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기다리며

꿈을 기다리며

2021-02-22 0 By 월드뷰

월드뷰 FEBRUARY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글/ 조혜경(소설가)


어린 첫째 딸과 둘째가 외할머니의 마당 한 켠에서 된장을 가지고 오다가 떨어뜨렸다. 나는 그렇다고 버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다가가 된장 덩어리를 줍고 고추장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장독대 쪽으로 갔다. 아마도 고추장을 가져오라고 시켰었나 보다. 외할머니가 뒤따라 오시며 고추장이 담긴 독을 일러주셨다. 키가 큰 독과 좀 작은 독엔 고추장이 가득 담겨 있다. 키 큰 독의 것이 더 퍼내기가 좋을 것 같아 그쪽으로 돌아가다가 깼다.

지난밤 꿈이다. 꿈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었던 외할머니의 얼굴은 선명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다시 보고 싶어 눈을 감고 재차 잠을 청해 보았다. 어떨 땐 그러면 계속 이어서 꿈을 꾸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고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길 바랐으나 끝내 잠들지 못했다. 핸드폰을 켜고 보니 새벽 이른 시간이었다. 독에 가득 담겼던 고추장이 의미하는 것이 있을까?

꿈이 매우 특별해지던 때가 있었다. 대학원 입학 후부터였다. 첫 개강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 천마산으로 출발하려 할 때 전화를 받았다. 사촌 여동생에게 위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사촌이지만 여자 형제가 없는 나에겐 친자매 같았고, 우린 유년 시절을 가까이서 함께 보내 각별한 사이였다. 수련회 내내 마음이 불안했고, 결국 기도 시간마다 여동생 기도만을 집중적으로 했다. 수련회가 끝나는 날 새벽, 꿈을 꾸었다. 꿈이 너무 생생해 진행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귀가해서 엄마로부터 여동생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과정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 새벽에 꾼 꿈과 너무 똑같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며칠 후, 막 개강 한 3월 중순이었다. 구둣방에서 굽이 낮은 정장 구두를 사 신는 꿈을 꾸었다. 발에 편하게 잘 맞고, 신은 모습이 몹시 맵시가 있어 마음에 꼭 들었다. 잠에서 깨고 나서도 정말 새 구두를 산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학교 가는 길에 K 전도사님께 꿈 이야기를 했다. 대학원 시험공부를 같이하고 함께 입학한 언니 같은 분이었다. ‘그래?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라고 해석해주셨다. 그날 점심시간 교수님 한 분이 나를 부르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보니 입학 전에 들었던 공개강좌 때 헬라어를 강의하셨던 교수님이셨다. 그분은 내게 ‘내 조교를 해보지 않을래요?’라고 물으셨다. 나는 라틴어에 홀리듯 끌려 공개강좌를 듣고 얼떨결에 대학원까지 입학했기에 신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조교라는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교수님께는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돌아와 두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한 분은 대학부터 신학을 전공하여 그 대학원 사정을 잘 아는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아침에 꿈을 해석해주었던 K 전도사님이었다. 한 분은 ‘리포트 걷고 교수님 채점하신 성적 옮겨 적는 일 정도 일이니 별로 어렵지 않을 겁니다. 하실 수 있어요.’라고 대답해 주었고, K 전도사님은 ‘하나님께서 꿈으로 벌써 알려줬잖아. 잘 맞는 구두처럼 편하고 좋은 일일 거야. 해봐!’라고 용기를 주셨다. 두 분의 조언으로 시작한 조교 일은 정말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내게 잘 맞는 구두를 신고 걷는 것처럼 편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한 달쯤 후 매우 이상한 꿈을 꾸었다. 두 채의 거대한 고택 사이를 경계 짓는 담벼락 위를 기는 뱀들의 꿈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뱀이 계속 나오는데 뒤따르는 뱀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 마지막엔 용처럼 생긴 거대한 동물이 나오고 곧이어 뭔가가 터지면서 엄청난 폭발로 두 고택과 사방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밝고 눈부신 섬광에 휩싸이는 꿈이었다. 깨고 나서도 가슴이 뛰고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K 전도사님께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복권이라도 살까요?’라고 농담을 했다. 그러나 전도사님은 정색하시고 말씀하셨다.

