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는 외롭다. 그분도 그랬다.
2021-04-27 월드뷰 APRIL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3
글/ 남정욱(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는 참 집요한 사람이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으로 신을 ‘만들’더니 이번에는 <신, 만들어진 위험>이라는 신간으로 그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설파하느라 열심이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그는 애피타이저 삼아 구약의 역사적 허구부터 격파한다. 다 읽을 필요 전혀 없고, 한 문장만 보자.
우리는 ‘구약’이 실제로 쓰인 시점에 대한 단서를 문장의 시대착오에서 얻을 수 있다. 시대착오는 뭔가가 엉뚱한 시대에 튀어나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고대 로마에 관한 시대극에 출연하는 배우가 손목시계를 풀어놓는 걸 깜박한 경우와 같다. 창세기에 그런 시대착오가 나온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낙타를 소유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고학 증거에 따르면 낙타는 아브라함이 죽었다고 추정되는 때로부터 수 세기가 지난 뒤에 가축화되었다. 바빌론 유수 시점에는 낙타가 이미 가축화되어 있었으니, 창세기가 실제로 쓰인 시점은 바로 이때다. _ <신, 만들어진 위험. 72>
여기에 대해 소생의 할 말은 하나뿐이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식의 대충 덮고 넘어가기가 절대 아니다. 과학은 ‘사실적 지식’의 영역이고 종교는 ‘가치와 의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둘은 충돌할 일이 전혀 없으며 충돌은커녕 만날 일도 없는 영역이다. 지식과 가치를 구별하지 못해 과학으로 종교를 들쑤시는 사람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은 안쓰럽고 암담하다(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신, 만들어진 위험>에서 그가 내걸고 싶은 궁극의 슬로건은 ‘종교는 위험한 정신 바이러스’라는 주장이다. 아마도 미국 9ㆍ11 테러 당시 그가 한 일간지 칼럼에 쓴 “종교는 사람들을 언제든 살인 무기로 만들 수 있는 정신 바이러스의 일종이다.”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은데, 소수의 예외적 사이코패스를 일반화해서 집단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유치한 수법이다. 그것은 돈 때문에 아이를 유괴한 사람을 예로 들어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수준의 논법으로(그럼 자본주의 전에는 아예 유괴가 없었다는 말인가) ‘평화’라는 단어로 인사말을 삼는 대부분의 무슬림을 욕보이는 짓이다. 내 생각에 그는 그저 ‘관종’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잊히기 싫어 공부한 것을 최대한 논쟁적이고 상업적으로 써먹으려는 그냥 흔해 빠진 종류의 인간이다. 참고로 낙타는 고대에 이미 가축화가 진행된 19개 종 가운데 하나다. 고고학적 증거로 확인한 낙타의 가축화 시기는 기원전 2,500년경의 아라비아이고 아브라함은 아시다시피 기원전 1,800년대에서 기원전 1,600년대 무렵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낙타 이야기는 내 주장이 아니라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의 <총, 균, 쇠>에 나온다. 리처드 도킨스는 책도 안 읽는 모양이다. 관종을 성실하게 비판하는 것은 그의 목적을 만족시키는 일인 까닭에 비평은 여기서 줄인다.
무신론과 함께 기독교를 물고 늘어지는 게 초월자에 대한 해악 주장이다. 신이 만든 세상은 과연 평화로운가, 종교는 사람들을 화합하게 만드는 대신 분쟁으로 몰고 가고 있지 않은가,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수많은 악행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등등. 이 또한 답답한 소리다. 살인, 약탈 등은 원시에서부터 이어진 인간의 본성이며 종교는 다만 핑계였다. 한동안 전쟁에 관해 공부한 적이 있다. 인간은 왜 전쟁을 할까. 답은 어렵지 않았다. 인간은 전쟁을 좋아한다. 그게 다다. 그 좋아하는 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은 종교를 명분으로 가져다 썼을 뿐이다. 그러니까 종교로 인한 불화와 분쟁은 신이 인간에게 미안해해야 할 일 아니라 인간이 신에게 미안해해야 할 일인 것이다. 비판하기에 신은 너무 멀리 있다. 해서 이들은 독생자를 물고 늘어진다. 예수의 신성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트집 잡고 재단하고 재해석한다(그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고전적으로는 D.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의 <달아난 수탉>이 있다. 부활한 예수가 여인의 젖가슴을 만지는 이야기다. 자기를 다시 십자가에 매달겠다며 로마 군병들이 뒤를 쫓는 가운데 예수는 자신이 예전에 했던 ‘영혼 구제’라는 사역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예수가 뒤늦게 알아차린 것은 육(肉)을 동반한 사랑이었다는 얘기인데 영어 제목은 <The Escaped Cock>으로 정말 ‘콕’ 찍어서 중의적으로 흠집을 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도 명단에서 빠질 수 없다. 물론 후폭풍을 두려워해 마지막 장면에서 타협하기는 했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대신 마리아와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간다는 얘기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봉준호 감독이 존경한다는 마틴 스콜세지(Martin Charles Scorsese)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 그렇지만 한없이 지루하고 서사적이어서 164분의 러닝 타임이 정말 지겹게 흘러간다(중반쯤 되면 예수 얘기는 관심도 없고 그저 영화가 빨리 끝나기만 바라게 된다). 파괴력 제로.
