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을까?
2021-05-09
월드뷰 MA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
글/ 정동섭(가족관계연구소장)
기독교 역사상 참으로 비극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는 성애(sexuality)와 영성(spirituality)이 나누어진 것이다. 이 점은 성경이 인간의 성을 그토록 커다란 축복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인 현상이다(Richard Foster).
결혼문제의 가장 큰 원인이 대화의 부족에 있다면 그 두 번째 원인은 성 문제라고 할 수 있다(Lawrence Crabb. Jr.).
성생활이 만족지 못하다면 다른 영역까지 악영향을 미쳐서 부부관계 중 약 90% 정도는 나빠질 것이다(Jack Mayhall).
성에 대한 교회의 세 가지 태도
지금까지 교회는 성과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경험했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는 성에 대해 3가지 대조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첫 번째 태도는 성과 결혼은 모든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입장이며 히브리인의 관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즉 성을 만드시고 “심히 좋다”라고 선언하셨다. 따라서 히브리인은 성에 대해 매우 긍정적 관점을 가졌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성기를 통해 재생산했다. 할례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계속하는 성기를 성화시키는 의식이었다. 성은 좋은 것이고 아버지 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특권이기 때문에 모든 히브리 남자는 결혼해 아들을 얻기를 원했다(창 16:2; 29:31; 36:22; 삿 13:3; 룻 4:13; 삼상 1:5~6; 2:22). 성은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귀하게 여길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두 번째 태도는 결혼은 좋은 것이지만, 모든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헬라의 이원론과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결혼은 좋은 것이나 성이 이를 죄악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라는 사고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따라서 사도시대 이후 처녀성이 이상화되고, 독신이 선호되는 생활양식으로 간주되었다. 금욕주의와 수도원적 영성이 중세를 지배했다. 결혼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나 섹스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었다. 자녀 생산 이외의 목적으로 하는 성교는 죄가 되었기 때문에 부부 사이의 성은 즐기지 않을 때만 용납될 수 있었다. 주후 500~ 1,500년까지 결혼은 필요악으로 취급되었다. 결혼은 30점, 과부는 60점, 처녀는 100점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세 번째 태도는 종교개혁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결국 결혼은 성직자를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는 입장이다. 독신과 처녀성을 이상화하는 것을 배격하기 시작했다. 성과 결혼을 하나님의 본래적 고안으로, 창조질서의 일부로 간주했다. 인간을 성적인 존재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보다 전(全)인격적인 인간관으로의 복귀로 인해 몸과 영혼을 변화 가능한 은혜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마틴 루터는 결혼해서 3남 3녀를 낳았다. 그 후 청교도들은 부부간의 친밀한 관계를 위한 성을 강조하면서 결혼에 대해 가장 성서적이고 긍정적인 견해를 산출하기도 했다.
시대에 맞는 성서적 성윤리는 무엇인가
현대인의 성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현대는 계몽주의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종교가 삶의 변두리로 밀려났고 세속화가 시작되었다. 최근의 발전은 성을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환상적이고 질적인 섹스에 대한 강조는 결혼 전의 무절제한 성과 동성연애, 묻지마 관광, 스와핑과 난교와 같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성적 친밀감에 대한 기대가 증가하고 실적 위주의 성행위 성향을 낳았다. 20세기 후반에는 성의 세속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성행위는 공개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 되었다. 핵가족화로 사생활(privacy)이 대두되었고 현대의학의 발달로 성병 퇴치와 산아제한이 가능해졌다. 성행위가 임신이라는 결과 없이 행해질 수 있게 되었고 쾌락만을 위한 성행위가 가능해졌다. 성행위의 목적이 출산과 친밀감을 위한 성행위 둘로 구분되게 되었다.
우리는 새 시대에 맞는 성서적 성 윤리를 주장해야 한다. 미디어는 자기충족을 위한 성의 필요성을 낭만적으로 외치고 있으며, 광고업계는 성을 착취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현대의 혼란은 윤리적 공백으로 유도할 수도 있고, 모든 규제를 배척하는 도덕률폐기론(antinominianism)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지금이야말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본래적 계획을 새롭게 제시할 좋은 기회이다. 현시대는 유럽이나 미국을 비롯해 우리나라에서도 성도덕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성도덕을 무너뜨리고, 문화막시즘이 차별금지법의 이름으로 동성애와 동성혼, 낙태, 트랜스 젠더, 제3의 성을 권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창조질서와 진화론의 충돌이 성과 가정이라는 주제를 두고 격돌하고 있다.
결혼이란 무엇인가?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신성한 연합으로, 하나님이 맺어주시고 그분 앞에서 시작되며 대개 성관계로 완성된 남편과 아내의 신성한 연합이다(말 2:14). 결혼은 조건이 맞지 않으면 파기할 수 있는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뤄지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영원한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본래 결혼은 인간의 인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도이며, 하나님이 설계하신 결혼은 영속성과 신성성, 친밀성, 쌍방성, 배타성을 특징으로 하는 평생의 충실한 언약 관계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섹스의 목적과 더 깊은 의미는 무엇인가?
