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를 통해 본 6·25전쟁 개전 원인

사료를 통해 본 6·25전쟁 개전 원인

2021-06-03 0 By 월드뷰

월드뷰 JUNE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글/ 양준석(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교수)


6·25전쟁 개전 원인에 대한 논쟁


중화인민공화국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2020년 10월 23일 ‘항미원조 참전 7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6·25전쟁을 “미국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전쟁”으로 규정했고, “미국 정부는 국제 전략과 냉전 사고에서 출발해 한국 내전에 무력간섭을 하기로 결정했다”라며 미국의 6·25전쟁 책임을 강조했다. 중국 공산주의청년단은 “6·25전쟁은 북한이 한국을 침략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아니다”라고 답하며, “한 국가의 내전”이라고 주장했다. 6·25전쟁 발발의 성격을 내전으로 규정하며, 미국의 침략에 맞서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을 지원했다는 의미에서 항미원조전쟁으로 부르는 것이 계속되는 중국의 입장이다.

이러한 중국의 입장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가? 이에 대한 반론은 굳이 먼 곳에서 찾지 않더라도 중국 내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국 화둥사범대의 션즈화(沈志華) 교수는 1990년대 초 소련 정부 문서고에서 확보한 문서를 통해 6·25전쟁 발발원인을 규명했다. 김일성(金日成)이 6·25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스탈린(Joseph Stalin)과 마오쩌둥(毛澤東)의 협조를 구했으며, 김일성의 스탈린에 대한 남침 요청, 스탈린의 공격 결정, 마오쩌둥의 지원에 대해서 사료와 관련된 사실을 공개했다. 그의 연구내용은 2010년 환구시보(環球時報)에 공개될 정도였다. 하지만 2020년 11월 션즈화 교수의 6·25전쟁 관련 인터넷 생중계 강연이 도중에 중단되고, 정치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난받을 정도로 최근 중국의 6·25전쟁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다른 입장에 기초하고 있다.

1980년대 한국에서 6·25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을 주도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2013년 정전(停戰) 60주년 인터뷰에서 “나는 남침(南侵) 유도설을 말한 적이 없다”라며 “나는 수정주의자도 아니고 미국과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고 말한 적도 없다. 전두환 정권이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1985년부터 그렇게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커밍스는 소련 측 자료가 공개된 이후에도 “소련 측에서 나온 문서를 모두 가지고 있는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라며 6월 전투 개시에 있어서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를 확실하게 분석을 위해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고 그의 1997년 저서에서 주장했다. 소련 측 자료가 말해주는 6·25전쟁 개전 전후의 역사적 사실은 과연 6·25전쟁 개전의 원인을 규명하고 이해하기에 부족한 것일까? 또한, 중국의 주장대로 6·25전쟁을 내전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일까? 「러시아연방대통령문서보관소」의 6·25전쟁 관련 자료들은 이미 번역되어 자료집으로 출판도 되고(선인 201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해외사료총서), 여러 연구에서 그 의미가 소상하게 다루어졌지만, 전쟁의 원인에 대한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독자들께 환기하는 차원에서 정리해본다. 독자들은 소련 측 사료를 통해 재구성된 당대의 상황이 기존 연구의 지적처럼 6·25전쟁 개전 원인을 파악하기에 부족한 것인지 판단하길 바란다.


문서를 통해 밝혀진 김일성의 전의(戰意)와 국제 공조


1949년 3월 5일 김일성과 박헌영(朴憲永) 등 북한대표단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회담을 진행했다. 이때 스탈린은 38선 이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병력, 한국군 병력 등을 김일성에게 물어보며, 농담조로 “그들이 두려운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김일성은 두렵지는 않지만, 추가 병력이 필요하고 북조선군이 강하다고 답한다. 이 당시 스탈린은 미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한국 측에 침투시킨 간첩을 노출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3월 5일 이후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 침공과 무력에 의한 조선 통일에 관해 소련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으나, 스탈린은 “북한군이 남한군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라면서 김일성의 한국에 대한 선제공격에 대해서 부정적 반응을 나타낸다.

