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일 제독과 6·25 전쟁
2021-06-02
월드뷰 JUNE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OVER STORY |
월드뷰에서는 2021년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자이자 국가안보에 크게 이바지한 손원일 제독을 커버스토리 인물로 선정했습니다. 해군 작전사령관을 역임한 이기식 예비역 해군 중장을 모시고 손원일 제독의 업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인터뷰는 아덴만의 영웅 조영주 제독이 수고해 주었습니다(편집자 주).
조영주: 이기식 제독님, 바쁘신 가운데에도 뜻깊은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간단한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기식: 반갑습니다. 저는 예비역 해군 중장 이기식입니다. 1981년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 후 해군 장교로서 36년간 국가방위와 조국 해양 수호에 헌신했으며, 2017년 1월 해군 작전사령관 보직을 끝으로 전역했습니다. 군 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직책은 정예 호국 간성을 양성하는 해군사관학교 교장으로 근무한 것입니다. 특별히 많은 위험이 도사리는 해·육상 군 복무 중에서도 아무런 사고 없이 국가에 헌신하고 명예롭게 전역할 수 있도록 저를 지키시고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전역한 이후 현재는 광림교회 군 선교위원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조영주: 해군의 공식자료에 의하면 손원일 제독은 해방 직후 민간인 신분으로 해군을 창설하고, 이후 초대 해군 참모총장으로서 해군발전과 조국 해양 수호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가장 궁금한 점은 해방 직후 대다수 국민이 해양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는데 손원일 제독께서는 어떻게 30대의 젊은 나이에 조국 해양 수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으로 헌신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와 배경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기식: 손원일 제독은 조국 해양 수호에 관심을 넘어 사명감을 갖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사실 손원일 제독의 조국 해양 수호 정신은 부친이신 손정도 목사의 영향이 지대했습니다. 손정도(1872년~1931년)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역임하신 독립운동가 중 한 분으로서 평소 목회를 통해 복음은 물론 청년과 학생들의 애국애족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바다에 미래가 있다. 비록 지금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처지에 있지만 언젠가 독립의 그 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 나가야 한다.”라고 강조하면서 해양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손원일 제독은 이러한 손정도 목사의 장남으로 경술국치 1년 전인 1909년 평안남도 증산면에서 태어나 부친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부친을 따라 중국에 거주하던 중 상해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진학해 바다와 인연을 맺었고, 졸업 후에는 외국을 항해하는 상선에서 근무하며 항해술을 익히고 국제적인 견문을 넓히며, 해군력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손원일 제독은 조국의 광복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귀국해 조국의 바다를 지킬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대한민국 해군 창설’을 결심하시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와 인사들을 규합해 1945년 8월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토대인 ‘해사대(海士大)’를 결성했습니다. 이후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미군정청과 원활한 협의를 거쳐 마침내 1945년 11월 11일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습니다. 이후 해방병단은 해안경비대로 개칭되었으며,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해군에 편입되어 해군 창설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실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애국애족의 해양 선각자 손원일 제독을 예비하시어 바다를 잊어버린 한국인들이 이루기 힘든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꿈을 3군 중에서 가장 먼저 이루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해군병 학교로 불리던 해군사관학교도 손원일 제독을 통해 3군 중 가장 먼저 창설하게 하시어 조국 해양 수호에 이바지할 우수 인재를 양성할 수 있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조영주: 예, 그렇다면 손원일 제독께서는 독립운동가의 아들로서 해군 창설의 주역이 되기까지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힘든 성장 과정을 극복하고 지도자로서 필요한 자질과 재능을 갖춤과 동시에 가족들의 많은 도움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에 관해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기식: 손원일 제독은 부친이 독립운동가로 헌신하였기에 그에 따르는 많은 고난과 역경을 함께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2달 동안 옥고를 치르며 받은 극심한 고문으로 평생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손원일 제독은 이러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의 독립과 해양 수호에 기여하는 인재가 되고자 자신을 연단하고 이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실력을 갖추었습니다. 이러한 손원일 제독 개인의 노력에 더해 부친이신 손정도 목사의 가르침과 부인인 홍은혜 여사의 내조가 해군 창설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먼저 손원일 제독은 아버지 손정도 목사로부터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애국애족과 독립정신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런데 손정도 목사가 기독교 신앙인이 된 계기는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중 우연히 머물렀던 숙소가 미국 선교사 집이었는데 잠시 머무르는 중 선교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진학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하니 손원일 제독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손정도 목사는 손원일 제독을 위시한 자녀에게 ‘걸레의 삶’을 강조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 “비단옷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걸레는 하루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되니 결코 없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나는 걸레와 같은 삶을 택해 불쌍한 우리 동포들을 도우며 살겠다.”