선 역할을 했던 38도선5)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38선뿐만 아니라 서울까지 빼앗기는 과정에서 제대로 반격다운 작전 한번 해보지 못하고 3일 만에 서울을 공산정권에 내주게 되는 수치를 겪었다. 일부 춘천전투 등 북한의 공격을 부분적으로 지연시키는 의미 있는 전투가 있었지만, 대세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둘째, 북한군이 낙동강 지역까지 일사천리로 밀고 내려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본에 있던 미군(미 24사단 예하 스미스 특수임무 대대)이 오산 근처에서 남하하는 북한군과 전투가 있었지만, 소련제 최신예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위력만 확인하는 정도였다. 셋째, 낙동강에서 고전하던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넷째,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전쟁이 발발한 지 3개월 만에 수복하고, 곧바로 38선을 넘어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초산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다. 다섯째,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개입(사실은 철저하게 사전에 준비된 개입)으로 서울을 다시 북한군에 내주게 되는 1.4 후퇴를 겪게 된다. 여섯째, 이후로 지루하고 짜증나는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대략 현재의 휴전선을 중심으로 한 크고 작은 전투가 휴전협정이 체결(1953년 7월 30일)될 때까지 2년여 동안 지속되었다.
전쟁 전후 남북한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그렇다면 한국전쟁 중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시고 역사하셨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려면 당시의 국제정세와 남북한 관계는 물론 국내외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전쟁이 발발했으며, 소련과 중국 그리고 UN군이 어떻게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전쟁 진행 과정에서 구체적인 전투와 전쟁 양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나 자료가 방대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에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평가 방법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전쟁 결과를 놓고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하심을 더욱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역사에서 남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상황, 즉 조국이 패하여 국가가 사라진 상황에서 과거 왕조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기록한 열왕기 상·하와 역대상·하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의 명확한 기준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역사의 평가자는 왕도, 나라도 아닌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들이 다윗의 길로 걸었느냐의 여부였다6).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향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1884년 최초의 선교사인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합법적 입국으로 조선 땅을 밟은 지 벌써 136년이 지났다7). 그동안 3천여 명이 넘는 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되었다. 전 세계 선교 역사상 한 나라에 그것도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선교사가 집중적으로 파송된 사례는 선교 역사상 흔치 않은 일이라고 한다. 그만큼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기독교 부흥과 성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한국의 부흥과 성장은 선교역사에 길이 남을 사례임이 분명하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역사도 있었지만, 공산정권이 북한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극심해지자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남으로 도피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면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율법을 교육하던 레위인들을 제사장직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핍박하자 이들 대부분이 남유다로 망명하게 된 사례와 매우 흡사하다8). 결과적으로 전쟁을 통해 북한은 기독교에 대한 완전한 탄압과 말살정책을 철저히 시행했고, 한국은 북한을 탈출한 많은 기독교인과 더불어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다. 아울러 기독교는 전쟁 이후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에서도 괄목할 만한 기여와 역할을 감당해 왔다.
이스라엘의 남북 분단 시기에 북이스라엘에는 9개 왕조 19명의 왕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여로보암과 아합의 길을 걸었다. 즉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철저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먼저 멸망하고,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말미암아 역사에 사마리아인이 등장하게 된다. 남유다에는 분단 기간에 유다 왕조에 22명의 왕이 있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들도 많았지만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등 다윗의 길을 걸은 왕도 있었기에 (하나님은 남유다를 궁극적으로는 심판하시지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어 남유다의 계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역사를 이어오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북한은 전쟁으로부터 지금까지 3대에 걸쳐 모두 여로보암과 아합의 길을 걸어왔다. 게다가 하나님의 위치를 김일성과 김정일이 차지했다. 어쩌면 북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길을 걸어왔다. 북한지역에 전쟁 전, 그 많던 교회와 십자가는 단 한 곳도 남아있지 않다. 대외 선전용 교회와 철저하게 지하에 숨어든 보이지 않는 교회만 일부 있을 뿐이다. 비록 대한민국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의 용사들이 계속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전 세계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남북한의 모습은 남북 이스라엘 왕조시대의 역사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한국전쟁에 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
한국전쟁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대한민국이 승리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서는 첫째, 4.3사건과 여순반란 사건이다. 당시는 이 사건으로 인한 극도의 혼란으로 군이 치명상을 입은 상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있었기에 군내 좌익 세력이 전쟁 전에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만약 전쟁 전에 좌익 세력이 드러나지 않고 이를 제거하지 못했다면,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전국에서 그들의 동시 봉기로 인해 한반도는 순식간에 적화되었을 것이다. 전쟁 전 군내에 숨어있던 좌익 세력을 제거했기에 전쟁 시 모든 역량을 오직 북한과의 전쟁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전쟁을 앞두고 사전 정비의 시간과 내부 역량을 결집할 수 있도록 여건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울 따름이다.
둘째, 북한은 서울을 점령한 후 약 3일 정도를 공격을 멈추고 서울에서 지체한다. 이는 전쟁에서 ‘공격 기세 유지’라는 차원에서 보면 대단히 큰 전략적 우를 범한 것이다. 당시 남한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보유한 북한이 만약 서울에서 ‘3일’을 지체하지 않고 공격 기세를 유지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남으로 밀고 내려왔다면 대한민국은 마지막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조차도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일성이 서울만 점령하면 전국적으로 좌익 세력에 의한 준동이 일거에 일어나 한반도 적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이를 기다렸다는 주장도 있긴 하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었다. 북한군이 3일간 지체한 사이에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포성이 울리는 가운데에서도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대대적인 미군 투입을 현장에서 결심한다.
