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양자다

우리 모두는 양자다

2021-05-10 0 By 월드뷰

월드뷰 MAY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8


글/ 송길원(청란교회 담임목사)


질문 하나:

“형과 아버지를 팥죽 한 그릇으로 속였다.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챘다. 창세기의 족장 중 한 사람이다. 누구일까?” 두말할 것 없이 ‘야곱’이라고 답한다. 과연 야곱이 정답일까? 이 질문 속에 얼마나 큰 편견이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른다. 오랜 유교 사상에 물들어 있다 보니 장자권은 당연히 에서라고 여긴다. 그래서 ‘형에게 돌아갈 축복’이란 말이 튀어나온다. 틀렸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동생 야곱에게 돌아갈 복임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창 25:23). 누가 감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주께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질문 둘:

주일학교의 기민이의 카톡. “선생님, 오늘은 미세먼지 농도가 ‘아주 나쁨’이에요. 그래서 교회에 갈 수 없어요.” 이때 선생님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헐~. 나보다 더 낫네.’

언제부터 미세먼지가 호환·마마, 핵미사일보다 겁나는 존재가 되었을까? 봄에 몰려오는 ‘공포의 황사’는 코털이나 기관지 점막에서 걸러진다. 귀지처럼 코딱지로 배출된다. 노약자나 호흡기 질환자가 아니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알칼리 성분인 황사는 산성화된 토양에 영양제 구실을 한다. 서울의 오염 먼지 농도는 2000년대 초반이 지금보다 50% 이상 높았다.

질문 셋:

“기후변화보다 더 큰 인류의 가장 큰 재앙이 있다면 무엇인가?”

‘저 출산율’이라고? 역시 틀렸다.

세라 하퍼(Sarah Harper)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에 의하면 인공지능·로봇을 이용한 자동화로 산업 현장에서는 더이상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군대 역시 그렇다. 과거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현대화된 군(軍)은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은 인해전술이나 백병전을 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 군 입대 자원인 18세 남자는 20년 전 43만 명에서 지난해 27만 명으로 줄었다. 20년 후에는 15만 명이 된다. 모든 전쟁 무기들은 컴퓨터 바이러스 하나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 더구나 아이를 한 명 덜 갖게 되면 부모의 ‘탄소 발자국’은 연간 58t 감소한다. 이 연구 결과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입양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정부


그동안 우리는 유모차(乳母車)라는 말을 생각 없이 썼다. 아이가 타는 차니까 유아차(乳兒車)라고 했다면 아빠들이 더 많이 육아에 참여하지는 않았을까? 저출산(低出産)도 그렇다. ‘낳을 산(産)’은 여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프레임이 아닌가? 저출생(低出生)이라 할 때 더 나은 출생환경을 함께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아동학대 신고 건수가 2015년 1만 6,651건에서 2019년 3만 8,380건으로 늘었다. 2020년 비영리재단 ‘세이브더칠드런’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37개국 아동학대 신고비율은 코로나19 이후 평균 19% 증가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우는 것은 분리불안이 아니라 아빠·엄마의 폭력에 겁먹어서란다. 오죽하면 이런 소리가 나올까? 정인이 사건으로 회자되는 아동학대 사망 사건은 2014년 14명, 2016년 36명과 2017년 38명, 2018년 잠시 낮아졌다가 2019년 42명으로 보고되었다(보건복지부 자료). 문제는 통계에 잡히지 않은 수많은 죽음이다. 설사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저항능력이 전혀 없는 생명이 겪어야 하는 피의 호소(창 4:10)는 끔찍하다. 정인이 사건으로 여론이 비등하자 국회는 일주일이 안 되어 특별법을 뚝딱 만들었다. 도깨비방망이가 따로 없다. 그렇게 해서 아동학대가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미 있는 법도 지키지 않아서 생긴 문제일 따름이다.

사건 후 문재인 대통령은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과 관련해 “입양 아동 사후관리에 만전을 기해 달라”라고 지시했다. 정치권과 시민들은 뜨악했다. 대통령은 명백한 아동학대를 ‘입양 아동 사후관리’라는 말도 안 되는 프레임으로 덮어씌웠다. 사건은 연이어 터졌다. 신년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입양 부모의 경우에도 마음이 변할 수 있어 일정 기간 안에는 입양을 다시 취소한다든지, 또는 여전히 입양하고자 하는 마음은 강하지만 아이하고 맞지 않는다고 할 경우에 입양 아동을 바꾼다든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기초 사실조차 파악을 못 한 데서 나아가 공분을 일으킬 발언을 했다.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는 ‘대통령님이 정말 이렇게 말씀하신 게 맞냐?’라고 물으며 즉각 반발했다. “대통령님, 자식은 환불·반품되는 물건이 아닙니다.”

이로써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입양 가족이었다. 입양 가족들에게 대못을 박은 셈이었다. 가해자의 70~80%는 친부모다. 양부모나 계부모인 경우는 10% 미만이다. 이런 출생환경과 육아 환경 속에서 나타난 명가(名家)의 보도(寶刀)가 된 것이 입양 권유다. 마치 출생률 하락으로 오는 노동인구충당을 위해 난민들까지 받아들이는 이민정책과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 조선족이나 베트남 청년을 지방대학에 유학시키고 국적을 주자는 주장이다. 말이 통하는 조선족 청년들이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그들은 기회가 더 많은 중국에 마음을 두고 있어 한국에 올 마음이 없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베트남 청년들이라도 잡아두잔다. 우픈 소리다.