라고 말씀하시고 몸소 실천하셨다고 합니다. 손원일 제독의 부인이신 홍은혜 여사님과 관련된 일화도 헤아릴 수 없지만,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홍은혜 여사는 권사 직분을 받은 신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습니다.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후 손원일 제독과 결혼했으며, 이후 독립운동가의 며느리로, 해군 창설의 꿈을 지닌 가난한 젊은 애국청년의 아내로 모든 고난과 역경을 손 제독과 함께했습니다. 홍은혜 여사는 갖은 역경 속에서도 남편과 함께 해군 창설의 꿈을 함께 이루어가는 든든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음악인으로서 전문성을 살려 대한민국 해군 장병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해군 최초의 군가인 ‘바다로 가자’와 ‘해군사관학교 교가’를 비롯한 수많은 군가를 작곡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해군에 전투함이 한 척도 없는 상황에서 해군부인회 회장으로서 동료 부인들과 함께 삯바느질과 바자회를 통해 성금을 마련해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구매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특히 6·25전쟁이 종료된 이후에는 상이군인들을 보살피고 전쟁미망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등 손원일 제독의 위국헌신의 삶을 뒤에서 보이지 않게 든든히 내조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앙인으로서 손원일 제독이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해군을 창설하고 6·25전쟁에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헌신하기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눈물로 간구한 것은 손 제독과 대한민국 해군 모두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조영주: 손원일 제독의 해군 창설과 관련된 뜻깊은 일화가 궁금합니다. 해군의 역사자료에 따르면 손원일 제독은 해군 창설일을 1945년 11월 11일로 정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고, 특정 사건을 계기로 해병대를 창설했습니다. 또 창군 후 전투함이 한 척도 없는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해군 자체적으로 성금을 모아 미국으로부터 전투함을 구매하고, 북한의 기습 남침이 발발하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했습니다. 이런 일화와 관련된 세부 내용이 매우 궁금해지는데요, 이에 대해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기식: 손원일 제독의 해군 창설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 중에서 질문하신 3가지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손원일 제독은 그토록 꿈꾸던 해군 창설과 관련해 장차 해군에 뿌리내려 면면히 이어져 내려가야 할 해군 정신을 해군 창설일에 담기로 의도했습니다. 그래서 1945년 11월 11일을 해군 창설일로 정하고 서울 종로구 관훈동 옛 충훈부 건물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했습니다.
당시 손원일 제독이 해군 정신으로 삼은 것은 “신사 중의 신사가 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사가 되자는 의미는 “정직한 군인, 즉 기독교 정신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한 기독교 장교(Good Christian Officer)가 되자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내포한 날짜가 11월 11일인데 11월 11일은 한자로 표기(十一월 十一일)하면 선비 사(士)가 두 개가 됩니다. 따라서 해군 정신을 해군 창설일에 담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11월 11일은 1894년 조선 수군이 폐지된 날로써 그날의 아픔을 대한민국 해군의 부활로 극복하고자 하는 애국 충정의 마음도 함께 담았다고 하니 해군 창설일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옴을 느낍니다.
다만 우리 젊은이들이 11월 11일을 해군 창설일 보다는 ‘빼빼로 데이’로 기억해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종로구 안국역에서 인사동 거리 입구 방향으로 옛 조선 충훈부가 위치했던 곳에 “해방병단 결단식 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길을 지나면서 한 번쯤 손원일 제독과 해군 창설자들의 조국 해양 수호 결의를 기억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과 관련해 손원일 제독은 여순 반란 사건 등 여러 군사작전을 경험하면서 바다를 통해 육지에서 작전하는 육전대, 즉 해병대의 필요성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해군 신현준 중령을 해병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해군 장병 380명을 선발해 1949년 4월 15일 진해에서 해병대를 창설했습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이후 무적 해병과 귀신 잡는 해병의 칭호를 얻으며 국가방위와 국위 선양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구매 일화는 국민 여러분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원일 제독은 해양 선각자들과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했지만, 당시 보유하고 있던 군함은 미국으로부터 인수한 소해함 등 30여 척의 비 전투함이 전부였고, 우리 정부에서도 전투함을 제공해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무력 남침 위협은 점차 고조되었습니다. 이에 손원일 제독은 조국의 해양을 수호하기 위해 해군 자체적으로 전투함을 구매하기로 하고, 전 해군 장병들과 뜻을 모아 박봉을 털어 성금 모금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손 제독의 부인인 홍은혜 여사도 해군 부인들과 힘을 합쳐 성금 모금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이러한 해군의 애국 운동에 감동한 국민과 이승만 대통령이 후원에 동참해 모금된 총 12만 달러를 가지고 즉각 미국으로 건너가 3인치 함포를 장착한 500톤급 전투함 4척을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손원일 제독의 구국의 염원이 하늘에 닿기라도 한 듯 그중 한 척인 백두산함이 전쟁 발발 수 주 전에 한국에 도착했고, 6·25전쟁 이튿날 새벽, 부산 앞바다에서 북한 특수부대 600여 명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침투 중인 북한군 수송선을 발견하고 이를 격침하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만약 북한군 특수부대가 상륙해 부산을 장악했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공산화되어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민국 군에서는 백두산함의 쾌거를 “대한해협 해전”으로 명명하고 현재까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국가의 운명을 구한 해전 승리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소중히 기리고 있습니다.