스탈린에게 남침계획을 보류당한 김일성은 1949년 4~5월에 조선인민군 정치국장 김일(金一)을 중국에 파견한다. 이 파견을 통해 북한과 중국이 남침에 대한 최초의 비밀협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1949년 5월 15일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일의 북경 방문결과에 대해서 김일성이 쉬티코프(Terentii Shtykov) 주북한 소련대사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은 김일이 중국에 간 목적은 중국인민해방군에 있는 조선인 사단을 인계받기 위해서였다고 밝힌다. 또한, 이 방문에서 마오쩌둥은 언제든 남북 간 군사충돌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김일성이 치밀하게 준비해야 함을 강조했다. 특히 마오쩌둥은 전쟁이 발생하면 “필요시에는 우리가 중국군을 좀 지원해 줄 수 있다. 모두 검은색 머리니까 중국 해방군인지 조선인민군인지 분간을 못 할 것”이라고 군사지원 의사를 분명하게 언급했다. 마오쩌둥은 북한에만 전쟁 지원 의지를 표출한 것이 아니었다. 1949년 5월 18일 북경주재 소련군사대표로부터 스탈린에게 전달된 문서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만약 조선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식료품과 무기를 제공할 것이며, 모스크바와 합의에 따라 1950년 초 국제정세가 조성된다면 북조선의 남침이 가능할 것이고, 이때 일본군이 상륙한다면 중국 정예부대를 파병해 ‘괴멸’시킬 것”이라 발언하며, 적극적인 한반도에서의 전쟁 의지를 표명했다.

1949년 9월 3일 주북한 소련대사관 참사관 둔킨(Grigory I. Tunkin)이 비신스키(Andrei Vyshinskii) 외상에게 보낸 암호문에서는 “만약 국제정세가 허용한다면 그때 인민군은 더 남쪽으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인민군이 2주 이내에 남조선을 점령할 수 있고, 길어도 2개월 이내에는 점령할 수 있다”라고 한 김일성의 발언을 전달했다. 9월 14일에 둔킨은 김일성의 남침 의욕에 대해서 “지금 북조선이 내전을 시작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하며 미국과 국제사회 개입 구실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개전 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러한 입장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공식화되었고, 주북한 소련대사에게 보내는 1949년 9월 24일 극비문서에는 북한은 아직 군사적 측면에서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군사행동이 시작될 경우 “전쟁이 지구적 성격”을 띨 것이고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내용을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엄격하게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1950년 1월 12일 국무부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미국의 방위선을 일본과 아시아 본토, 그리고 필리핀과 아시아 본토 사이 동쪽에 한정하기로 하는 새로운 미국 정책을 발표했다.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반도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특정한 신호로 파악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애치슨라인에 ‘한국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과 ‘한국을 제외한다는 내용이 없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구분했어야 했다.

1950년 1월 19일 쉬티코프 대사가 작성한 문서에서 김일성은 “중국이 이제 해방되었으니 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가 됐다”라고 말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은 공산주의자이고 공산주의 강령에 충실하기 때문에 스탈린 동지의 훈시는 곧 법이므로 스스로 남반부 공격을 결정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전쟁 개시 결정은 스탈린의 지시에 복종할 것임을 밝혔다. 이는 김일성의 전의가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전쟁 허가가 절대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시행할 수 없으며, 6·25전쟁의 국제공조적 성격을 입증하는 장면이다. 이후 국제적 조건 형성과 김일성의 강력한 전의를 확인한 스탈린이 1950년 1월 30일 “김일성 동무의 불만을 이해하지만, 그가 바라고 있는 남조선 해방문제와 같은 큰 문제는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김일성이 남조선 해방에 관해 회담을 원한다면 언제든지 만나 이야기할 의향이 있다”라고 언급한 문서에서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시작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모스크바에서 김일성과 스탈린. 국민일보DB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29822&code=23111111&cp=nv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전쟁계획을 협의했다. 이후 1950년 5월 10일 쉬티코프 대사의 문서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전쟁 준비를 위해 김일성이 비공식적으로 중국 방문을 방문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고, “조선은 평화적으로 통일되기는 불가능하고, 조선의 통일은 군사적으로 해야 하며, 미국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조선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직접 마오쩌둥을 방문했고, 1950년 5월 14일 소련 비신스키를 통해 스탈린의 필명인 필리포프(Филиппов)의 메시지가 베이징으로 전달됐다.

모택동 동지! 조선 동무들과 회담에서 우리 동무들과 본인은 국제정세가 변화했으므로 통일과업을 수행하겠다는 조선 동무들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 동무들이 함께 최종적인 결정을 해야 하며 중국 동무들이 찬동하지 않는다면 다시 조선 통일문제를 검토할 때까지 연기해야 한다는 단서 조건을 붙였다. 자세한 회담 내용을 조선 동무들이 모택동 동지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이로써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 사이의 6·25전쟁을 위한 국제적 공모는 완성되었다. 이후 6월 중순에는 세부적인 남침 일정을 김일성과 소련지도부 사이에 조율하는 내용이 소련 측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인민군에 대한 국제적 지원


