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양에게 말씀을 먹이라
2021-02-23
월드뷰 FEBRUAR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3 |
글/ 김정준(총신대 교육대학원 교수)
나의 어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특별히 유머러스하거나 극적이지 않은데도 어머니의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려주셔도 그때마다 흥미로웠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에스더 이야기다. 마치 연속극처럼 “그래서요? 그래서요?”를 연발하며 동생과 함께 어머니의 무릎으로 바싹바싹 다가가며 하만이 꾸미는 모략에 마음을 졸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로 아쉽게 그날의 이야기가 끝나면 내일이 빨리 오면 좋겠다 기다리면서 성경에는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재미만은 아니었다. 살면서 뜻하지 않은 고난이 닥쳐 두려울 때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라는 믿음과 소망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뿌리를 캐면 어머니께 들었던 성경 이야기가 그 속에 있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딤후 3:14-15)라고 하신 말씀은 부모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자녀가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사는 일은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싶은 모든 부모의 바람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녀와 같이 읽기에는 분량도 내용도 만만치 않다. 이미 1540년에 삽화가 그려진 어린이를 위한 성경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런 고민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럴 때 성경에도 충실하면서 예술적으로도 가치 있는 성경 이야기 그림책을 발견하면 밭에 감춰진 보화를 캐낸 기분이다. <요셉 이야기>와 <모세 이야기>가 그런 그림책이다.
두 그림책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작가는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는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Brian Wildsmith)이다. 우리나라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찰스 키핑(Charles Keeping), 존 버닝햄(John Burningham)과 함께 영국의 3대 그림책 작가로 평가받는 대가이다. 그의 작품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유명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유년기를 영국의 요크셔 탄광촌에서 보냈으며, 그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눈길 닿는 모든 곳이 검정과 회색빛이었다’라고 회고하는 작가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교사로 일하면서 책 표지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옥스퍼드 출판사 메이블 조지((Mabel George) 편집장과의 인연으로 그림책 작가가 되어, 첫 작품으로 영국 최고의 그림책 상인 ‘케이트 그린어웨이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작고한 2016년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며 100여 권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에는 성경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림책도 15권 정도 포함되어 있다.
두 그림책은 모두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오는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지만, 사실 그림책이란 지면의 제한이 있고, 어린 독자들을 생각해 긴 문장으로 글을 쓰지는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축약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성경 이야기 그림책은 이미 본문이 정해져 있어서 글을 줄이는 일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탁월한 역량으로 색채와 그림, 구도와 선 등의 미술적 요소를 통해 글로 풀어내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요셉 이야기>와 <모세 이야기>는 모두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며 쌍둥이처럼 비슷한 화풍을 갖고 있다. 먼저 두 그림책이 모두 매 펼침면 전체를 금색 사각 프레임으로 감싸고 그 안에 글과 그림 텍스트를 제시하여 독자들이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공간이 떨어진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는 느낌을 준다. 금색 프레임 안에는 작가 특유의 대담한 색채와 섬세하게 공들인 그림 묘사가 인상적이다. 영원불멸을 상징하는 금색의 사각 프레임은 인간의 모든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다.
<요셉 이야기>와 <모세 이야기>의 표지를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님의 언약과 인도하시는 섭리가 묘하게 대비되고 있다. 두 표지는 모두 어마어마한 이집트 문명의 상징인 웅장한 건축물의 기둥이 양옆으로 세워져 있고 그 기둥 사이에 인물을 배치해 두었다. <요셉 이야기>는 가운데 계단의 높은 위치 중앙에 요셉이 있고 계단 아래쪽에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이 무릎을 꿇고 있다. 말하자면 히브리인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는 실마리가 되는 장면이다. 반면 <모세 이야기>는 구도는 비슷하지만, 양측에 늘어선 듯한 스핑크스 사이로 장정만 육십만인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는 장면이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실 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사백 년 동안 그들을 섬기며 괴롭힘을 당하다가 그 나라를 하나님께서 징벌하신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라는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요셉 이야기>의 요셉 옆에 마치 애완동물처럼 앉아있는 표범, 웅장한 건축물과 화려한 기둥은 그의 막강한 권력의 상징한다. 반면 <모세 이야기>의 표지는 중앙에 초승달을 그려두어 태양신을 숭배하는 애굽의 태양은 지고 초저녁에 잠시 뜨는 초승달마저 사라지면 어두움으로 덮이게 될 것이라고 암시한다.
<요셉 이야기>를 펼치면 첫 장면에서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선물하고 있다. 이 부자는 펼침 면 오른쪽에 비교적 크게 그려져 있지만, 왼쪽에는 열 명의 형제가 이들과 동떨어져 모여 있다. 형제들은 작게 그려져서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야곱과 요셉이 못마땅해한다는 것을 몸짓을 통해 금방 알 수 있다.