셋째,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다. 미 합참과 해군, 유엔군사령부 모두 인천은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이고. 성공확률이 1/5000도 되지 못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이러한 불리한 조건과 큰 취약점이 오히려 적에게 전략적 기습을 달성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라며 과감하게 결단한다. 그 결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졌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북한은 대부분의 전력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상황에서 완전히 후방을 차단당해 보급선이 끊겼고, 생존을 위해 무조건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만약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힘든 전쟁이 되었을 것이고, 승리했을지라도 낙동강 전투에서 이미 너무나 큰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을 통해 완벽한 반전의 카드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넷째, 한국전쟁 발발 시 신속한 미군의 투입과 유엔군 파병 결정이다. 트루먼(Harry S. Truman) 미 대통령은 북한의 불법 남침을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쟁 발발 이틀 만에 미군의 참전을 결정하고 이어 곧바로 유엔 안보리를 소집했다. 당시 유엔 안보리 거부권을 가진 소련의 불참으로 전쟁 발발 3일 만에 유엔은 한국에 대한 군사력 지원을 결의하게 되었다9). 유엔이 창설된 이후 최초의 유엔군 파병이 결정된 것이다. 전쟁 발발 2일 만에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고, 3일 만에 유엔 차원에서 전격적으로 군사지원을 결의한 사례는 지금까지도 전무후무하다. 소련 대표의 유엔 안보리 결의 불참과 전쟁 발발 시 트루먼 대통령이 보여준 한국 방위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와 전광석화와 같은 신속한 조치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트루먼 대통령이 전쟁 이전에 한국 방위에 보여준 미온적인 태도와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다섯째, 유엔 안보리의 결의 이후 전 세계가 보여준 놀라운 한국전쟁에 대한 지원이다. 16개국이 전투병을 파병했고, 5개국이 의료지원단을 보냈으며, 39개국이 물자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즉 한국전쟁에 60개국이 지원한 것이다. 이는 세계 1, 2차 대전보다도 더 많은 국가가 대한민국을 도왔다는 것이다. 역사상 단일국가의 전쟁에 이러한 지원사례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맺음말
참새 한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려가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이루어질 수 없다. 하물며 역사에 수많은 인간의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전쟁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도 없고, 그 전쟁의 승패 또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달려있다. 이는 전쟁을 하나님이 일으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 모든 일의 배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악한 결과일지라도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를 이루어가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보아왔다. 한국전쟁의 원인으로 김일성의 정권욕, 북한 공산정권의 한반도에 대한 적화통일 야욕, 대한민국 내부의 요인, 전쟁 당시의 남북한의 전투력 격차, 국내외 정세와 주변국 상황 등 수많은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몇몇 예에서 보듯이 북한이 일으킨 한국전쟁은 거꾸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비 추모탑 벽면에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자유는 결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수많은 희생 아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마치 우리의 구원이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지만, 예수님의 엄청난 십자가 희생과 피흘림으로 이루어졌듯이 말이다.
“Our nation honors her son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조국은 결코 알지도 못한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부름에 응답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한국전쟁 참전비 바닥에 새겨진 글귀다. 우리는 이들 미군을 포함한 모든 참전 유엔군, 유엔 지원국, 선배 전우, 당시에 희생된 수많은 국민에게 너무나 큰 사랑의 빚을 졌다.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었다. 이제는 역사를 되돌아보며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의 빚을 갚을 때다. 한국전쟁 당시 희생하신 순국선열에게 경의를 표한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jakoo6334@gmail.com>
1) 삼하 17:47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이라고 말하고 있고, 역대하 20:15 하반절에서도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2) 데이빗 쑤이 저,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역, 『중국의 6.25전쟁 참전』(서울, 전략문제연구소, 서울) 117쪽
3) 1950년 1.12 미 국무장관 애치슨(Dean G. Acheson)이 극동지역에서 소련과 중국에 대비하여 미국이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방위선을 발표하여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배제되었음을 보여주어 북한의 남침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4) 주한미군은 1949년 1.15일 미 24군단을 해체하고 7,500명 정도의 1개 연대 전투단과 군사고문단만 잔류시킨 채 철수하였으며, 이 연대전투단마저도 6개월 뒤인 그해 6.30에 철수 완료하였다. 즉 전쟁 1년전에 이미 대한민국에는 군사고문단 외에 미군은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
5) 주한미군은 1949년 1.15일 미 24군단을 해체하고 7,500명 정도의 1개 연대 전투단과 군사고문단만 잔류시킨 채 철수하였으며, 이 연대전투단마저도 6개월 뒤인 그해 6.30에 철수 완료하였다. 즉 전쟁 1년전에 이미 대한민국에는 군사고문단 외에 미군은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
6) 역대하 34:2에는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나온다. 즉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 아니하고”
7) 1866년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가 미국 국적의 무역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들어온 것이 최초이나 합법적으로 들어온 것은 1984년 알렌 선교사가 최초이다.
8) 역대하 11:14에는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이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해임하고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9) 1950.6.25. 미국,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긴급소집
1950.6.26. 유엔 안보리 1차 결의안 채택(북한군 침공중단 및 철수요구)
1950.6.27. 미국 극동군 참전 결정(3개군단과 9개 사단 등 30만명)
1950.6.28. 유엔 안보리 2차 결의안 채택(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
1950.6.28.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 내한하여 한강방어선 시찰, 미 국방성에 지상군 파견 요청
글 | 구재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사 생도대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육군훈련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2019년 34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