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역사 왜곡의 시작 ‘흥선대원군'(3): 흥선 대원군은 국가 법전을 편찬할 수 없다

근현대사 역사 왜곡의 시작 ‘흥선대원군'(3): 흥선 대원군은 국가 법전을 편찬할 수 없다

2021-03-22 0 By 월드뷰

월드뷰 MARCH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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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병헌(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우리나라 근현대사 왜곡은 ‘개혁 정치’의 아이콘 흥선 대원군으로부터 시작한다. 흥선 대원군은 일국을 경영할 어떠한 지위나 직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행위를 증명할 수 있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조일수호조규는 통상조약으로 애초에 유불리가 있을지언정 평등이나 불평등으로 평가할 수 없고, 12개 조관 어느 것을 보더라도 불리할 게 없는 지극히 평이한 내용이다. 이에 본 칼럼에서는 근현대사 왜곡의 시작 흥선 대원군을 다음과 같은 목차로 연재한다.

1.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의 공사 감독이었다.
2. 조정 대신의 인사권은 국왕에게 있다.
3. 흥선 대원군은 국가 법전을 편찬할 수 없다.
4. 서원 철폐, 흥선 대원군은 실무 책임자였다.
5. 척화비, 국왕인 고종의 명으로 세워졌다.
6. 흥선 대원군, 어느 자리에서 하야(下野) 했나?


조선조의 법전은 건국 초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필두로 새로운 법령이 쌓이고 미비점이 발견될 때마다 이를 보완하는 속전(續典)을 간행하다가, 세조 때 통일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성종 2년(1471)에 비로소 시행하니 이것이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다. 이후 영조 22년(1746)에 <경국대전> 이후의 모든 법규를 모아 <속대전(續大典)>을 편찬하고, 정조 10년(1786)에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그리고 그 뒤에 제정된 법규를 모아 다시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했다. <대전통편> 체제 이후 80년이 된 1865년, 그동안 누적된 수교(受敎)와 품주(稟奏) 정식 등을 보완하고, 새로운 법전을 완성해 반포하니 조선의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이다. 이렇게 편찬된 <대전회통>에 대해 모든 한국사 교과서는 흥선 대원군이 통치 체제의 재정비를 위해 편찬한 것으로 서술했다.

<대전회통>, 한국학중앙연구원.

과연 그럴까? <승정원일기>에 실린 <대전회> 편찬 관련 기사다.

영의정 조두순이 아뢰기를,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정조(正祖) 을사년(1785)에 완성되었으니 지금 8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수교(受敎)와 품주(稟奏)하여 법식으로 정해진 것 중에서 조례에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하나로 모아서 일이 있을 때에 참고하는 것 또한 옛 법을 잊지 않고 따르는 뜻이 될 것입니다. 실록 편찬이 끝나기를 기다려 따로 임시 관청을 설치하는 동시에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을 차출하여 분담해서 수집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니, 대왕대비전이 답하기를,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1865(고종 2). 3. 16)

1865년 3월 16일 희정당(熙政堂) 차대(次對)에서 영의정 조두순은 정조 때 완성된 <대전통편> 이후 8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쌓인 수교(受敎: 임금의 敎命)와 품주(稟奏: 임금에게 상주한 것) 정식을 보완한 새로운 법전 편찬의 필요성을 보고하고 대왕대비가 이를 허락함으로써 새 법전의 편찬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편찬 작업은 <철종대왕실록> 완성과 함께 윤 5월 18일 교서관(校書館)을 교식찬집소(敎式纂輯所)로 정해 진행되었으며, 같은 해 9월 25일 고종의 전교(傳敎)에 따라 <대전회통>이라는 이름을 정하고 11월 30일에 완성해 반포했다.

<대전회통>이 완성되자 육조(六曹) 각 관아의 사무 처리에 필요한 행정법규와 사례를 모은 <육전조례(六典條例)>의 편찬도 계속 작업으로 진행해 고종 4년(1867)에 반포했다. 물론 장소와 인원은 그대로였다.

