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2021-04-05
월드뷰 APRIL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3 |
글/ 이상규(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시작하면서
중국 우한(武汉)에서 발원한 COVID-19와 이에 대한 정부의 방역 조치로 제기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종교의 자유’에 대한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두 가지 곧, 신앙의 자유(Glaubensfreiheit)와 종교 행위의 자유(Religionsausübungsfreiheit)로 나눌 수 있는데, 종교 행위의 자유는 종교적 행사의 자유, 종교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 종교 교육의 자유, 전도 혹은 선교의 자유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종교적 행사의 자유란 그 믿는 바를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각종 예배나 종교의식의 자유, 곧 거기에 참가하거나 참가하지 않을 자유를 의미한다. 이처럼 예배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에 속한 근원적이고도 기본적인 자유이다. 그래서 독일의 법학자 콘라드 헤세(Konrad Hesse, 1919-2005)는 신앙의 자유, 예배의 자유, 종교적 결사의 자유를 종교의 자유의 본질적 요소라고 말한 바 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예배는 종교 행위의 자유일 뿐 아니라, 신앙의 대상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사명으로 일컬어져 왔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교회의 4가지 사명은 예배(라트레이아), 증거(마르튀리아), 교육(파이데이아), 봉사(디아코니아)이다. 이 네 가지 사명은 교회의 본질과 관련되며, 교회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집회와 예배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데도 역사적으로 종교의 자유와 함께 집회의 자유는 수없이 거부되거나 침해를 받아왔고, 예배 자체가 불가능한 일도 있었다. 전제주의나 공산주의 혹은 독재정권 하에서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코로나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금지하거나 예배를 제한하고, 교회를 폐쇄한 일까지 발생했다. 이런 현실에서, 이글에서는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동안 집회와 예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 왔던 가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제의 집회 및 예배 방해
국가권력이 공권력을 동원해 예배를 방해한 대표적인 경우가 일제하에서의 집회 방해였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했을 당시 조선에는 20만 신도, 300개 이상의 기독교 학교, 3만 명 이상의 학생, 1,900여 개의 집회소, 270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 2천3백 명의 조선인 교직자가 있었다. 일제가 파악한 교세는 실제보다 부풀려진 것이지만 기독교 집단을 통제하고, 영향력을 축소하는 것이 식민 지배를 위한 필수적 요소라고 여겨, 식민통치 전 기간에 걸쳐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위험시했다.
일제는, 종교의 자유 혹은 신교(信敎)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행정적인 통제, 교리에 대한 통제, 종교적 전향의 강요, 그리고 탄압 입법의 제정을 시도했는데, 이를 통해 기독교를 탄압하고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했다. 이들은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인 팔굉일우(八紘一宇)의 기치 아래 어능위(御稜威)라는 절대적 권위로 성전(聖戰)을 이루는 대과업을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총후보국(銃後報國)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했다.
통감부는 조선에만 적용되는 외지법(外地法)을 제정했는데, 특히 보안법, 조선형사령, 치안유지법, 불경죄 등을 근거로 집회를 제한하고 예배를 감시하고 설교를 통제했다. 1939년 9월 8일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회 총회에 보고한 경남노회의 상황보고를 보면, “교회가 시국 문제로 심히 어려운 중에 있고,” “시국 문제로 폐쇄된 교회가 많았으며, 따라서 교역자와 신자 수가 감소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의 폐쇄는 예배의 자유에 대한 침해였다. 그런가 하면, 방공(防空)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야간 집회를 제한하고 시국인식(時局認識)이라는 이름으로 목회자의 종교활동을 통제했다. 심지어는 민족해방을 말하는 출애굽 사건이나, 절망 중에 소망을 주는 에스겔서 37장 등은 설교할 수 없는 금지된 본문이었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등과 같은 찬송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이는 집회 방해이자 예배 방해였다.
일제 말기에는 교회를 통폐합시켰다. 예컨대, 1942년(소화 17년 4월) 당시 경남지방에는 325개의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108개 교회를 통폐합이라는 이름으로 폐쇄하고, 217개 교회만 존립케 하여 교회 수를 3분의 1로 축소했으며 일부는 군수창고로 전용했다. 폐쇄는 파괴로 이어졌다. 교역자의 자격을 심사해 유자격자와 무자격자로 구분하고 무자격자의 설교를 금지했다. 노회장이 앞장서서 “현 존립 교회는 반드시 유자격 교역자로 목회케 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김일성 정권의 ‘주일’ 총선거
북한에서는 예배 방해 정도가 아니라 종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므로 기독교는 처음부터 탄압의 대상이었다. 해방 당시 북한에는 3,000개의 예배당, 2천5백여 명의 교직자, 30만 명의 신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북한 김일성 정권은 이른바 미신타파 돌격 기간(1946년 11월 24일~30일)을 설정하고, 전 지역의 영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자 명단을 작성했다. 이들은 은밀한 제거의 대상이었다. 1949년에는 기독교 신자가 10만 명 줄어 20만 명이 되었고 교직자는 900명으로 감소했으며 6·25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거의 멸절되었다.