다음 장에서 형들의 미움을 받은 요셉은 마른 우물 안에 갇혀있고 지상에서는 형들이 애굽으로 가는 상인에게 요셉을 팔아버리고 만다. 요셉의 키보다 몇 배나 깊은 마른 우물과 그 주변의 견고한 땅은(작가는 그 땅이 얼마나 단단한지 세밀한 선들로 표현했다) 형들의 굳은 마음을 닮았다. 이어서 페이지를 넘기면 펼쳐지는 요셉이 쇠사슬에 묶여 도착한 이집트는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요셉은 화면의 정 중앙에 배치되어 있지만, 매우 작고, 다른 사람들이 낙타나 나귀, 마차를 타고 있는 데 비해 가장 낮은 위치에서 맨발로 끌려가고 있다. 그의 키를 몇십 배나 훌쩍 넘는 성벽의 웅장함과 겹겹으로 이어지는 성문은 성경을 글로만 읽었을 때 결코 느낄 수 없는 엄청난 이집트 문명과 국력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특히 깊이 있는 원근감을 충분히 살린 배경을 묘사하여 마치 극장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스케일 큰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웅장하고 거대한 이집트의 건축물과 기둥, 벽화와 조각상의 세밀한 묘사는 야곱의 소박한 장막이 그려진 첫 장면과 대조를 이루어 한순간에 거대 문명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요셉의 암담한 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 안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작가는 이 작품을 제작하기 전, 아내의 권유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장기간 여행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여행을 통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문명이나 지형은 물론 요셉과 모세에 대해 깊이 생각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건물과 배경이 사람을 압도하는 장면 묘사는 비단 요셉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왕이 꿈을 꾸는 침실도 잠든 왕이 위축되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바로왕을 둘러싼 기둥과 천장, 침대 위의 벽화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장면 묘사는 <모세 이야기>에서도 반복된다. 갈대 상자에 담긴 아기 모세와 그를 바라보는 공주, 이 광경을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는 미리암은 모두 나일강이나 주변 건물보다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특히 왼쪽 아래에 배치된 모세는 갈대 상자 안에 누워서 흘러가는 강물에 몸을 맡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아기이다. 그러나 그림책의 각 장면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와일드스미스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임할 때를 펼침면 한 장면으로 처리했다. 금색 사각 프레임 안에 디귿(ㄷ) 자 형태로 열 가지 재앙을 작은 화면에 나열하고, 그 안쪽 공간에 첫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는 히브리인의 가정을 그려 넣어 애굽의 온갖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호하시는지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는 장면은 어두운 그림자와 햇빛이 대비되어 태양신을 섬기는 애굽은 어둠 속에 있지만, 하나님 백성의 출애굽 행렬은 환한 햇빛 속에 있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작가는 유머도 잊지 않았는데 그림책 전체에서 딱 한 번 펼침면을 수평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행진하는 그림이 있다. 그 장면에서 구름과 불기둥이 의인화되어 진행 방향을 가리키는 만화적 표현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행동으로 옮겨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너고 나면 이전 장면과 달리 배경보다 인물에 집중하며 그림의 분위기가 바뀐다는 것이다. 마치 그동안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자기 백성을 구원해내시는 과정을 큰 그림으로 보여주다가 카메라를 줌인하여 그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삶도 놓치지 않고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보여주는 것 같다. 광야에서 눈처럼 내리는 만나를 춤을 추며 받아내는 장면은 이 그림책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된다. <모세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마침내 축복의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와 달리 표정까지 읽을 수 있을 만큼 인물의 크기가 커져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해방된 언약의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두 그림책은 대가의 작품답게 그림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한 장면도 쉽게 넘길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 부모는 자녀와 그림책을 볼 때 글에 집중한다. 물론 글을 함께 읽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자녀와 그림을 보면서 한 장면에 머물러 어떤 그림이 있는지 그 안에는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묵상하듯 맘껏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요셉과 모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그림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끝없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부모는 다시 창세기부터 성경을 곱씹어 읽어보아야 할지도 모르고, 자녀가 그림 속 이야기를 더 잘 읽어낼지도 모른다.
자녀에게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는 부모가 자녀에게 먹여야 할 영의 양식이다. 코로나로 인해 자녀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부쩍 많아진 요즘이다. 자녀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누자. 말솜씨가 부족한 부모를 위해 좋은 성경 그림책이 있다.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나 자기 인생을 살아가다 고난이 닥칠 때, 말씀 속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음을 새롭게 하는 평생의 근원 이야기를 만들어주자! 디베랴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와 말씀하시듯 주님은 부모들에게도 부탁하고 계신다. “내 어린 양에게 말씀을 먹이라”
<Joseph> https://www.youtube.com/ watch?v=IJBSygqUTvM
<Moses> https://www.youtube.com/ watch? v=JD3CmUCZ5LQ 에서 볼 수 있으며 번역본은 아라미에서 출판, 판매 중이다.
Brian Wildsmith 여러 작품은 https://www. brianwildsmith.com/ 에서 감상할 수 있다
<1211kimjj@hanmail.net>
글 | 김정준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여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오차노미즈 대학교에서 외국인 연구원으로 3년간 재직했으며, 한국 기독교 유아교육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교육대학원 유아교육 전공 조교수, 한국 구성주의유아교육학회 부회장, 한국유아교육학회 이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