1950년 7월 1일 스탈린은 탄약과 기타 무기에 대한 북한 측의 공급 요청을 7월 10일까지 모두 이행하라 지시했다. 7월 4일 쉬티코프 대사는 김일성이 요청한 무기 종류와 수량을 밝히고 있다. 소총 5만 정을 비롯해 자동총, 경기관총, 중기관총, 박격포, 유탄포, 고사포, 군용 화물자동차 등이었고, 이 무기는 보병 2개 사단, 상륙병 12대대 편성과 경찰 경비대 편성에 필요한 무기였다. 소련의 지원은 무기에 그치지 않고, 1950년 7월 8일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스탈린 동지께서 우리 인민들에게 베풀어주신 귀중한 원조에 대해 깊은 경의와 감사”를 전하며 “우리 군 간부들이 아직 현대적 군 지휘기술을 충분히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25~35명의 소련 군사고문들을 조선인민군 전선참모부와 2개 군단 참모부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부탁했다. 또한, 김일성은 1950년 7월 9일 해안 방어를 위해 수뢰(水雷) 2,000개 및 어뢰정 10척 등을 요청했다.

6·25전쟁 개전 직후 이남에서 전국적인 인민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김일성의 기대와 달리 신속하게 미군이 참전하고 유엔군이 결성되며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상태가 진행되던 1950년 8월 28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 내용은 성공적 전투 전개에 대한 축하, 전면적 전쟁에 승리하지 못하는 상황에 실망할 필요 없다는 독려, 그리고 항공전을 분산시키지 말고 전선에 집중하라는 전략지시였으며, “만약 필요하다면 조선공군을 위해 기습폭격기와 전투기를 추가로 더 보낼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 8월 31일 김일성은 스탈린의 전언을 그대로 받아썼으며, 대단히 감격했다는 내용이 평양에서 스탈린에게 보내졌다. 소련문서를 통해서 만으로도 소련이 전방위적이고 전폭적인 군사적 지원과 독려, 그리고 전략지시까지 수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련군은 제64 전투비행군단을 전쟁에 직접 투입했으며, 이재훈의 <6·25전쟁과 소련의 군사적 역할> 연구(2010)에서는 소련문서를 통해 파악한 1952년 5월 1일 기준 소련공군의 북한지원 현황이 나타난다. 군단 예하 3개 전투비행사단, 1개 독립 야간 전투비행연대가 보유한 항공기는 MIG-15 225대와 LA-11 20대 등 도합 245대였으며, 3개 비행사단 소송 조종사는 313명이었다. 또한, 참전 기간 소련전투기와 고사포병에 의해 총 1,309대의 적기를 격추했으며, 그중 1,097대가 전투기에 의한 격추였다고 소련문서는 밝힌다.

소련이 전쟁에 대해 간접적 그리고 제한적 직접 방식으로 군사지원을 진행한 것 외에도 중국 인민지원군의 북한지원은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앞서 마오쩌둥과 김일이 협의한 1949년 4~5월 문서에서 알 수 있듯 북한은 중국공산당 팔로군(八路軍)의 조선인 사단을 넘겨받아, 조선인민군 제5, 6사단에 귀속시켰다. 이미 국공내전에서 숱한 전투를 경험하며, 조선인민군의 3분의 1 규모를 차지한 이들은 서울을 점령하고 급속한 속도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군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고, 제6사단의 기동은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에게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6·25전쟁에 투입된 중국 인민지원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3년 동안 연인원 500만 명이 동원됐다는 기록부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는 60만 명 이상, 또한 여러 기존 연구에서는 135여만 명으로 추산한다. 중국의 항미원조기념 홈페이지에서 집계하고 있는 사상자는 36만 명, 사망자 숫자만 17만 명으로 이러한 참전 규모를 고려할 때 전쟁의 성패를 결정할 수 있는 압도적인 규모였다고 볼 수 있다.


맺으며


6·25전쟁의 개전 원인에 대한 자연발생적 성격은 앞서 살펴본 소련의 공개 자료와 많은 국내외 학자들의 지난한 연구를 통해 부정되거나 재고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은 “항미원조전쟁(6·25전쟁)은 정의의 승리(시진핑, 2020년 10월 19일),” “미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항거하고 북조선을 도운 정의로운 항미원조전쟁에서 승리(시진핑, 2017년 8월 1일)”라고 언급했다. 이 같은 중국의 입장은 미국의 참전에 따라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1950년 10월 이전까지는 한반도 내전, 이후부터는 항미원조전으로 구분하며, 전쟁의 원인을 한반도의 국내적 상황과 미국에 돌리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역사 인식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부터 전쟁 지원 의지를 강하고, 분명하게 밝혔다. 스탈린은 개전 결정 후 전쟁의 마지막 검토를 마오쩌둥에게 맡겼고,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회담한 후 전쟁을 개시했다. 소련에서 공개된 “부족한” 자료들은 김일성의 격동적 전의, 스탈린의 차분하고 전략적인 전쟁 결정과 체계적 지원, 모택동의 확신에 찬 전쟁 지원 입장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이들의 국제적 공모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chirir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