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국민통합 이념, 일민주의

이승만의 국민통합 이념, 일민주의

2021-03-09 0 By 월드뷰

월드뷰 MARCH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글/ 주익종(이승만학당 이사)


2021년 일민주의에 주목하는 이유


오늘날 대한민국은 심히 분열되어 있다. 좌우의 이념 대립, 영호남 지역 갈등, 빈부 갈등과 같은 전통적인 갈등에 더해 새로 청년, 노년 간 대립과 청춘 남녀 간 대립까지 한국 사회는 한마디로 갈가리 찢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곳곳에서 상대에 대한 비하와 조롱, 혐오가 넘친다. ‘좌빨’, ‘7시 사람들’, ‘적폐세력’, ‘토착 왜구’, ‘틀딱’, ‘김치녀’, ‘한남・일베충’, ‘꼴페미’등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반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공화국’을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은 70여 년 전 이승만의 고민이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 역시 문벌과 반상의 구별, 빈부와 남녀차별, 지방색 등의 온갖 이유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분열된 사람들을 모아서 나라를 세우고 국민을 형성해야 했다. 21세기의 한국인이 진정 ‘공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더 열악한 상황에서 새로 하나의 국민을 만들려고 했던 이승만의 고민과 노력을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여기에 이승만의 일민주의(一民主義) 이념을 살펴볼 이유가 있다.


이승만의 일민주의 제기


이승만은 건국 후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를 일민주의로 제창했다. 일민주의의 내용이 알려진 것은 1949년 4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방송국에서 했던 방송강의에서였다. 이승만이 일민주의에 관해 직접 설명한 만큼, 이것은 일민주의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준다. 거기에는 네 가지 강령이 있었다.

제1강령은 ‘문벌을 혁파하고 반상의 구별을 없애자’이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한일병합 후 민법 시행으로 만인의 법 앞의 평등이 선포되었으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전의 문벌의식과 반상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하에서도 반상의 신분은 해소되지 않았다. 촌락에서 양반과 상민의 차별은 여전했으며, 농촌 주민 사이에서는 여전히 신분내혼(身分內婚)이 일반적이었다. 한국인은 문벌 반상의식을 철폐해야만 자유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수 있었다.

제2강령은 ‘빈자와 부자가 동등한 권리와 복리를 누리게 하자’는 것이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처럼 빈부 자체의 철폐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자라도 부자와 동등한 권리와 복리를 누리고 재정가와 노동자가 평균한 이익을 누리고 서로 도우며 보호하자고 제창했다. 이 제2강령의 취지는 경제 주체들이 합작하는 원리로서 ‘동권’을 강조한 것이었다.

제3강령은 ‘남녀동등’으로 이것은 민주주의의 큰 정강이다. 여성의 인권은 조선 시대에 악화의 길을 걸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남녀차별은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여성의 권리가 부정되었다. 여성은 상속에서 제외되었으며, 삼종(三從)의 도의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을 강요당했다. 심지어 효부와 열녀를 상찬함으로써 여성에게 죽은 남편의 뒤를 따르는 순사(殉死)를 강요하기까지 했다. 이에 이승만은 ‘남녀동등’을 일민주의의 ‘가장 중요한 점’으로 강조했다.

제4강령은 ‘지방색을 타파하자’이다. 조선왕조는 서북인과 호남인을 차별했다. 지방색은 독립운동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영수로 하는 기호파와 안창호를 영수로 하는 서북파가 대립했다. 1925년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은 서북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서북파 사이에서는 “일본놈은 30년 원수요, 양반은 500년 원수”라는 살벌한 말이 돌 정도였다. 지방색으로 인해 뼈아픈 경험을 한 이승만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를 되뇌었다. 지방색을 타파하자는 일민주의 제4강령은 여기서 나왔다.


일민주의 정신의 부활이 필요하다


이승만의 일민주의는 당시의 일반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측근 정치가와 지식인은 민족주의 시각에서 이승만의 일민주의를 이해하고 보급했다. 그들은 일민주의가 ‘한 핏줄’과 ‘한 운명’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국민이 천부(타고난)의 자유권을 가진 다 같이 동등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대신 하나의 백성,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단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승만도 6·25전쟁 후에는 일민주의의 교육과 보급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민주의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지 않더라도 이승만의 메시지는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와 증오를 쏟아내는 사회는 존속하기 어렵다. 사상과 이념, 빈부의 정도, 성, 나이가 달라도 모두 천부의 인권을 가진, 동등한 자유인 아닌가. 21세기의 한국인이 20세기 중엽의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한 차별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ijjoo79@nate.com>


글 | 주익종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한국근현대경제사 전공) 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이승만학당 이사 및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