이번 호에 소개할 작품은 원작은 없고 오페라와 영화로만 만들어진 작품이다. 제목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로 시작은 1970년에 발매된 콘셉트 앨범이었다(이하 슈퍼스타). 재능이 넘치는 두 젊은이는 이 음반에서 예수를 해체해 아예 새로 디자인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은 전 세계에서 학생 파워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다. 프랑스에서는 68세대가 등장했고 미국에서는 69세대가 이에 호응했으며,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짝퉁 69세대가 맹위를 떨쳤다(미국 69세대는 이들이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정점으로 했기 때문에 필자가 자의적으로 붙인 명칭이다. 일본 69세대 역시 전공투의 동경대 야스다 강당 점거 사건을 이유로 붙인 명칭). 이들 베이비붐 세대는 기성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했는데 이들의 무기가 되었던 것이 영화와 음악이었다. 영화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라고 일컬어지는 일종의 ‘역사 다시 쓰기’ 운동이었고 음악은 로큰롤이다. 록 음악을 추종하는 신세대는 록이라면 고개를 흔드는 기성세대를 조롱하고 공격했다. 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반항을 의미했다.
슈퍼스타는 철저히 록의 사운드로 범벅이 된 작품이었다. 거칠고 시끄러웠으며 강렬했다(이때 처음으로 록 오페라라는 명칭이 쓰였는데 대사가 모조리 음악으로만 진행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음반의 제작을 요청한 것이 진보적인 성공회 주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주교들은 신세대가 교회에서 멀어지는 것을 우려했고 젊은 세대의 흥미를 끌 만한 작품을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와 팀 라이스(Sir Tim Rice)에게 주문했다. 그리고 요청한 것 이상의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요청한 것 ‘이상’의 작품이라고 한 것은 수준도 높았지만, 내용도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슈퍼스타, 그 추종자들은 히피로 등장했다. 게다가 유다를 돈에 눈이 먼 배신자가 아닌, 죽음을 앞두고 갈등하는 혁명가 예수를 인간적으로 사랑한 불행한 인물로 그렸다. 영화의 주인공이 예수인지 유다인지 헛갈리는 가운데 유다는 예수에게 각종 예민한 질문을 던진다.
앨범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등장인물들이 다 록스타였으니 당연하다. 예수 역할은 당시 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시끄러운 밴드였던 하드록 그룹 딥 퍼플(deep purple)의 보컬 이언 길런(Ian Gillan)이었다(이언 길런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달라며 절규하는 부분은 하도 고음이라 다음 예수들이 따라 하느라 골탕을 먹게 된다). 앨범만 만들어지는 것과 무대에 오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실제 공연설이 흘러나오자 기독교계는 예민해진다. 1971년 브로드웨이 초연 때에는 공연을 중단하라는 피켓이 극장 앞에 등장했다. 흥행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미국인들이 신성모독에 유난히 예민한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런던 무대에 올린 작품은 어마어마한 히트를 기록한다. 인기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기어이 1973년 영화로 만들어진다. 영화에는 또 하나의 파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다 역을 맡은 배우가 흑인이었다. 게다가 유다는 자살한 후에 지옥에 가기는커녕 천사들과 내려와 노래를 부른다. 내용은 살짝 예수에 대한 야유다. 이스라엘의 브엘세바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사막에서 주로 촬영된 영화는 그 외에도 기발한 발상과 장면으로 가득하다. 헤롯왕은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로마 군인들은 보라색 러닝에 기관총을 들고 등장하고 심지어 탱크도 나온다. 무기 협찬 때문에 촬영 현장을 방문했던 이스라엘군 중령이 “예수 영화 아니었어요?”라고 감독에게 물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파격이니 어쩌니 해도 50년 전 작품이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신성모독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에 대한 지극한 연민이 차고 넘치는 영화다. 통제도 안 되고 변덕은 죽 끓듯 해 언제 등 돌릴지 모르는 대중에게 둘러싸인 예수의 모습은 한없이 위태롭고(그래서 제목을 슈퍼스타라고 지은 것일까) 끝없이 외롭다.
아직도 이 영화를 반기독교 영화로 분류하는 분들이 계시다. 선교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꼭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부정하는 악질적인 영화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불쾌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애초에 성공회 주교들이 원했던, 젊은이들에게 예수에 관한 관심을 끌어낸 것도 분명 사실이고. 물론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1971년과 1972년 공연은 유튜브에서 찾아 들을 수 있다. 한국 초연은 1980년이었다. 예수 역에는 이종용, 유다 역에는 김도향, 마리아는 윤복희, 헤롯왕은 곽규석이 맡았다. 그 외에도 출연자들 대부분 기독교인이라 전도극으로 알려져 교회에서 단체 관람을 오기도 했다는 후일담이 남아 있다. 역시 인터넷에서 찾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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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남정욱
작가이며 출판, 영화, 방송 등 문화 부문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사>, <결혼>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