조영주: 또한 손원일 제독은 해군 참모총장으로서 맥아더 장군과 함께했던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어떠한 모습과 활약을 보여주셨기에 이러한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실제 사례와 함께 세부 내용을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기식: 손원일 제독은 평소 누구보다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해군 참모총장으로 취임하게 되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얼을 잇는 후예로서 자신이 직접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삼가 이 몸을 바치나이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손원일 제독이 인천상륙작전 현장에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 군인으로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군인의 귀감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무수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심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상륙작전 지역인 인천과 수도권 일대의 북한군 정보 수집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손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 중에서 정예 요원을 선발해 상륙작전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수집해 맥아더 장군에게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륙작전을 개시할 여건이 갖추어졌음을 알리는 팔미도 등대의 불을 점등(點燈)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드디어 대한민국 해병대 요원이 상륙주정에 탑승해 인천 월미도에 상륙을 개시하자 손원일 제독은 안전한 미군 상륙함 지휘소에 있는 대신 자신도 상륙주정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적의 포탄을 뚫고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까지 현장에서 해병대 요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적탄에 의한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행하던 부관은 안타깝게도 적탄에 의해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렇듯 작전 현장에서 손 제독은 유엔군 사령부가 주도하는 인천상륙작전의 대한민국 최선임 지휘관으로서 유엔군 지휘관과 직접 접촉하며 조속한 수도 서울의 탈환과 피해 최소화를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대한민국 해병대가 수도 서울 탈환의 최선봉 부대가 되도록 맥아더 사령관을 설득했고, 마침내 대한민국 해병대가 가장 먼저 서울에 진입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전쟁으로 인해 절망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또한, 수도 서울 탈환 작전에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측은 우군의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서울에 대해 강력한 폭격을 하고자 했으나 손원일 제독은 우리 국민과 서울의 피해를 막고자 해병대를 직접 이끌고 최전선에서 서울 진군에 앞장섬으로써 유엔군의 폭격을 최소화하고 서울을 안전하게 보호했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발발한 지 3개월이 지난 9월 28일 해병대를 비롯한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공산 침략자의 손에서 구해 냈고, 손원일 제독은 서울에 입성한 한국군 최고 선임자로서 당당히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회복했다’라는 포고문을 해군 참모총장 명의로 서울 시민에게 발표했습니다.
손원일 제독은 해군을 넘어 대한민국 국군을 대표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 군인의 표상’으로의 삶을 실천했으며, 이러한 모습은 아직도 우리 군 후배들의 가슴에 살아 숨 쉬며 길이 계승되고 있습니다.
조영주: 특별히 손원일 제독은 6·25전쟁 중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미8군 사령관과 깊은 유대관계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 중 군 지도부 내에서 손원일 제독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고, 그 위상 또한 매우 높았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와 관련해 당시 군 주요 인사들의 인적 사항과 함께 손원일 제독의 위상을 보충 설명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기식: 6·25전쟁 중 우리 군을 지휘하던 각 군의 참모총장들은 해군의 손원일 제독, 육군의 정일권 장군, 공군의 김정렬 장군이었습니다. 세 분 참모총장은 막중한 전쟁을 책임지는 사람들로서 가장 연장자였던 손원일 제독의 제의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의형제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군 최고 지도부는 일심동체로 전쟁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국가의 운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 분의 우정은 손원일 제독을 중심으로 서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세 분의 참모총장님과 함께 전쟁을 수행하던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도 한국군 참모총장들과 함께 의형제가 되어 손원일 제독님을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전쟁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음은 물론이고, 종전 후에는 한국군의 발전을 위해 지한파로서 큰 역할을 담당해 주었습니다.