북한에서 기독교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는 집회 제한 및 예배 방해였다. 그 분명한 사례가 1946년 11월 3일 주일에 실시된 도·시·군인민위원회 위원선거였다. 10월 12일 소련군이 북한으로 진주할 당시 ‘북조선 주둔 소련 25군사령관 성명’을 통해 “교회에서 예배하는 일을 허가한다.”라고 선포한 지 한 달도 안 돼 주일 예배를 방해한 것이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해방 후 첫 3·1절 기념행사(1946년 3월 1일)는 기독교계와 공산정권 곧,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간의 첫 충돌이었고, 11월 3일 거행된 선거는 기독교를 탄압하려는 계획적인 음모였다. 3·1절 기념행사로 충돌한 이후 김일성 공산집단은 중요한 행사는 의도적으로 주일에 거행했다. 기독교인들의 참석을 강요하고, 교회당에서 정치 강연을 시행함으로써 계획적으로 기독교 집회를 방해했다. 북한에서의 11월 3일 선거도 이런 취지에서 의도된 것이었다. 이에 북한 지역 장로교 총회라고 할 수 있는 ‘이북5도연합노회’는 주일 선거가 공표되자 10월 20일 회합해 대책을 논의하고, 주일 선거를 거부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결의문
북한의 2천 교회와 30만 기독교 신도들은 신앙의 수호와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다음 5개 항의 교회 행정의 원칙과 신앙생활의 규범을 결정, 실시 중에 있사온 바 자(玆)에 귀 위원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1. 성수 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2. 정치와 종교는 이를 엄격히 구분한다.
3. 교회당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의무요 권리이다. 예배당은 예배 이외에는 여하한 경우도 이를 사용함을 금지한다.
4. 현직 교역자로서 정계에 종사할 경우에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
5.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교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집단은 주일 선거를 강행했고, 이를 거부한 교회와 지도자들은 수난에 직면했다. 이때로부터 교회에 대한 탄압, 예배 방해는 노골화되었다. 의도적으로 주일 행사를 강행하고 학생들을 등교시키고, 주일에도 출근케 하는 이른바 ‘일요일 소집령’을 내렸다. 집회 및 예배 방해였다. 불응하는 이들에게는 물리적 처벌과 심리적 고통이 뒤따랐다. 북한에서의 반기독교 정책은 집회 방해로부터 시작되었고 결국 기독교는 서서히 멸절되어 갔다. 끊임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켜 온 소수의 그리스도인에 의해 기독교 신앙은 지하교회 형태로 유지되고 있을 따름이다.
남한에서의 ‘주일’ 선거 계획 변경
북한에서의 주일 선거와는 달리 남한의 총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월요일에 시행되었지만, 사실은 5월 9일 주일에 시행할 예정이었다. 해방 후 엄청난 혼란과 함께 3년간의 미 군정기를 보내고,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선거를 치르게 된 미 군청의 하지 장군(John Reed Hodge, 1893~1963)은 총선거일을 5월 9일 주일로 정하고 이를 공표했다. 이때 성도들과 전국의 교회 지도자들은 일제히 주일 선거를 반대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자유·보통·비밀 선거를 시행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주일날 실시 되는 선거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는 성수 주일을 헤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은 연희전문에서 가르치던 남감리교 선교사 피시아(James E. Fisher) 박사를 통해서 하지 장군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주일 선거를 피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의 일을 피시아 선교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나에게 하지 중장을 만나 주일 선거를 반대하는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시간이 정해지고 지도적 교회 목사들과 몇몇 평신도 지도자들이 장군의 사무실에 모였다. 그들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만약 선거가 주일에 이루어진다면 수천 명의 기독교인이 그들이 선량한 시민이라는 점과 상관없이 기독교적 양심에 따라 투표권을 버릴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지 장군은 그들의 입장을 매우 정중하고 인내심 있게 듣고 난 후, 선거일은 이미 정해졌고 전국에 공표되었다고 말했다. 그날은 대부분 사람이 생업에 메이지 않고 투표소에 가서 선거하기 충분한 시간이 있는 날이며, 유럽의 많은 기독교 국가의 선거도 일요일에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매우 유감스럽지만, 만약 날짜가 바뀐다면 상대적으로 소수인 기독교인들보다 일반 대중들이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대답했다. 또한,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기독교인들을 정규적인 예배도 드리고 동시에 선거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실망했고 이전에 장군에 대해 가졌던 존경과 경외심을 버린 채로 헤어졌다.”
