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이야기 변증의 시대
2021-02-24
월드뷰 FEBRUAR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4 |
글/ 책읽는사자(작가, 사자그라운드 대표)
사실의 한계, 기독교의 새 사명
인간은 사실을 안다고 해서 바뀌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야식이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밤늦게 음식을 먹고, 의자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유산소 운동을 병행해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눈이 나빠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밤늦게 스마트폰을 수 시간째 쳐다보고, 성경 속에 내 삶의 문제를 푸는 정답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성경책을 펼치지 않는다. ‘사실’은 이성을 움직일지 모르나 그 정보가 곧바로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진실은 어떨까. 진실 역시 마찬가지다. “진실이라고 해서 그것이 당면한 내 삶과의 관련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참’은 분명히 좋은 것이지만, 실존적 매력은 이와 별개의 문제다(21).” 실존적 매력이란 무엇일까. 복음이다. 즉 복음은 참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실존적 매력’은 다른 영역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서점가에 성경책과 훌륭한 기독교 변증 서적이 차고 넘치는데도 사람들이 유명인이나 타로 카드 운영자에게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는 이유다. 그들은 복음보다 반복음적, 비 복음적인 것들에 마음을 뺏겼다. 그런 것들이 매력적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과연 이런 시대에 복음을 어떻게 전파해야 할까. 또한, 복음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그의 저서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를 통해 ‘내러티브 변증(narrative apologetics; 서사적 변증)’을 역설한다. 즉 이야기다. 맥그래스는 “이야기 속에 인간의 자연적 방어기제를 몰래 통과하여 우리를 무장 해제시키는 힘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16).”라고 말한다. 여태껏 기독교를 향한 과학적 계몽주의의 공격에 맞서 기독교를 이성과 합리라는 틀(tool)로 지켜냈다면 이제 기독교는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한다. “18세기만 해도 기독교가 참임을 보이는 일이 중요했지만, 21세기에는 기독교가 유효함을 증명하는 일이 중요해졌(23)”기 때문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기독교의 새 사명이다.
이야기는 영혼을 움켜쥔다.
사실은 이성을 자극하지만, 이야기는 영혼을 움켜쥔다. 복음은 곧 ‘예수님 이야기’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개념(槪念)이 아닌, ‘이야기(story)’로 인식한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이성적·합리적 설명이 중요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 때문에 기독교계는 이야기의 힘을 간과하거나 폄하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성적·합리적 방식의 기독교 변증이 유의미한 효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나 우리는 “리처드 도킨스 (Clinton Richard Dawkins)와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Eric Hitchens) 같은 신무신론자들의 엄격한 합리성(31)”이라는 공격 앞에서 기독교와 무신론은 둘 다 이성적 변증의 한계를 목도하게 되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역시 “기독교가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라 할 정도는 아님을(33)” 인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두 가지를 지적하는데 “첫째, 기독교는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 지적·실존적으로 만족스러운 이해를 제공하는 진지한 고려 대상으로 손색이 없다. 둘째, 신무신론도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할 정도는 아니며, 논증 및 증거 면에서 드러나는 명백한 결함을 주로 공격적 수사로 마무리한다(33).”라고 말이다. 쉽게 말해, 기독교 변증에 있어 합리주의는 그 어떤 ‘친구’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이야기다. (그건 상대 진영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그들은 “과학적 계몽주의 서사”, “우연과 무(無)목적성 서사” 등으로 인류의 주류·보편 세계관을 선점했다)
맥그래스는 이 지점에서 C.S. 루이스를 소환한다.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는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라 불리는 동시에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이기도 하다. “루이스 변증의 한 가지 중심 주제는 기독교가 제공하는 서사가 실재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 낼 수 있고, 우리의 주관적 경험과 관찰한 세계를 이해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33).” 주목해야 할 것은 이야기가 복음이라는 큰 그림과 인간이 갖는 주관적 경험 사이를 잇는 유의미한 다리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야기는 기독교의 유효함을 인정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것에 무관심하거나 반감을 갖는 시대에 그들에게 여전히 기독교가 제시하는 “메타서사(metanarrative)”가 인간의 일생을 잘 해석하고, 이해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 단 하나의 도구라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강력한 복음 도구가 될 수 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세상을 향해 ‘더 나은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최고의 서사가 다른 경쟁 서사들보다 우월한 이유는 ‘그 경쟁 서사들을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135).”