“그냥 꿈이 아닌 것 같네. 뭔가 우리나라의 미래에 관한 꿈같아. 혜경이는 그 꿈은 잘 기억하고 나라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겠다.”

아! 나라를 위한 기도라니…!

K 전도사님의 꿈 해석이 맞든 아니든 간에 그날 이후부터 오늘까지 나는 나의 모든 기도의 처음을 나라와 민족, 그리고 북한을 위한 간구로 시작하고 있다. 그때 전도사님께 꿈 이야기를 한 후 이 지면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그 기이했던 꿈의 의미를 나는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35년이 더 지난 지금 핵무기가 개발되고 그 위협이 바로 옆에 있음을 느끼면서 만약 핵무기가 터진다면 그 꿈에서 보았던 기이한 섬광과 같을까 하는 두려움이 여전히 있다. 외국에 사는 동안 몇 차례 한반도의 전쟁 위기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당연히 나는 꿈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고, 그때마다 더 간절히 기도했다.

다시 좀 특별한 꿈을 꾼 것은 아카시아 꽃향기가 교정을 감싸기 시작하는 대학원 2학년 봄이었다. K 전도사님이 먼저 꿈을 꾸시고 내게 꿈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반에 여학생이 세 명밖에 안 돼 K 전도사님과 나는 단짝이 되었고, 모든 면에서 경륜이 깊은 K 전도사님은 자연스레 나의 멘토가 되었다. 그런 K 전도사님이 내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싸부님(L 전도사의 별명)이 혜경이에게 마음이 있나 봐. 어젯밤 꿈에 우리 셋이 어떤 방에 나란히 누워 있는데, 싸부님이 혜경이 허리에 다리를 올리는 꿈을 꾸었어.”

L 전도사는 공개강좌 때 우리에게 라틴어와 헬라어의 숙제 노트를 몇 번 빌려주고 우리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어 우리의 ‘싸부’가 된 사람이다. 당시 이외수의 소설 <사부님 싸부님>에서 따온 별명이었다. 입학하고 들으니 그는 대학교도 수석으로 입학과 졸업을 하고, 대학원도 수석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한 K 전도사님과 영문학을 전공한 나는 신학에는 문외한이어서 지난 1년간 모르는 것이 생겨 급할 때마다, 특히 시험 기간에 예상문제를 들고 그가 조교로 일하는 교수님 방을 무시로 두드렸다. 조용한 성품의 그는 무법자처럼 찾아가는 우리를 싫은 내색 없이 대하고 중구난방 어설픈 질문에 성실히 답변해주어 명실공히 우리의 ‘싸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가 간밤에 전도사님 꿈에 보였다는 것이다. 며칠 후 수업이 끝난 오후, L 전도사가 나에게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청했다. 우리는 1학년을 함께 보내면서 몇몇 전도사님과 무리를 지어 공부도 하고 식사도 함께하곤 했지만, 개인적으로 만났던 적은 없었다. 그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낙성대 공원 벤치에 앉아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더니 ‘나와 결혼해주겠느냐?’라고 내게 물었다. 꽃다발도 반지도 없는 매우 가난한 청혼이었다. 4월의 햇볕만 공원에 가득 따사로웠다. K 전도사님의 꿈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가 나를 좋아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하니 뜻밖이었다. 나는 당시 결혼에 관한 생각을 거의 하고 있지 않았던 터라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가까이서 1년 넘게 본 그는 진중한 사람이었기에 나도 신중하게 답변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고 기도해보기로 작정했다. 지난 1년간 기도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냈으므로 나도 작정기도라는 것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하여 뭔가 목표를 정하고 기도를 작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침을 금식하면서 학교에 다니며 시간이 될 때마다 기도하려고 애를 썼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작정기도였다. 나도 기드온처럼 징표를 구하기로 했다.

‘L 전도사를 부모님께 인사시켰을 때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쾌히 승낙하시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배필로 알겠습니다.’

‘제 마음에도 제가 인정할만한 확신을 주십시오.’