손원일 제독은 한국군의 최연장자로서 한국군은 물론 미군 지휘부에 이르기까지 긴밀한 유대와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합동 및 연합작전을 원활히 수행해 전쟁 승리와 한국군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조영주: 손원일 제독은 전쟁을 수행하는 도중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국방부 장관 보직과 대장 진급을 제안받았으나 먼저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이를 정중히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와중에도 군종 제도 도입 등 국가와 군 발전을 위해 남다른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손원일 제독의 모습은 후배 군인들에게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한 데, 이기식 제독께서 이에 대해 아시는 데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기식: 평소 손원일 제독의 참 군인으로서 자세와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손 제독을 대장 승진과 국방부 장관 직책을 통해 우리 군에 더욱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제의를 받은 손원일 제독은 자신이 목숨을 바쳐 창설한 해군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고, 해군의 규모와 한미 연합작전 지휘체계 구조상 대한민국 해군 참모총장은 3성 장군이 적합하다는 판단으로 개인의 영예를 구하지 않고 국방부 장관과 대장 승진을 정중히 거절했던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손원일 제독은 군 신앙전력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삼군 중에서 가장 먼저 군종 목사를 시작으로 군종 업무를 해군에 도입해 장병의 정신전력 강화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이후 군종 제도는 우리 군에 성공적으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또한, 6·25전쟁 중 해상초계기와 디젤엔진을 자체적으로 제작해 해군작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당시 피난 중이던 의사를 비롯한 각 분야의 전문가를 국가의 인재로 안전하게 보호함과 동시에 전쟁 수행에 필요할 경우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삼가 이 몸을 바치나이다’라는 표어를 삶으로 실천하며 국가와 해양 수호를 위해 헌신한 손원일 제독의 참 군인으로서 모습은 후배 군인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영주: 손원일 제독은 정말 훌륭한 군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제독님,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직전에 이르러 손원일 제독께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거듭된 국방부 장관 보직 제안을 더는 물리칠 수 없어 마침내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해 약 3년 동안 국방의 대전환기에 막중한 중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관련해 손원일 제독께서 제5대 국방부 장관으로서 이룩한 주요 업적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기식: 손원일 제독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창설한 대한민국 해군이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이 남아있다고 판단하고 사랑하는 해군을 위해 국방부 장관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되어갈 무렵 대한민국 국군 발전을 위해 손 제독을 국방부 장관으로 발탁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거듭된 제의에 결국 제5대 국방부 장관에 취임했습니다. 이후 국방부 장관으로서 3년여 기간 동안 손원일 제독이 남긴 업적은 가장 먼저 휴전협정에 강력히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 사이에서 원만한 정책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즉, 미국에는 휴전협정 성사라는 선물을 제공하는 대신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세계 패권국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후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의 안보를 보장할 수 있도록 국방부 장관으로서 한국과 미국이 원만한 타협에 이르도록 중재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후 공산 침략자의 재침략에 대비해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를 받고자 한국군 군사원조 사절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방미를 거듭한 끝에 탁월한 협상력을 발휘해 7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끌어내 한국군 전력증강 및 현대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정일권 전 국무총리는 회고록에서 “7억 달러의 군원(軍援)을 얻어낸 데는 손 제독님의 원만한 성품과 인간적 매력에 흥미를 느낀 닉슨 부통령과 윌슨 국방부 장관의 도움이 컸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군 전후 재건과 발전을 위해 국방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한편 연합참모본부를 설치해 육·해·공군 간 합동작전 능력의 증진과 함께 육군 제1군사령부의 창설, 그리고 대대적인 해·공군부대의 증설과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범국민적인 국가안보 의식을 높이기 위해 국군의 날과 현충일을 제정했으며, 동작동에 국군묘지 즉 현재의 국립현충원을 설치해 순국선열의 나라 사랑 정신과 헌신을 후대가 계승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평소 강조했던 인재 양성을 위해 국방대학교를 창설하고 국내·외 위탁교육제도를 신설했으며, 삼군의 화합발전을 위해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를 신설해 연례행사로 개최했습니다. 