그렇다면 이야기 변증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할까. 예술이다. 신학은 예술과 만나야 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역시 “기독교를 변증하는 사람은 이렇게 기독교 이야기와 청중을 연결시키는 과제를 맡아서 우리 자신이 누구며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발견하도록 도울 힘이 복음 안에 있음을 보여 주려 한다. 이 지점에서 변증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의 이야기가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와 연결되고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도우려면 공감력과 상상력 같은 여러 재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169).”라고 주장한다. 기독교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고 지키기 위해 약 400년 동안 이성과 합리로 무장했다면 앞으로는 예술을 장착해야 한다. 이것은 소위 교회의 ‘문화 사역’과 결이 다르다. 교회 큰 절기 또는 전도 축제마다 이벤트성으로 행해지는 ‘교회용 예술 사용’이 아닌 세상 속 예술가 한 명 한 명을 길러내는 일이다. 소설계, 매스 미디어계, 인터넷 모바일 계의 사단의 진을 뚫고 그 땅 자체를 개간하는 복음의 ‘이야기꾼’, 크리스천 예술가 말이다.
드라마. 하나님의 드라마
반쪽짜리 자연과학은 인류에게 의미와 가치, 목적의 상실을 가져다주었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e Buber)는 인간을 순전히 과학적 관점에서만 보는 설명은 사람들을 일개의 대상으로, ‘너’가 아니라 ‘그것’으로 환원시킨다고 주장했다(166).” “부버는 개인 정체성의 본질이 관계 안에 존재하는 능력이라고 본다.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화학적·유전적 구성이 아니라 사회적·인격적 관계다(167).” 그러나 많은 사람은 아직도 ‘가짜 이야기’를 믿으며 살아간다. 의미의 부재에 따른 행복의 누수는 전염병 사태로 인해 가속화되었다. 집안에 홀로 있거나 집 밖으로 나가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서로를 차갑게 응시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 아닌가. 코로나 여파에 가장 이득을 본 기업이 넷플릭스라는 건 차가운 방 안에서 영혼의 백신을 맞기 원하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선택한 치료제가 ‘이야기’였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떤 이야기도 인간의 고독과 허무를 치료하는 백신 역할을 대체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만이 우리 인생의 의미와 가치, 목적을 되찾게 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이야기 변증의 중요성을 역설함은 매우 고무적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새로 만들려고 하기보다 이미 우리에게 차고 넘치는 자원을 사용하면 된다. 매 예배마다 영혼의 진액을 쏟아부어 설교문을 완성하고, 2천 년 전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최대한 쉽게 전달하기 위해 애썼던 스토리텔링은 수십만의 목사님들이 ‘위대한 기독교 작가’가 되기 위한 습작이 되었다. 모두 기독교 작가가 될 수는 없겠으나 낭중지추(囊中之錐). 준비된 자는 반드시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 또한, 크리스천 창작가 역시 더는 예술과 신앙 사이를 고민하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달란트를 사용해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올려드리는 크리스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작품에 무조건 예수님 이름을 새겨 넣을 필요는 없다. C.S. 루이스가 ‘아슬란’을 만들었듯,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자유의지와 창작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 진리의 운동장 안에서 마음껏 뛰놀면 된다.
한국은 콘텐츠 창작의 나라다. 영화와 노래, 소설과 각양각색의 예술 활동으로 전 세계에 귀감이 되는 특별한 나라다. 이제 이 재능으로 기독교 변증을 위한 이야기들 그리고 기독교 전파를 위한 이야기들을 창작하자. 상업적인 자본력이 부족해 기독교 영화를 못 만든다는 발상에서 벗어나자. 세상이 채택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매력’을 갖춘 작품들이 넷플릭스·유튜브에, 지상파·종편 채널에, 문학계·기독교 출판계에 차고 넘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오병이어 기적 아니겠는가. 그러니 뜨거운 신앙과 차분한 교리로 무장한 수많은 크리스천이여. 이야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내가 만난 하나님을 이야기하자. 대한민국 부흥의 내러티브는 이렇게 시작된다.
<sazaground@naver.com>
글 | 책읽는사자
작가이자 콘텐츠 제작가.성경적 관점으로 다양한 사회 주제를 다루고 있다. 책이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청년들에게 필요한 실제적이면서도 바른길을 제시하려고 노력 중이며, ‘사자그라운드’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책읽는사자의 신앙의 참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