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윤리의 의학

생명윤리의 의학

2021-03-23 0 By 월드뷰

월드뷰 MARCH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3


글/ 이명진(성산생명윤리연구소 소장, 의사 평론가)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의 생명윤리
생명윤리와 의학 _이명진 원장
생명윤리와 법 _전윤성 미국변호사
한국의 생명윤리법 _연취현 변호사
환자의 자기결정권 _장지영 교수
의료 정의 _문지호 회장
생명윤리와 프로페셔날리즘 _최숙희 원장
생명의 시작점과 종결점 _이상원 교수
줄기세포연구와 생명윤리 _강경성 교수
크리스퍼 가위와 생명윤리 _류현모 교수
낙태, 피임 그리고 시험관 수정 _ 홍순철 교수
안락사와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 _이상원 교수
장기이식 _문지호 회장


의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생명윤리에 대해서 인류는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의학 분야에 생명윤리가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큰 재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의과학의 발달로 여러 가지 연구에서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더라도, 임상 분야에서 실제로 적용되지 않는다. 의학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우선하는 의학의 윤리적 기준을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생명윤리의 개념과 생명윤리를 위협하는 사상, 생명윤리의 쟁점을 살펴보는 것은 생명윤리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생명윤리와 전문직 윤리


생명윤리는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의 가치를 파악하고 존엄성을 지키는 학문이다. 의학과 철학과 윤리학을 모두 포함하는 ‘생명윤리’는 1970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학문적 체계를 잡았다. 미국 케네디 연구소에서 발간한 1978년 판 <생명윤리 대사전>은 생명윤리를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행위를, 윤리 원칙과 가치에 비추어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의료영역에 관련된 윤리에는 실천윤리로 알려진 생명윤리의료윤리, 전문직 윤리가 있다. 이 세 가지 윤리 중에, 생명윤리와 의료윤리를 합하여 생명의료 윤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생명윤리로 통칭하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윤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먼저 생명윤리는 낙태를 포함하여 주로 첨단과학에 관련된 윤리 문제들을 다룬다. 배아줄기세포 연구, 유전자 검사, 임상시험과 관련한 IRB(Institutional Review Board, 의학연구윤리심의위원회), 장기이식, 시험관아기, 대리모,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 의료윤리는 임상 윤리라고도 불리는데, 임상에서 환자를 진료하며 발생하는 윤리적 갈등들을 다룬다. 연명의료 결정, 한정된 자원의 배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전문직 윤리는 직능 윤리라고도 불리는데, 의사가 갖추어야 할 전문직 직업윤리를 말한다. 환자에게 진실 말하기(truth disclosure), 환자의 사생활 보호(privacy), 환자의 비밀 보호(confidentiality), 환자의 이익 우선하기, 이해 상충 (COI, Conflict of Interest)의 관리, 의료자원의 절약(distribution of resources) 등이 여기에 속한다.


생명윤리를 위협하는 사상들


윤리적 상대주의는 중세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시대부터 주목받으면서, 현대 생명윤리를 위협하는 사상으로 떠올랐다. 이후 르네상스와 인본주의 맥락은 루소와 칸트에 의해 계승되었다. 절대적인 진리, 절대자에 대한 개념을 무너뜨린 헤겔은 변증법을 주장하며 모든 진리는 상대적 진리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타고, 윤리가 윤리적 상대주의에 물들면서, 절대적인 윤리와 규범이 위협받게 되었다. 즉 시대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윤리와 규범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절대 진리를 부인하고 다수의 사람이 찬성하는 것이, 윤리의 기준이 되고 규범과 법률이 되었다. 사회의 51%가 찬성하는 것이 도덕이고, 규범이고 법이 되었다.

두 번째 생명윤리를 위협하는 사상은 유물론 결정론이다. 생명윤리에 있어서 유물론은 첫째, 인간을 인격으로 보지 않고 물질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과거 미래를 결정한다는 결정론을 받아들이면, 도덕이 설 자리가 없다. 현대 사회는 유물론과 결정론과 기계론적 인간관을 수용하게 되어 유전자 조작을 막을 수 없다.


생명윤리와 현대의학의 흑역사


생명윤리 의식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독일 나치와 일본 731부대에서 시행한 인체실험이 생명윤리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47년에 제정된 뉘른베르크 강령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생명의 존엄함과 인권의 소중함을 명문화한 규정이다. 이 강령의 배경에는 2차 대전 중에 독일군이 전쟁포로와 유대인 난민을 대상으로 저질렀던 인체실험이 있다. 전범 재판인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같은 이름을 따서 뉘른베르크 강령이 만들어졌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의 기본원칙을 담은 최초의 강령이다. 인간 피험자의 자발적 동의, 인간에게 이익이 되어야 할 것, 동물실험을 먼저 할 것, 불필요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나 손상을 피할 것, 사망이나 신체장애가 발생하지 않을 것, 과학적인 자격을 갖춘 연구자가 실험할 것, 해로운 실험은 중단할 것, 피험자가 어떤 실험에서도 도중에 그만둘 권리를 보장함 등을 담고 있다.