찬집소(纂輯所)에서 보고하기를, “『대전회통』을 지금 반행하였습니다. 서울의 각 아문의 대소 사례를 대략 『회전(會典)』의 규식(規式)으로 만들어 『육전조례(六典條例)』라 이름하고 이어서 찬집하는데, 당상과 낭청은 『대전회통』을 교정하고 감인(監印)할 때의 인원을 그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1865(고종 2). 12. 17)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대전회통』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건의를 받아들인 국왕의 명에 의해 편찬된 것이다. 수렴청정에 있는 대왕대비의 명도 국왕의 명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정상이고 상식이다. 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1865년 왕명에 따라 영의정 조두순(趙斗淳), 좌의정 김병학(金炳學) 등이 『대전통편』 이후 80년간 반포, 실시된 왕의 교명과 규칙 및 격식 등을 <대전통편> 아래 추보한 뒤 교서관(校書館)에서 출판하게 된다.’라고 한 서술에서도 확인된다.

고종 옥보.

이와 같은 역사 기록과 백과사전의 서술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는 개혁 정치라는 미명(美名) 하에 흥선 대원군이 두 법전을 편찬한 것으로 서술했다. 왜 이러한 서술이 나오게 되었으며, 언제부터 이렇게 서술하게 되었을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우리역사넷’을 추적한 결과 그 뿌리는 국권 상실기 일제의 <교수참고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교수참고서>는 오늘날의 교사 지침서에 해당한다.

대원군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 등에게 명하여,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정조(正祖) 이후의 교령(敎令)과 정식(定式)을 보충하여 편집하도록 하였다.【이 태왕 2년】그와 동시에 <양전편고(兩銓便攷)>, <육전조례(六典條例)>도 편성하고 서로 보완하여 완비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춘관통고(春官通考)> 천여 권을 교정하여 이조(李朝)의 고사를 편집하였다.
(우리역사넷, 심상소학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

이것은 국권 상실기의 일본 역사 보충교재인 <교수참고서>에 수록된 것으로 ‘교수(敎授) 요지’와 함께 비고(備考)에 서술된 내용이다. 비고의 ‘󰡔대전회통󰡕 및 그 외의 법전들’이라는 제목 아래 기술된 내용에는 ‘대원군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 등에게 명하여’라 하여 흥선 대원군이 영의정 조두순에게 직접 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이렇게 시작된 역사 왜곡은 이후 수차례에 걸쳐 개정된 국사 교과서에 그대로 답습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교수참고서>가 어떤 성격의 책인지는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항목에 대한 ‘교수 요지’를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본과에서는 먼저 일본과 러시아의 개전(開戰) 사정을 서술하고, 일본이 고작 십수 년간에 국운(國運)을 걸고 두 번에 걸친 일청전쟁과 일러전쟁을 하게 된 이유를 가르친다. 당시 조선은 외교적으로 강국들에게 저항할 실력이 없어서 움직이기만 하면 그들에게 유린당하였으므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던 일본은 이웃 나라를 구하고, 또한 자국을 보호하려고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렀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장래에 다시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한국의 외교 사무를 일본이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우리역사넷, 심상소학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 교수요지)

<대전회통>은 <경국대전>으로부터 시작해 <속대전>과 <대전통편>으로 이어진 법전을 계승·보완한 조선의 마지막 법전이다. 국가 경영의 근간이 되는 법전이 공식적 통치기구인 국왕에 의해 편찬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일제는 공식적인 통치기구가 아닌 국왕의 사친이 영의정 조두순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으로 왜곡했다. 물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흥선 대원군에 의해 국가 정책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법전 편찬도 그랬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 기록에 반할 뿐만 아니라 상식적인 일도 아니다. 조선은 국왕의 나이가 비록 어리다 할지라도 삼정승(三政丞)을 비롯한 국가 조직에 의해 경영된 나라였다. 사적(私的) 권력으로 불법·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공식 석상에서 영의정에게 명을 내려 법전을 편찬했다는 서술은 조선의 국가 운영 체제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다.

일제는 이러한 서술로 고종은 국가 경영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무능한 국왕이며, 조선은 정당한 조직이 아닌 비정상적인 힘에 의해 움직이는 미개한 국가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일까? “조선은 외교적으로 강국들에게 저항할 실력이 없어서 움직이기만 하면 그들에게 유린당하였다.”라고 한 ‘통감부 설치’에 대한 교수 요지에서 우리는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일제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해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역사 왜곡이다. (다음 호에 계속)

<cleanmt2010@naver.com>


글 | 김병헌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성균관 대학교와 경원대학 강사를 거쳐 독립기념관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이다. 저서로는 <국역 사재집(思齋集)>, <국역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역주 이아주소(爾雅注疏) 전6권>, <화사 이관구의 언행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