돈으로 저출생 문제가 해결될까


정부가 인구절벽 시대에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인책을 내놓았다. 양육수당이다. 1억 원의 현금을 지급한다고 한들 이 문제가 해결될까? 아동학대만 늘 것이다. 전 세계 청년 25억 명은 네트워크 되어 글로벌 빌리지에 살고 있다. 이미 그들의 사고는 ‘미혼에서 비혼으로’ ‘저출산은 비출산으로’ 방탄조끼를 입고 있다. 무슨 재주로 저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것인가?

가디언은 한국이 출산율 증대를 위해 2006년부터 2018년까지 약 151조 6075억 원을 사용했다고 전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1억 3천300만 원의 빚을 지고 태어난다. 이 채무는 누가 갚아야 하나?

이쯤 해서 입양문제로 눈길을 돌려보자. 또다시 질문이다.

“왜 입양을 하시려고 하죠?”

“아이가 필요해서요.” 너무 쉽게 내뱉는 이 말에 모든 문제가 녹아 있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겠다는 젊은이들에게 묻는다. “왜 결혼하려고 해?” “사랑하기 때문에요.” 우리네 결혼생활이 불행한 이유다. ‘때문에’는 조건과 이유다. 그 조건과 이유가 사라지면 우리의 사랑도 식는다. 아니다. 결혼은 ‘사랑하기 위해서’ 해야 옳다. 그때 사랑은 목적이 된다. 결혼을 통해 우리는 성숙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하나님의 사랑을 절절히 체험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며 천국을 누리게 된다. ‘아이가 필요해서’와 ‘아이에게 내가 필요해서’는 엄청난 차이를 가진다.

앞선 유모차-유아차만큼이나 잘못 쓰고 있는 용어가 있다면 ‘불우이웃 돕기’다. 대체 불행의 개념이 어디 있는 걸까? 당장 배고프고 추워서? 누가 이런 프레임을 씌웠을까? ‘너는 불행’하고 ‘나는 행복’하니까 내가 뭔가를 베푸는 거라고. 원 세상에! 내가 그 자리에 놓여 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여전히 저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삶의 투혼이 내게도 있을까? 인생의 허들경기에서 장애물은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라’고 있다. 나는 그에게 작은 응원가를 보냈을 뿐이다. 선수는 그다. 그가 끝내 장애물을 넘어서서 우승컵을 든다. 그가 나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가? 삶의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것이 돈 몇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내가 빚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나눔 이웃’이 맞다.

환대를 나타내는 헬라어 필로크세니아(φιλοξενία·filoxenia)는 낯선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을 말한다. 필로스(philos·친구, 사랑)와 크세노스(xenos·낯선 사람, 이방인)가 합쳐진 단어다. 한글은 대접(영접)으로, 영어 성경은 환대(hospitality)로 번역했다. 라틴어 호스피티움(hospitium)에서 비롯된다. 그 어원이 호스페스(hospes)다. 주인(host)과 손님(guest) 모두를 의미한다. 흥미로운 단어다. 내가 환대를 베풀 때 주인과 손님의 경계는 무너진다. 너와 나, 나와 너가 아닌 ‘하나’로만 존재한다. 여기에 사람의 경이로움이 있다. 생각해 보라. 남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동물이 인간밖에 더 있는가? 그래서 자기만 아는 사람을 동물격(動物格)이라 한다. 더 노골적으로 짐승격이다. 제일 큰 욕이 있다. ‘에라이. 짐승보다 못한 인간아!’ 그리스도인은 짐승격이 아닌 인격과 품격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입양


입양이 그렇다. 마치 내가 호혜를 베푸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데 문제가 있다. 더구나 우리가 모두 이미 입양된 자라는 것을 깨우칠 수는 없을까? 무지(無知)가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무지(無智)는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무지(無知)로도 모자라 무지(無智)하기까지 한 데 문제가 있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른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여기에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나를 입양(入養, Adoption)해 주겠다고 하신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소유한다. 양자(養子)됨이다. ‘수양(收養)’이다. 하늘 아버지와 나와의 가족관계 증명서가 발급된다. 내게 주어진 엄청난 신분의 변화다. 이런 것이 기적중의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적인가?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養子)의 영(靈)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Ἀββᾶ)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4~15)”

이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이제 양자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도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아빠·엄마가 되어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때 복지비 지출이 해결하지 못하고 법이 해결하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

마지막 질문을 해 본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절대 못 할 일이 무엇일까?”

‘입양’ 틀렸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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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가 깨어날 일’이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깨어나지 않으셨나?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가 해야 할,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입양’이다.

사랑은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

<happyhome1009@daum.net>


글 | 송길원

하이패밀리 대표와 청란교회 담임으로 섬기고 있다. 최근 임종과 장례에 깊은 관심을 갖고 <메멘토모리 기독시민연대>를 발족시켰으며, 모교인 고신대학으로부터 명예 보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죽음의 탄생> <죽음이 배꼽을 잡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