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사랑
2021-05-25
월드뷰 MA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
글/ 조혜경(작가)
엄마의 사랑이 평생 아빠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엄마는 아빠를 많이 사랑하셨다. ‘당신을 사랑해요’라든가 ‘엄마는 아빠를 사랑한단다’라는 말씀을 우리 자녀들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엄마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엄마의 평소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아빠를 끔찍이 위하시고, 지극정성 공경하셨다. 성품처럼 조용히 그림자처럼 언제나 아빠 옆에서 아빠의 충실한 내조자요 지원자가 되셨다.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두 분이 큰 소리로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외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평생 한 요에서 다정하게 주무셨다.
아빠 역시 엄마를 많이 사랑하셨다. 엄마와 달리 아빠는 약주라도 한잔하신 날이면 마치 도장 찍듯이 말씀하시곤 했다. 약간 혀가 꼬이는 아빠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
“아빤 이 세상에서 엄마 최고로 좋아하고, 그다음엔 딸내미 최고로 좋아하고… 하하하!”
말씀으로만 그러시는 것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이면 집으로 전화하셔서 ‘저는 지금 점심 먹으러 나갑니다. 맛있게 식사하시오’라며 혹 혼자서 식사할 엄마를 챙기시는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신혼 때 용감하게도 두 분의 결혼 패물을 어려운 친구에게 쾌척한 이력이 있는 아빠는 연세 드신 후 그 일에 대해 속죄하신다며 용돈을 모아 결혼기념일마다 엄마에게 팔찌며 목걸이, 반지를 선물하시곤 했다. 두 분의 금슬이 두터운 것은 우리 자녀뿐만 아니라 집안의 친지들도 다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내가 어릴 때는 잔치를 집에서 했다. 환갑잔치나 결혼식 피로연 때 일가친척들이 함께 모여 푸짐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마시며 식사 후에는 교자상을 앞에 놓고 한바탕 여흥을 즐겼다. 외할머니께는 다섯 분의 남동생이 계셨다. 할아버지 중에는 지금도 최고로 치는 대학을 나오신 수재들도 계셨는데 모두 ‘재주’와 ‘끼’가 많아 잔치의 여흥을 주도하셨다. 한 분이 손부채로 교자상을 치시며 창을 시작하시면 다른 분이 장구로 박자를 맞추시고, 한 분이 ‘깽깽이’라 불리는 악기로 한바탕 흥을 돋우시면 다른 분이 등에 작은 베개를 집어넣고 꼽추 춤을 추기도 하셨다. 잔치의 사회는 늘 이모부가 맡으셨는데, 이모부는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분이셨지만 그 자리에서만큼은 계급장 다 떼고 그저 할아버지들이 맘 놓고 부르는 ‘김 서방’이 되어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로 좌중을 흥겹게 해주셨다. 할아버지들의 놀이 한바탕이 끝나면 이모부가 지목하는 정해진 순서는 엄마의 노래였다. 엄마는 부끄러워하시며 사양하시다가 마침내는 약간 고개를 숙이시고 부르셨다. 고운 목소리로 부르는 엄마의 노래는 늘 똑같았다.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 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 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누가 들어도 아빠를 향한 사랑의 노래였다. 아빠가 말로 사랑을 확인해주었다면 엄마는 노래로 화답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가 옛 애인(?)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처음 ‘그분’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가 대학생 때였다. 엄마의 앨범을 정리해드리다가 전문가의 솜씨가 느껴지는 엄마의 독사진을 많이 보게 되었다. 아빠의 솜씨는 분명 아니었다. 아빠는 형광등 하나도 바꿔 낄 줄 모르고, 벽에 못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분이셨다. 하물며 예민한 렌즈를 만져 좋은 구도를 잡아냈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멋진 사진들을 누가 찍어주었는지 묻자 엄마가 그분에 대해 말씀하셨다. ‘고향 오빠’라고 하셨다. 사진 찍는 것이 취미였다는 그분은 경치 좋은 곳에 엄마와 함께 가 많은 사진을 찍어주었다고 했다. 같은 풍경 다른 사진에 엄마와 열아홉 살 차이 나는 막내 이모가 늘 함께 찍혀 있었다. 