L 전도사는 뼈대 있는 가문의 자제라고는 해도 가세가 많이 기울었고, 당시는 외모도 무척 마르고 병약해 보여 부모님이 보시면 뭐라 하실지 나는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분이 쾌히 승낙하시면, 이라고 징표를 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부모님은 그를 한 번 만나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그를 보더니 두 분 다 쾌히 승낙하셨다. 신기했다. 그에게 호감은 있었지만, 평생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에게도 확신이 필요했다. 한 달의 기도가 끝나갈 무렵 꿈을 꾸었다. 암시도 상징도 아닌 사실 그대로의, 내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꿈이었다. 꿈에서 깬 아침 나는 한참을 멍하니 누워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뭐라 설명할 길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가 네게 뭘 더 보여주랴?’ 하시며 하나님께서 빙그레 웃고 계시는 것 같았다. 나는 청혼을 받은 지 두 달여 만인 6월,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백 명이 넘는 전도사님들의 축복을 받으며 꿈처럼 그와 결혼했다.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 나는 꿈을 꾸었다. 남편의 미국 유학 비자를 받을 때, 세 딸을 출산할 때, 아기를 유산할 때, 내 소설이 상을 받을 때….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은 선물처럼 내게 특별한 꿈을 주셨고, 기대하게 하셨고, 안심시켜주셨다. 일상의 꿈도 다채로웠다.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뜬금없이 꿈에 나타나 특별한 행동을 하면 거의 어떤 암시였다. 대학에서 영미 소설을 가르치셨던 교수님은 문단에 이름이 있는 작가셨다. 나는 그분의 소설을 좋아해 모든 소설을 탐독했고, 특히 소설 속의 단단한 문장을 좋아했다. 존경하고 흠모했지만 일 년에 한 번 성탄 카드 한 장 드리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그렇게 십수 년이 흐른 어느 날 뜬금없이 교수님이 짐을 싸시는 꿈을 꾸었다. 나는 혹시나 하고 모교에 재직 중인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교수님의 근황을 물었다. 역시 교수님은 바로 전 은퇴하셨다고 알려주었다.

가장 무섭고 슬픈 꿈은 엄마나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꿈이었다. 주로 외국에서 지낼 때 그런 꿈을 많이 꿨다. 때로 나는 꺼이꺼이 울다가 내 울음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다. 잠에서 깨면 다급한 마음에 바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 저녁 짓는 중이라는 너무도 태연한, 너무도 다정한 엄마 목소리가 단숨에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전화를 끊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계신 세상을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걱정되고 염려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분들은 모두 돌아가셨고, 그분들이 안 계신 세상에서 나는 잘살아가고 있다.

선명하고 특별한 꿈들이 사라진 것은 언제쯤일까? 그런 증표가 없어도, 어떤 일을 예감하고 확신할 수 있게 된 때는 언제부터일까? 꿈에 기대지 않고 고대하지 않으며 예민하지 않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특별한 말씀이 없어도 가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내가 비로소 어른이 되었음을 느끼듯 꿈이 아니어도, 환상이 아니어도 날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내가 이제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자’(히 5:14)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부터였을까?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면 커다란 창밖으로 바깥 풍경이 환히 보인다. 35층 아파트에 불 밝힌 몇 가구의 따스함 너머로 앞 숲을 감싼 어둠이 포근하다. 유년 시절 커다란 유리병에 오색 알사탕을 넣어 팔던 점방에 들어가듯 나는 이제 소박한 기대를 품고 잠자리에 든다. 지난밤 꿈에서 고추장 항아리를 손가락으로 알려주시던 할머니를 다시 뵈어도, 함께 즐겨 찾았던 ‘동경’에서 아빠와 한 번 더 식사해도, 푸르고 시렸던 청년의 시절 기차역을 향해 숨이 턱에 차듯 함께 달렸던 옛 친구를 만나도, 어떤 사탕을 꺼내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처럼 이제 어떤 꿈이 온다 해도 편하고 넉넉할 것 같다.

오늘 밤도 나는 사탕 항아리에 손을 넣듯 잠을 청한다. 편한 일상의 꿈을 기다리며.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교신춘문예 대상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 했다. 저서로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