그리고 터스키기(Tuskegee) 매독 실험 사건은 연구윤리를 수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32년부터 40년 동안 미국 정부가 가난한 흑인 600여 명을 상대로 매독 실험을 자행한 비윤리적인 사건을 발단으로 벨몬트 원칙이 만들어졌다. 터스키기 지역에 사는 가난하고 문맹인 흑인들에게 나쁜 병에 걸려 있으니 정부가 치료해주는 것이라고 속여 정기적으로 피를 뽑고, 매독으로 죽어가는 흑인 환자들의 경과를 관찰한 것이다. 이에 벨몬트 원칙은 연구윤리에 관한 세 가지 기본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인간 존중 원칙, 두 번째 선행의 원칙, 세 번째 정의의 원칙이다.

그 이후 1964년 6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제18차 세계의사회 총회에서 채택된 것이 헬싱키 선언이다. 당시 급속하게 발전하는 의과학과 함께 새로운 의료기술과 의약품을 연구하는 의사들에게 지침이 필요했다. 뉘른베르크 강령은 인체실험(Human Experiment)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헬싱키 선언은 인체실험에 임상 연구(Clinical Research) 내용이 추가되었다. 인간 대상 연구의 일반적인 윤리 원칙을 담고 있으며, 이후 기관심사위원회(IRB, Institutional Research Board) 도입의 기초가 되었다.


금기를 넘어서고 있는 생식세포 연구


2015년 12월, 국제 과학자 그룹은 “인간 생식세포에 유전자 편집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이기 때문에, “안전과 효능 문제가 해결되고 적절성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있을 때까지 사용을 중단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중국이 음성적으로 유전자 편집기술(CRISPR)을 개발하는 등 앞서 나가자 선진국도 한두 곳씩 인간 배아 연구에 관한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영국은 2016년 2월 유전자 가위 기술을 활용한 인간 배아 유전자 교정에 관한 민간 연구소의 계획을 승인했다. 일본도 ‘기초연구’라는 핑계로 인간 생식세포 편집을 허용했다. 미국도 보수적인 태도에서 선회해 “정자·난자 등 생식세포에도 유전자 편집 기초연구를 허용해야 한다.”라는 권고안을 내놓았다.

우리가 미끄러운 경사길에 첫 발걸음을 떼고 나면 그 방향을 바꾸거나 멈출 수 없이 미끄러져 내려가게 된다. 이것을 미끄러운 경사길(slippery slope) 효과라고 한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끔찍한 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첫 발걸음을 떼는 데에 신중해야 한다. 피임법의 도입은 낙태 합법화 주장으로 이어졌고, 배아세포 연구의 빗장을 열었다. 이제는 잉여 배아 연구로는 결과를 얻기가 힘드니, 신선 배아를 만들어 실험에 사용하게 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의 행동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해야만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그리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다. 생명윤리에도 이 기준이 적용된다. 생식세포에 대한 실험이나 조작은 3가지 중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영역’에 속한다.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호기심이 넘지 말아야 할 금기를 넘고 있다.


상품화되어가는 인간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불임이나 난임 부부가 늘어나면서 인륜을 거스르는 행위인 대리모 허용과 정자와 난자 은행을 만들어 제공하자는 주장이 많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을 팔고 사는 매매춘과 함께 난자나 정자, 인체 일부를 팔고 사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아이를 원하는 남성 동성애자 커플에게 대리모를 알선해주는 회사까지 성업하고 있다. 인간을 상품화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생명윤리 영역에서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 가치, 인격을 지켜 가야 한다. 남들이 다하고 있으니 해도 된다는 의견 역시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인체 장기가 상품화되어 매매되는 게 합법화된다면, 사회적 약자가 착취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합법이라고 윤리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장기 공여자는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이나 신체적,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이 희생당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붕괴로 이어져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상황


우리나라의 경우 황우석 사태 이후 생식세포 연구나 배아세포 연구에 관한 규정을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을 통해 매우 엄격하게 운영하고 있다. 인간 복제를 금지하고, 이종 간의 착상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금기의 영역에 뛰어든 연구진들이 생식세포에 관한 실험을 감행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이 분야의 연구는 상업적 이득이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이기에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이에 대해 희귀병과 난치병 치료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생식세포의 경우 후대에 유전물질이 전달된다는 위험성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불법인 생식세포에 대한 유전자 조작 규정을 피하고자 다른 나라에 가서 연구를 진행하는 편법을 쓰고 있다. 일부에서는 엄격한 연구 규정을 완화해야 ‘국제 경쟁력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라는 논리로 생명윤리를 위협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성염색체나 생식세포와 관련된 연구는 연구 의도와 방법, 결과가 모두 바르지 않으면 인류에게 큰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이미 우리는 황우석 사태를 통해 쓰라린 경험을 했다. 물질 만능주의와 성취욕에 삐뚤어진 인간의 욕망 그리고 물욕에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mnose1@hanmail.net>


글 | 이명진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의료윤리연구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소장, 의사 평론가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생명윤리와 의료윤리 확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이명진 원장의 의료와 윤리> 외 2권, 번역서로 < 의학 전문직업성 교육> 공저로 <성사랑 가정> < 코로나19와 교회 셧다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