집안이 서로 잘 알고 지내는 고향 오빠라, 남자 형제가 없는 엄마는 정말 오빠처럼 따르며 허물없이 지냈지 엄마를 그렇게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다고 했다. 적극적인 아빠의 구애를 받고 엄마가 아빠와 약혼을 했다고 하자 비로소 그분은 엄마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셨단다. 파혼해 달라고, 그리고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애원하셨단다.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며칠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울면서 엄마를 자신에게 달라고 간청하셨다고 했다. 당시 그분에 대한 엄마의 말씀을 나는 앨범의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사실 좀 건성으로 들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하실 때 엄마의 목소리라든가 엄마의 표정 같은 것은 기억에 없다. ‘그분이 엄마를 그렇게 사랑하시는지 알았다면 엄마는 그분과 결혼했어?’라고 묻지도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울며 간청했다는 그분의 때늦은 구애보다 적시에 홈런을 친 아빠의 선방에 응원을 보내며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서양 속담을 떠올리지 않았나 모르겠다. 앨범 사진은 이어 엄마의 결혼식 사진으로 넘어갔기에 화제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그분의 이야기를 다시 들은 것은 내가 결혼하고 해외에서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몇 해 후였다. 내가 귀국한 그해 겨울,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다음 해 5월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은 두 분의 추도예배를 일 년에 한 번, 5월 할머니 기일에 맞춰 드리자고 결정했고 매년 5월 초 외가의 식구들이 함께 선산에 모였다. 나도 해마다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타고 내려가 예배에 참석했다.
어느 해 5월 I 시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엄마가 말씀하셨다.
“00 오빠(엄마는 그분의 성함에 여전히 오빠라는 호칭을 붙여 부르셨다)가 만나자고 한다고 연락이 왔어.”
나는 여행 중에 책을 읽는 습관이 있는데, 그때도 무슨 책인지에 눈을 주면서 대답했던 것 같다.
“만나시면 되지! 왜?”
나는 그분의 성함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00 오빠라고 말씀하실 때 엄마가 오빠라고 부르는 일가친척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글쎄… 만나야 할까? 네 아빠도 나가서 한번 만나라고 하시는데….”
“…? 그분이 누군데요?”
나는 비로소 책에서 눈을 떼고 엄마를 보면서 물었던 것 같다. 엄마와 그분을 동시에 잘 아는 고향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단다. 꼭 한번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그분은 당시 엄마가 살고 계신 동네에서 자동차로 겨우 15분 되는 거리에 살고 계셨다. 엄마가 결혼한 후 몇 년 지난 후에 결혼하신 그분도 훌륭한 일가를 이뤄 장성한 자녀 중 한 분은 치과의사라고 했다. 우습게도 그 순간 나는 예민한 렌즈를 돌리던 그분의 정교한 손동작과 환자의 치아를 들여다보며 치밀하게 다듬는 그 아들의 손을 동시에 상상해 보았던 것 같다.
“엄마 생각은 어떤데요?”
“글쎄다… 왜 그렇게 만나자고 하시는지… 이제 와 다 늙어서 만나는 것도 그렇고…”
KTX로 I 시까지는 겨우 1시간 20분 거리. 엄마의 고운 명주실 같은 마음의 타래를 속속들이 풀어 놓기에 기차는 빨리 달렸고 시간은 짧았다. 그날은 훗날 내가 되새김질하듯 새록새록 다시 떠올리며 많이 후회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엄마의 속마음을 그때 좀 더 알아차렸더라면….
아빠가 은퇴하신 후 자고 깨고, 식사하고, 외출하는 거의 모든 일상을 함께 하셨던 아빠가 먼저 돌아가시자 엄마의 옆자리는 대문니가 빠진 것처럼 휑했다. 40년 이상 거주한 동네에서 어디를 가든 늘 나란히 함께 다니셨던 두 분이기에 엄마 혼자 어디를 가도, 약국이나 병원, 어떤 상점에 가도 ‘할아버지는 어디 가시고 혼자 오셨어요?’라고들 물었다. 상대의 입에서 ‘할아버지’라는 말만 나와도 엄마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그때 ‘그분’이 생각났다. 그분이라도 종종 만나 뵐 수 있다면 좀 덜 허전하실까? 내가 먼저 그분에 대해 여쭈어보자 ‘작년에 돌아가셨단다’라고 엄마는 대답하셨다. 그분은 아빠보다 1년여 먼저 세상을 뜨신 것이다.