하지 중장은 교회 지도자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주일 선거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독교회와 교회 지도자들 또한 주일 선거계획 반대 운동을 철회하지 않았다.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자 하지 중장은 선거를 꼭 2주일 앞두고, 5월 9일 주일 선거를 포기하고 하루 늦춘 5월 10일 월요일에 총선거를 시행했다. 이때 하지 장군의 결단에 영향을 끼친 것은 기독교인들의 반대 외에도, 5월 9일 정오쯤에 일식(日蝕)이 있을 것이라는 발표였다고 한다. 일식은 자연 현상이지만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안 그래도 선거를 거부하는 좌익단체 등의 반대세력이 있어, 하지 중장은 기독교인들의 요구를 수용해 주일 선거를 피하고 5월 10일 총선거를 시행하게 했다. 그 결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의 감시하게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5월 31일에는 역사적인 국회를 개원했다. 이때 임시국회의장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독립 민주 국회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하고, 감리교 목사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남한에서는 주일 선거를 피하게 된 것이다.
해방 후 성수 주일을 위한 교회의 노력
어느 시대나 종교의 자유나 종교 행위의 자유, 곧 집회나 예배의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성수 주일 여건은 이를 확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일제하에서 집회의 자유를 침해받았던 경험 때문에 해방 이후 한국 교회(장로교회)는 이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첫 흔적이 1947년 4월 18~22일 대구 제일교회당에서 개최된 33회 총회(제2회 남부총회)였다. 이때 총회는 “공사립을 막론하고 주일에 취학(就學)지 않도록 당국에 교섭하기로 했고” 입법위원회에 “공창을 폐지할 것, 음주·흡연을 제한할 것, 아편 재배와 취급을 제한할 것”과 함께 “주일날은 공휴일로 지정해 실시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는 주일에도 등교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일요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 행위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었다. 1948년 4월 20~23일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개최된 34회 총회는 “각 학교에서 주일에 행하는 일체 행사를 금지하기 위하여 당국과 교섭하기로” 결의했다. 주일 예배가 방해받지 않도록 시정을 요청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시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1949년 4월 19일~23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는 종교행사 이외의 주일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하는 한편, 정부에 “주일 성수를 위하여 대표를 정부 관계 당국에 교섭하여 주일에는 각 관공서에서 일체 행사를 금지하도록 하고, 특히 문교 당국에 교섭하여 학교 행사 일체를 금하도록” 요청하기로 했다. 총회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주일 예배가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여러 노회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군산노회는 노회장 이상귀 명의로 ‘주일날 등교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헌의했다. “경향 각지에서 주일날 학생들의 등교를 요구하는 학교가 종종 있으므로 이런 일이 없도록 정부에 교섭하여 주기를 헌의하나이다.” 같은 내용이 전북노회(노회장 김병구)로부터 제기되었다. 이상과 같은 계속된 헌의와 정부 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집회의 자유를 확보하고 예배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게 된 것이다. 이른바 기독교적 정부였다고 일컬어지는 이승만 정부하에서 조차도 주일 예배의 온전한 자유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6.25 전쟁기
6.25 전쟁기 교회 집회나 주일 성수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북한이나 공산 치하에서의 집회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제한을 받지만, 전선에서의 예배도 쉽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집합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어 6월 28일 이후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했다. 28일 새벽 3시경에는 한강 철교가 폭파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피난을 선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긴장과 두려움이 예배를 방해했다.
전쟁이 발발한 후 맞는 첫 주일인 7월 2일, 이날 서울에서는 예배를 못 드린 교회가 많았고, 예배를 드려도 출석 인원은 평소의 20% 이하로 떨어졌다. 강원용의 회고록에 의하면 7월 2일 주일 경동교회에 모인 인구는 30명 정도였고, 평소의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인원이었다고 한다. 영락교회의 경우 한경직 목사는 타의에 의해 대전으로 피난한 이후였고, 7월 2일 예배는 박동엽 장로의 인도로 수십 명의 어린이와 몇 안 되는 부인들이 예배를 드렸을 뿐이다. 전쟁이 시작된 6월 25일 주일 낮에 4천여 명이 모였던 교회였다. 그다음 주일에 영락교회는 인민군들이 점거했고, 부득불 장소를 옮겼으나 곧 예배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남대문교회의 경우, 인민군의 위협을 피해 김치선 목사는 삼각산으로 피신했고, 남아있던 교회의 부목사와 교회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해 존립하고자 했으나 잠시뿐이었다. 북에서 온 기독교연맹은 자기들의 지배 아래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선전했으나 사실상 공산군 점령하에서 교회는 폐쇄되고 예배는 불가능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인천(7월 3일), 수원(4일), 천안(6일)을 차례로 점령하고 공주(15일), 대전(24일)을 장악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해 7월 말에는 목포와 진주를 점령하고 8월 초에는 김천, 포항을 점령했다. 9월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대부분 지역을 수중에 넣어 남한의 90% 이상을 장악했다.