손원일 제독은 한국군의 전환기 국방부 장관으로서 불가피한 휴전협정 체결을 조건으로 전후 대한민국 안보를 보장하는 토대가 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막대한 미국 군사원조 획득, 대한민국 국군의 재건과 국방력 강화 및 군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조영주: 이후 손 제독님은 2년여 초대 서독대사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으며, 5·16군사정변 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외무부 장관 입각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는 대신 제7대, 8대 한국 반공연맹 이사장과 초대 한국 홍보협회장 직책을 수행하며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손원일 제독의 삶을 지켜본 노산 이은상 시인께서는 손 제독께 수향(水鄕)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습니다. 손 제독의 아호 수향이 어떤 의미이고 노산 이은상 선생님께서 어떤 취지를 담아 아호를 지었는지, 그리고 현재 해군에는 손원일 제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수향이라는 아호와 함께 손원일 제독의 존함이 어떻게 해군에 계승되고 있는지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기식: 당시 충무공 사상 연구소 이사장이었던 노산 이은상 선생님은 손원일 제독의 애국 헌신의 삶을 직접 목격하며 수량(水鄕)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습니다. 노산 선생님에 따르면 수량이라는 아호는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이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진정한 후예로서 손 제독의 고향은 물이고, 물이 없으면 손 제독은 죽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손원일 제독은 서독대사를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한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관 제의 등에 일절 응하지 않고 제2선에서 묵묵히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 삶을 사시다 1980년 만 71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기었습니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손원일 제독을 해군의 창설자이자 해군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으며, 해양 수호의 정신과 참 군인의 자세를 본받아 나가고자 진해기지사령부 입구에 진해만을 내려다보는 손원일 제독의 동상을 세워 해군 장병들이 본받도록 했습니다.
또한, 손원일 제독의 자주적인 해양 수호의 정신을 이어 나가고자 국내기술로 제작한 세계 최고 수준의 214급 디젤 잠수함을 ‘손원일급 잠수함’으로 분류하고 1번 함을 손원일함으로 명명했습니다. 더불어 미래 해군의 주역인 대한민국 해군 사관생도들에게 손원일 제독의 해양 수호 정신을 계승하고자 4년의 생도 생활을 마친 졸업반 생도 중 가장 모범적이고 우수한 사관생도에게 ‘원일상’을 수여하고 사관생도들이 손원일 제독을 본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조영주: 끝으로 북한의 무력도발 위협과 함께 미중 패권 경쟁으로 인한 동아시아 역내 국가의 해군력 군비경쟁과 해양 국익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한 우발상황에 대비한 지속적인 해군력 발전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급변하는 안보 상황에 대응해, 이기식 제독님께서는 우리 해군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국가안보와 해양 국익을 수호하는 보장자로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인지, 해군 최고 전문가로서 고견을 말씀해 주시고, 이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당부의 말씀이 있다면 마무리 발언으로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기식: 대한민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둘러싸인 동북아시아의 반도국으로서 특히 남북한이 분단된 상황에서 국가안보와 번영을 전적으로 해양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국제교역은 99% 이상이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에너지, 원자재, 식량과 유사시 군수품 등이 모두 바다를 통해 들여오므로 해상수송로는 전·평시 대한민국의 사활적인 국가이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 아시아-태평양 시대를 맞이한 동북아시아의 해양 안보 환경은 미·중 간의 패권 경쟁의 심화와 함께 해양의 도서 영유권과 경계 확정, 그리고 해양 자원확보를 둘러싼 국익을 두고 관련국들이 첨예한 대립으로 갈등 관계가 심화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국가 간 분쟁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안보 환경 속에서 국가의 생명선인 해양 수송로를 든든히 지키고 유사시 어떤 외부세력으로부터 우리 해양 국익을 침해하는 도발을 즉각 물리칠 수 있도록 강한 해군력을 갖추는 것은 한반도 반만년 역사의 교훈이자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손원일 제독께서 몸소 실천해 우리에게 보여 준 강력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군력은 우리가 원한다고 하여 짧은 시간에 갖출 수 있는 군사력이 아닙니다. 따라서 거안사위의 자세로 미래의 위협을 내다보는 선견지명과 통찰력을 토대로 해군력을 건설해 나가는 것이 필요한데, 국내정세는 아직도 우세한 대륙 사상으로 대한민국의 미래 생존과 번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항공모함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 사업을 정치적 논란으로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이에 우리 국민 여러분께서는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강한 해군력을 갖추어 침략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해양을 통해 북한의 침략을 물리친 손원일 제독의 애국정신을 기억하시어 우리 해군이 앞으로 다가올 해양으로부터 위협에 대응해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할 수 있는 강한 해군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큰 힘과 성원을 보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조영주: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