엄마에게서 그분 성함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엄마가 입원한 병원에서였다. 척추가 골절되어 병원에서 시술을 받은 후, 통증 때문에 패치를 붙이자 약의 강도가 너무 센 것인지 엄마에게 섬망 증세가 나타났다. 밤낮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시고, 천장에서 거미가 내려와 엄마 몸으로 떨어진다며 무서워하셨다. 그 와중에 치마와 구두를 갖다 달라며 00 오빠에게 가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밖에서 기다리신다고,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고, 잠깐 만나 꼭 할 말이 있다고. 나는 섬망 증상이 해소되기를 기다리며 말을 돌렸다.
“오늘 아니고 내일 오신다고 하셨어. 그런데 무슨 말씀을 꼭 해야 하는데요?”
“한번 보자고 했는데, 내가 안 나갔잖아. 너무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고 오늘은 꼭 사과해야겠다!”
엄마는 내 곁으로 오셔서 투병하시면서도 잠깐씩 정신이 맑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땐 꼭 한 번씩 그분의 이름을 거론하셨다. 꼭 한번 만나야 한다고. 당신도 보고 싶다고! 그 표정이 얼마나 절절하신지…. 그러나 정신이 맑으실 때 다시 물어보면 ‘아이고! 얘가 뭔 소리야! 돌아가셨지. 그렇게 한번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었는데… 보면 뭐하겠니? 인연이 아니었던 것을’이라고 한결같이 말씀하셨다.
엄마의 진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아빠도 한번 만나 보라고 권하셨다는데, 훗날 그토록 마음에 응어리로 남을 것이었다면 그때 엄마는 왜 주저하셨을까? 그것이 아빠에 대한 사랑이요, 평생 함께한 동반자에 대한 의리라고 여기신 것일까? 그러나 내가 조금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엄마라면 마땅히 그런 선택을 하셨을 것이라고 쉽게 이해되었다.
나는 연세 들고 약해지신 엄마가 원하는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절한 눈빛으로 졸라도 00 오빠를 뵙게 해드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분은 돌아가셨고, 엄마는 이성으로 자신이 통제되지 않을 때만 00 오빠를 만나러 나가시겠다며 내게 간청하셨다. 이제 혼자 서실 수도 없는 몸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엄마의 그 소원을 들어드릴 수 없는 현실이 무척 마음 아팠다. 십수 년 전 그때, 기차 안에서 내게 조심스레 운을 떼셨던 그 말씀을 좀 더 유심히 듣고 내가 나서서 한번 만나게 해드렸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정신을 놓으실 때마다 그분을 찾는 안타까운 일은 없지 않았을까? 엄마의 마음이 이럴진대 그분은 어떠셨을까. 평생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지척에 살면서도 가볼 수 없어 연락을 넣고 하냥 답을 기다리셨을 그분. 그리고 종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의 그리움을 한으로 안고 눈을 감으셨을 그분.
그리움이 무엇인지 나도 조금은 안다. 대상이 사람이든, 길이든, 풍경이든, 기억이든 불쑥불쑥 찾아와 온 마음을 흔들어 놓고 몸을 휘청이게 하며 마침내 견딜 수 없는 통증으로 자리에 누우면 뜨거운 눈물로 흐르는 그리움. 역지사지라고 했는데, 나는 한 번도 그분의 애끓는 그리움에 대해 가늠해보지 않다가 내 엄마의, 그것도 정신을 놓을 때만 나타나는 애타는 마음을 보게 되자 나는 비로소 그분의 입장에 서보게 보았다. 돌멩이가 와 박힌 듯 가슴이 심하게 아려왔다.
길 건너편 빌딩에 플래카드 한 장이 바람에 펄럭인다. 자세히 보니 “저마다의 가슴 속에 빛나는 검 한 자루가 있다”고 적혀 있다. 그 문구가 내겐 달리 읽혔다. “저마다의 가슴 속에 애달픈 사랑 하나가 있다”고.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 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 했다. 저서로는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