전쟁 기간에 남한의 1,078개 교회가 파손되었는데, 이 중 35%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전쟁 중 학살된 기독교인 중 신원이 밝혀진 교역자만 176명, 납북된 교직자는 240명에 달했다. 부산과 인근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사실상 예배가 불가능했고, 집회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담보한 예배를 드린 교회와 성도들이 없지 않았고,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은 1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은 예배 중에 끌려가거나 주일 성수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경남의 경우, 거창 가천의 박기천 전도사는 27세의 나이로, 경남 합천 관기리의 배추달 집사는 24세의 나이로 예배드리고 주일을 성수하려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되었다. 함안 사촌교회 조용석 장로는 배교를 거부해 총살당했다. 전라남도 영광의 염광교회와 야월교회 성도들의 집단적 순교는 널리 알려져 있다.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의 순교적 신앙 정신은 오늘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후 12일이 지난 7월 8일 첫 포로가 생겼고 대전, 대구, 부산으로 전전하던 포로수용시설은 포화상태였다. 인천상륙작전 후 인민군 포로가 5만 명이 넘었고, 1950년 10월 말까지 국군과 유엔군이 관리하는 포로 수는 11만7천여 명에 달했다. 12월 3일에는 14만6천135명으로 불어났다. 1950년 10월 25일 이후 중공군 포로까지 수용되기 시작하자 포로수용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1951년 2월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해 6월 말에는 거제도에 수용된 포로 수가 14만 명을 넘었다. 이곳의 포로를 위해 전도하고 예배를 인도했던 선교사가 옥호열(Harold Voelkel, 1898~1984) 목사였다.
포로수용소는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생존의 갈림길에서 이념적 대립은 폭력과 살인을 동반했다. 이런 곳에서도 간이 천막을 치고 전도하면서 집합 예배를 인도한 이가 있었다. 그가 포로로 잡혀 왔던 임한상(任漢祥) 목사였다. 그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주일 예배를 시행했고, 처음에는 기독교 신자들조차 위난한 환경에서 집합 예배를 하는 것은 무모한 짓거리라고 비난했으나 점차 신뢰를 얻었고, 1950년 성탄절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에서도 울타리 없는 야외에서 4천 명의 포로들과 함께 감동적인 성탄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옥호열 선교사가 거제도에 갔을 때가 성탄 예배 직후였다. 목숨을 건 예배가 결국 포로 선교의 기초가 되었고, 포로 중 인민군 회심자는 6천 명, 세례받은 인민군 출신 포로는 2,266명이었다고 한다. 포로 중 장로교 감리교 혹은 성결교 신학교에 입학하려는 자가 642명에 달했는데, 이중 신학교에 진학한 130명의 학비를 월드비전이 지원했다. 임한상 목사와 옥호열 선교사의 전도와 예배 인도로 반공 기독교인 포로가 증가했고,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과감한 정책을 감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맺는말
종교의 자유, 집회와 예배 등 종교 행위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명목상 종교의 자유, 종교 행위의 자유를 인정해도 사실상 제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재 코로나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종교 행위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방해받고 있다. 교회당 수용면적과 관계없이 예배 인원을 제한하거나,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배당을 폐쇄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러면서도 천주교나 불교 등 타 종교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 이런 편파적인 법 적용과 불합리한 행정 명령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종교 행위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의지 없이 통상적인 예배를 포기하고 묵종하고 있고, 어떤 교회나 단체는 집합 예배를 드린 일에 대해 사과한다거나 대리 사과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윤태호 중앙사고수습본부 방역총괄반장은 지난 2월 1일 “대면 예배를 통한 감염이 사실상 지금까지는 거의 없었다.”라고 발표했고,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 사회전략반장도 “예배 환경이 밀집도가 상당히 낮고, 마스크 착용, 손 씻기, 사전방역 조치 등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대면 예배를 통한 감염은 사실상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라고 확인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은 마치 교회가 집단감염의 진원지인 것처럼 몰아세웠다. 교회 발 코로나 프레임을 씌워 교회를 탄압해온 것이다(FN Today, 2021년 2월 9일). 거짓 뉴스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실 확인(Fact Check)도 없이 묵종했다. 언제이든 어느 사회이든 집회와 예배를 포함한 종교 행위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paxsglee@hanmail.net>
글 | 이상규
고신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호주 장로교신학대학(PTC)에서 교회사를 연구했다. 호주신학대학(ACT)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칼빈 대학, 메노나이트 연합성경대학, 그리고 호주 메쿼리 대학교 초기기독교연구소에서 연구했다.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봉직하고 은퇴한 후 현재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일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학술상 등 여러 학술상을 수상했고, 『역사의 거울로 본 교회 신학 기독교』 등 여러 책을 저술하거나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