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하와이 독립운동 시절
2021-03-08
월드뷰 MARCH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6 |
글/ 박원철(목사)
망명길에 정착한 하와이에서의 독립운동
조선 말, 나라가 속수무책으로 주변 열강에 의해 쓰러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가슴 아파했던 청년 이승만은 조선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한다. 그렇게 시작된 망명객의 세월은 프린스턴에서 유학했던 6년을 제외하고, 다시 망명길에 오른 1912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33년의 긴 시간을 미국에서 보냈다. 이후 대통령 직에서 하야해서 하와이로 가서 산 5년을 포함하면 무려 44년간을 미국에서 살았다. 그 긴 세월 동안 이승만의 머리 속에는 오직 “내 조국의 주권 회복인 독립과 주변 열강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 않는 강성한 나라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온 몸을 바쳐 사랑해야 할 한 여인이었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한인 교포들의 가슴속에 기독교 신앙과 애국 독립사상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가 하와이에서 활동했던 사역 가운데 세 가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는 ‘105인 사건’의 진실을 규명한 <한국 교회 핍박> 저술, 둘째는 순 한글 신문인 <태평양잡지>의 출간 그리고 셋째는 기독교적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한인여학원>의 설립이다.
그가 하와이에 도착한지 두 달 만에 탈고한 <한국 교회 핍박>은 한국 교회 성도와 지도자라면 누구나 꼭 읽어야 할 소중한 책이다. <한국 교회 핍박> 안에는 이승만이 이해하고 바라본 한국 교회의 미래, 일본은 결코 한국 민족의 혼을 말살시킬 수 없다는 선언, 아시아의 모든 국가는 한국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국가가 될 것 등을 예언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한국이 일본에 대해 승리하는 길은 교회에 달려있다고 강조하며,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 교회를 파괴하거나 약화시킬 수 없음을 선언했다. 그의 글을 인용해 보면
“각 나라 교회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 같이 특별히 택하여 동양에 처음 기독교 국가를 만들어 아시아에 기독교 문명을 발전시킬 책임을 맡긴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때 한국 교회를 돕는 것이 후에 일본과 중국을 문명화 시키는 기초가 된다고 하여 각 교회에 속한 신문, 월보, 잡지에는 한국 교회 소식이 그칠 때가 없으며, 교회 순례객들의 연설이나, 보도에 한국 교회에 대하여 칭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이승만은 미국과 유럽에서 한국으로 온 선교사들의 본국 교회에 선교 소식지를 보내서 한국과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자세하게 전달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일본의 강압 통치로 핍박받는 한국의 실정을 전 세계에 알리는 중개자 역할을 하게 됐고, 이로 인해 일본은 교회를 더욱 통제하고 말살시키려고 했다. 당시 이승만만큼 일본을 잘 아는 전문가는 없었다. 그는 주변 국가의 정세를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었다. 일본은 어떤 나라인지, 그들의 계략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군사 강국이 되려 하는지 그 실체를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1941년 출간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에서 일본이 멀지 않아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넉 달 뒤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자 미국인들은 이승만을 ‘예언자’라고 칭송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집필했던 <한국 교회 핍박>은 기독교 입국과 외교를 통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 한국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고,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교회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을 주제로 했다.
기독교 신앙과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하와이에서 이승만의 독립 운동은 “교육 계몽”에 역점을 두었다. 1913년 순 한글 잡지인 <태평양잡지(The Korean Pacific Magazine)>를 통해서 이승만은 지속적인 민족 정신 계몽을 실현해 나갔고, 당시 5천여 명의 한인 사회의 변화는 곧 민족의 장래와 연결된다는 확신을 분명하게 내비쳤다. <태평양 잡지>1914년 6월호에 실린 이승만의 “종교상 형편”에 보면 한국 민족의 장래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는 확신을 강조했다. 당시 일본의 강압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스스로의 주권 회복이 불가능하던 때에 홀로 “예수 교회만이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며 교회를 통해 민족이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적 믿음을 설파한 것이다. 이승만이 추구했던 교육 계몽의 근간은 예수교 신앙이었다. 그는 예수교 정신이 “썩어진 민족의 정신과 도덕을 새롭게 할 유일한 방법”임을 간파했다. 이승만이 말하기를 한인 들은 전 세계 어디에 살더라도 “모든 죄악 속에서 아주 썩어진 민족을 구하여 내는 것이 죽은 대한을 살려내는 기초요, 주색잡기에 묻혀서 사망을 취하는 한국 백성을 구하여 내는 것이 잔멸한 대한의 한 사람을 건져내는 줄로 알아 이 도덕심으로 모든 것에 기초를 삼아 다 완전한 사업이 되어 영구한 문명 부강에 나아가는 첩경”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공립학교가 많이 있었지만 영어로 교육하는 ‘한인여학원’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1916년 11월13일 드디어 하와이 정부의 설립인가를 받고 국가 사상, 성경 교육, 한국 역사, 한문, 한글 교육, 품행 교육 등을 가르쳤다. 그는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한인들에게 기독교적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시켜 독립운동을 준비시키고자 했다.
다음은 이승만이 왜 ‘한인여학원’을 설립했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한 글이다
“하와이에 공립학교가 많지만, 여러 기독교단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들도 많이 있다. 그 까닭은 사립 학교에서는 종교 교과서를 가르치지 못하며, 사립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가르치는 이외에 학생의 품행 도덕과 또한 자기들이(성공회, 천주교, 감리교회) 원하는 주지를 가르친다. 한인여학원의 주지는 1) 우리의 국가 사상을 머리에 넣어준다. 2) 국어와 한문과, 대한 역사, 지리, 작문 등을 교육한다. 3) 성경을 교육한다. 4) 학문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식과 도덕 정도가 높은 미주 본토 교사들이 언어 동작과 모든 품행 등에 표준이 되도록 한다. 5) 각국인(여러 민족) 교사들을 통하여 외교상 이익을 얻는다. 6) 한인들이 이런 유익한 사업을 하는 것으로 각국인에게 칭찬을 받는다. 이 여섯 가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인들이 합심하여 이런 사업을 운영하는 중에 차차 독립사상이 발전되고, 모든 일의 규범이 되어 우리끼리 자치하여 간다면, 이것이 곧 독립의 근본이다”
이승만은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 독립하려면 가장 먼저 ‘새로운 사람’ 즉 기독교 사상으로 무장하고, 인격을 갖추었으며, 민주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일생 동안 ‘교육 계몽’이라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4.15 부정 선거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뒤, 하와이로 떠나서 임종하기까지 5년 동안은 그야말로 초라한 노인의 삶이었다. 일국의 대통령이었지만 이승만은 따로 준비한 비자금이나 부정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주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남은 일생을 보냈다. 노구를 이끌고 조국으로 다시 돌아갈 날만 꿈꾸고 있었지만 그의 귀국은 허락되지 않았고 끝내 쓸쓸히 하와이 병실에서 눈을 감았다. 이승만은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번영과 그가 사랑하는 국민이 다시는 주변 나라들에 의해 종의 멍에를 메지 않기를 기도했다.
끝으로 그가 남긴 유언의 기도문을 옮겨본다.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 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 버렸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굳게 서서 국방에서나 경제에서나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pwc325@gmail.com>
글 | 박원철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부터 미국에서 공부했다. 시카고 소재 North Park Seminary에서 영성신학 조교수로 섬겼다. 2003년 LA 국제 CCC 예수 영화 본부에서 미전도 개척 종족 선교 코디네이터로 섬겼으며, 북한을 포함한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미전도 종족 국가들을 대상으로 교회 개척선교에 헌신했다. 현재는 북한 선교에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