⑴ 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감사와 찬양을 표해야 할 대상이다(딤전 4:4~5).
⑵ 성은 자녀 생산(번식)을 위한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 남녀의 결합이 없이 자녀를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동성결혼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⑶ 섹스의 목적은 즐거움과 쾌락이다. 특히 부부가 평생의 연합 속에서 섹스를 즐길 때 그렇다. 성적 자극과 절정, 성적 만족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므로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두려움 없이 감사하며 누리면 된다. 신명기(24:5)와 아가서(7:1~10) 그리고 잠언(5:16~9)은 성이 우리의 쾌락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⑷ 성은 결혼한 부부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창세기를 근거로 결혼에 대해 극히 긍정적으로 말씀하셨다(마 19:3-6). 하나님이 짝지어준 부부간의 성은 아름답고 거룩하고 좋은 것이다(히 13:4). 부부가 피차 합의 하에 성애를 누릴 경우, 어떻게 성관계를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제한하지 않으셨다. 섹스는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사용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은 죄 때문에 일부일처제, 이혼, 간음, 동성애, 불임, 성 역할의 희석 등을 통해 번번이 와해되었다. 하나님은 결혼 안의 성은 축복하시지만, 결혼 밖에서 이뤄지는 성은 정죄하시고 심판하신다(히 13:4). 그리스도인의 성생활에 용인될 수 없는 것에는 음행, 간음, 동성애, 방탕, 음담패설과 부적절한 성적 언어, 근친상간, 매매춘, 수간 등이 있다. 성욕은 식욕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성욕은 부부간에 충족해야 한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의 보궐선거를 시행한 것도 박원순 전 시장과 오거돈 전 시장이 아내와의 관계에서 성욕을 채우지 않고 비서와 여직원을 성추행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성(性)
결혼은 이성 간의 연합이므로, 동성 간의 결혼은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음란하여 다른 육체(순리에 어긋나는 욕심)를 따라가다가 육체를 더럽히는 가증스러운 행위이다(유 1: 6~7).” “너는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모든 동성연애적 행위는 인간의 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테두리 밖에 있는 것이다. 남자끼리, 여자끼리 하는 동성애는 이성을 ‘순리대로 쓰기를 버리고 역리로 쓰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판결은 시종일관 똑같다. 모세오경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예수에서 바울까지, 로마서에서 목회 서신까지 성경은 동성애가 죄이며 하나님을 향한 도덕적 도발임을 한목소리로 확언한다.
우리나라는 유교적인 가치관 때문에 성에 대한 논의를 오랫동안 금기시해 왔다. 따라서 성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많은 부부를 오도하고 있다. 이혼율이 올라가는 속도가 주춤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50%에 가까운 이혼율을 보인다. 사회학자들은 성격의 차이가 이혼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하지만, 사실은 성적인 갈등이 말 못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음행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렇게 아내를 기쁘게 하고 저렇게 남편을 즐겁게 하세요”하고 가르쳐야 한다. 성경은 성경(性經)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성교(性交)를 성교(聖交)라고 한다. 성은 거룩하면서도 동시에 쾌락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활발하고 건강한 성생활은 무더운 여름철의 청량제와 같은 것이다(Howard Clinebell). 성에 대한 사회의 도착적인 태도는 결혼 관계의 신성함을 파괴하고 있으며 남녀관계의 만족에 대한 잘못된 이상을 퍼뜨리고 있다. 이제 교회는 이런 모습을 보고 파괴된 부분에 온전함을 가져다주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Lois Clemens).
하나님은 부부가 성의 즐거움을 누리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애의 즐거움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연구와 의학적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적 장애를 참고 견뎌야 할 이유가 없으며, 성의 즐거움은 배워서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다. 성적 만족을 증진하도록 도와주는 기술을 이용할 때가 되었다(Tim Alan Gardner, Sacred Sex, 2002). 성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두 권의 책으로 박수웅 장로의 <크리스천의 성 Talk(두란노)>과 필자의 저서 <부부연합의 축복(요단)>을 추천한다.
주여, 우리로 섹스를 당신이 애초에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면에서 탁월한 선물, 경축해야 할 선물로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Charlie Shedd 목사의 침실에서의 기도).
섹스의 빈도와 다양한 성적 기교는 서로에 대한 배려라는 면을 제외하면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누구와 섹스를 할 것인가를 제한하였을 뿐 어떻게 성교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달리 말해서, 결혼한 부부가 피차에게 만족을 주고 관계에 기여하는 것은 주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이다. 피차 합의하에서라면 부부가 서로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구강성교든 상호 간의 자위이든 다른 어떤 방법을 사용해 무방하다(Richard Foster).
<dschung20@naver.com>
글 | 정동섭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서 상담심리 석사와 가정사역 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침례신학대학과 한동대학교에서 기독교상담학과 가정생활을 강의했다. 영국대사관과 미국대사관에서 부공보관과 홍보전문위원을,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국제부 차장을, 서울극동방송에서 PD 겸 아나운서를 역임했다. 현재 가족관계연구소장과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로 한국 교회를 섬기고 있다. 최근에 <깨어나라. 대한민국>, <나라가 이게 뭡니까>를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