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이승만 그리고 김구
2021-03-07
월드뷰 MARCH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5 |
글/ 박명수(서울신학대 명예교수)
이승만과 임시정부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그가 1925년 임시정부에 의해서 탄핵당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이 임시정부와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임시정부는 김구에 의해서 주도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려면 김구가 역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해방 직전의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정부였기 때문에 우파로만 이루어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했으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김구와 좌우합작에 있다고 설명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는 탄핵 사건 이후에 이승만은 임시정부와 어떤 관계였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 직전 임시정부의 정확한 모습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본 글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이승만
3.1 운동은 이승만의 탁월한 국제정세 인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를 공부했는데, 그 시기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은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었다. 윌슨은 종종 이승만을 자기 집으로 초청해 격려하기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다. 이승만은 윌슨의 정책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약소민족에 관해서 관심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승만은 만일 미국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한반도에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 이전에 이미 국내와 해외의 동포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총궐기할 것을 요청했다. 독일의 항복 이후에도 이런 노력은 계속되었고, 여기에 중국 상해, 일본 동경, 그리고 국내 기독교 인사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천도교 세력까지 가담해 3·1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3·1 운동이 일어난 다음에 당시 상해에 민족대표의 명령으로 파송된 현순이 제일 처음 한 일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3·1 운동의 기획자였기 때문에, 3·1 운동 직후에 만들어진 여러 곳의 임시정부에서 신생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출되었다. 노령 정부에서는 국무 및 외교총장, 상해 정부에서는 국무총리, 한성 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였다. 이 셋을 통합한 상해 정부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그 정통성을 한성 정부에 두었다. 그것은 한성 정부가 유일하게 국내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하면 통치자는 피통지자와 합의에 따라야 하는데, 당시 피통치자는 한반도에 사는 한인들이다. 이들이 선출한 지도자가 국제적인 정당성을 갖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은 자신을 서울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3.1 운동 이후 만들어진 임시정부는 모두 민주공화국을 지향했는데, 이승만은 상해의 현순에게 전보를 보내 새로 만들어지는 국가는 기독교와 미국식 민주주의에 기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4월 11일에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반영되어 있다. 이승만의 임시정부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맹에 가입하기 위해 결의를 했지만,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은 임시정부를 공산정부로 만들려고 했고, 이승만은 결국 이들의 선동 때문에 탄핵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공산화되지 않았다. 김구를 비롯한 우익세력이 임시정부를 지켰기 때문이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정통을 수호했고, 자신이 주석이 된 다음에도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를 선배로서 깍듯이 대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일본은 더는 서양제국의 지배를 받는 2등 국가가 아니라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갖는 패권 국가가 되기로 작정했다. 일본은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인들은 일본의 실체를 국제사회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구의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에게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수뇌부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다. 이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김구에게 연락해 11월 10일 임시정부의 전권대사로 임명된 후,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했다. 비록 이승만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상당히 복원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이승만의 임정 승인 운동
3.1 운동 이후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국제사회의 도움을 얻지 못했던 이유는 국제사회의 일본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서구제국과 강력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승만의 대일 투쟁은 커다란 장애 앞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일본과 서구제국 사이의 유대가 점점 붕괴되고 있었다. 만주사변으로 인해서 서구제국들은 일본이 아시아에 독자적인 질서를 구축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때는 무르익지 않았다. 이승만은 국제연맹을 통한 외교에 실패하고서 오스트리아의 프란체스카와 결혼을 하고, 하와이에 가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전선은 점점 태평양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이승만은 멀지 않아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승만은 “외교에는 귀신”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국제정세에 밝았다. 그는 결코 때를 놓치지 않았다. 국제정세가 이렇게 요동할 때인 1939년 봄, 이승만은 오랜 하와이 생활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향하였다. 그는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면 한국에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우선 워싱턴에서 과거 자신이 만들었던 구미위원부를 재개하고, 1941년 4월 김구의 임시정부로부터 주미위원회 위원장 겸 주미전권대표로 임명받았다. 이것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1941년 여름, 유명한 <일본내막기>를 썼는데 여기에서 일본의 야욕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은 1941년 12월, 일본은 하와이를 공격했다. 소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에 이승만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연락해 대일전을 선포하게 하고, 임시정부의 위임을 받아 미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승만이 해방 직전 행한 활동은 미국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승인받게 해서 조선이 승전국의 일원으로 해방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해서 이승만은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했다.
이승만의 임정 승인 운동은 근본적으로 미국 국무부를 상대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 국무부 최대의 관심은 소련과 협력해 일본과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공주의자이며 반소주의자인 이승만과 김구가 주도하는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면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무기를 주고, 훈련받을 기회를 준다면 일본과 싸울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은 미군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을 활성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 의회에 임시정부 승인 운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상·하 양원에 임시정부 승인 결의안을 제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이승만의 대미활동은 중경의 임시정부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중경의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좌익과 협력하라는 강력한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소련과의 협력을 의식한 미국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김구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좌우의 대등한 합작이 아니라 김원봉의 그룹이 임시정부에 충성하기로 맹세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시정부에는 절대다수의 민족주의자 속에 소수의 좌익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좌우합작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익이 좌익을 포용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김구는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의 연대를 통해서 우익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소련이 극동지역에 진주하게 되자 임시정부 내의 좌익은 본색을 드러냈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임시정부를 해산할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임시정부가 조선에 들어가면 그들이 꿈꾸는 좌익 정부를 세우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은 결국 귀국한 뒤 1946년 2월 소위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좌익 연합전선에 가입해서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성립을 방해했고, 북한으로 가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이승만과 김구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승만은 김구가 필요했고, 김구는 이승만이 필요했다. 김구는 이승만을 존경했고, 그에게 해방 후의 리더쉽을 넘겨주고자 했다. 그래서 김구는 귀국 직전 이승만에게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귀국할 것과 자신은 이를 지원하는 일을 할 것이라는 내용의 전보를 쳤다. 비록 이 전보가 이승만에게 전달되지는 못했지만, 이것은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와 대립되는 인물인가?
이승만은 결코 자신을 임시정부와 대립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1945년 해방부터 1947년 말까지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행동했다. 특별히 김구의 반탁운동은 남한에서 공산세력을 막고, 우익세력을 단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김구가 이승만의 협조를 얻어 반탁운동에 매진하지 않았다면 해방정국에서 좌익을 이기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1948년 이승만과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 문제로 서로 갈라섰지만 1949년 5월 회동을 가졌고, 이 회동이 끝난 다음에 김구는 ‘우리 세 사람(이승만, 김구, 김규식)은 별 차이가 없다’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김구는 북한의 조만식에게 연락해 남북 민족주의 지도자 대회를 하려고 했다. 김구의 뜻은 이승만과 같이 자유민주주의적인 통일이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기회가 있는 대로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1948년 이승만이 주도해서 세운 대한민국 헌법은 근본적으로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같은 것이다. 이 두 문서는 다 같이 우리 국가의 이름을 대한민국이라고 부르고, 그 정체를 민주공화국이라고 했으며, 권력의 분립이라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따르고 있고, 개인의 권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승만과 임시정부는 같은 꿈을 갖고 있었으며, 같은 방향을 추구했다. 김구 역시 1948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이승만과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이승만과 임시정부, 이승만과 김구를 대립시키려는 시도는 잘못되었다고 본다.
<mspark@stu.ac.kr>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대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다. 저서로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