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첫 번째 발자국
2021-01-14로버트 토마스와 동서 문명의 만남 (1)
월드뷰 JANUAR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3 |
박명수(서울신학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Ⅰ. 변화하는 국제 질서
1. 붕괴하는 중화 질서
동북아시아는 오랫동안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 질서 속에서 살아왔다. 중화 질서는 유교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핵심으로 중심에는 천자(天子)가 지배하는 중국이 자리 잡고, 주변에는 여러 제후 국가들이 존재하는 동북아의 질서였다. 이런 질서 속에서 조선은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고, 그 체재 안에서 안정을 누렸다. 이것을 사대(事大) 질서라고 한다. 1839년 리 차오(Li Chao-lo)라는 한 지리학자는 몽골족에 대한 천자의 보살핌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했다.!)
천자는 하늘과 땅과 같이 그들을 아우르며, 아버지와 어머니같이 양육하고, 해와 달과 같이 빛을 비춰주고, 번개와 천둥과 같이 위엄을 가진다. 그들이 배고팠을 때, 천자는 먹이고, 추울 때 입히고,…곤란 중에 있을 때 구원한다. 천자는 그들의 능력을 평가하여 관직을 맡기고, 그들을 서열과 토지라는 수단으로 구별한다. …천자는 문자와 문명을 통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법규를 통하여 통치를 확대하지만, 천자는 단 한 사람의 평민의 작은 땅으로부터도 이익을 얻지 않는다. 그는 교육을 강화하되 관습을 바꾸지 않고, 정치체제를 규정하지만 그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반역했다면 천자는 순종으로 이끌고, 도망갔다면 용서하고, 충성을 맹세하고 돌아왔다면 실수를 간과한다.
19세기는 이런 동북아 질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1840년대 초부터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켜 강제로 상해와 여러 항구를 개항한 다음에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은 본격화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1858년에는 천진조약을 맺어 중국을 좀 더 개방시켰고, 1860년에는 북경까지 진격하여 청나라를 위협하고 북경조약을 맺어 중국을 더욱 개방시켰다. 당시 청나라 황제는 북경을 떠나 열하로 피란 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중화 질서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고, 더 나아가서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붕괴는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일찍이 동진을 개시하였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하여 이미 중국과 대등한 조약을 체결하여 중화질서에서 벗어나 있었다. 청나라는 1858년 체결된 아이훈 조약으로 강동육십사둔(江東六十四屯)을 제외한 헤이룽강(黑龍江)의 북쪽을 전부 러시아에 내주었다. 1860년 청나라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러시아는 중재에 나섰으며, 그 대가로 연해주까지 러시아에 넘겨주었다. 이것은 중국 중심의 동북아 질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중국 사람들은 러시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19세기 북미 대륙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내적으로는 텍사스나 알래스카와 같은 땅을 매입했고, 외적으로는 태평양을 건너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대륙에 진출하고자 했다. 그래서 영국의 중국 진출에 이어 미국은 중국과 조약을 맺고 교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은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중국 내부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고, 특히 중국과의 조약에서 아편 금지를 명문화했다. 또 미국은 러시아와도 달랐다. 러시아는 중국과 영국, 프랑스 사이를 조정하면서 그 대가로 연해주를 빼앗았지만, 미국은 중재하면서도 영토는 요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국은 미국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1860년에 맺어진 미국과 중국의 조약 제1조는 중국이 주변 강국에 의해서 부당하게 대우를 받을 때 미국이 거중조정(good office)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조약들은 중화질서가 아니라 만국공법의 국제질서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만국공법은 세계를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는 문명국으로서 기독교 문명을 받아들인 서구 국가이며, 둘째는 반문명국으로서 국가는 있으나 아직 위와 같은 서구 문명을 갖지 못한 나라이며, 셋째는 야만국으로서 국가라고 볼 수 없는 나라이다. 이런 국제 질서 아래서 서구 열강들은 문명국은 상호 존중 아래 국제관계를 갖지만 반문명국은 무력을 사용해서 국제 사회로 이끌어야 하며, 야만국은 정복하는 사람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는 반문명국에 해당된다고 간주하고, 이 기준에 의해서 서양 국가들은 중국을 강제로 개항하도록 강요했다. 과거 중국은 중화질서의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만국공법에 의해서 반문명국가로 전락하였다.
이 같은 수교로 인해서 중국은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첫째는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외교관이 베이징에 상주하게 되었고, 둘째, 기독교의 자유로운 선교가 보장되었으며, 셋째, 외국인의 중국 내지 여행이 용인되었고, 넷째, 여러 곳에 개항장이 만들어져서 자유로운 무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기존의 중화질서가 붕괴되는 첫걸음이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일본은 새로운 서구질서에 편입되고 있었다. 1853년 미국은 페리 제독의 함대를 일본에 파견하고, 1854년에는 화친조약을 맺었다. 1858년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고, 1868년에는 소위 메이지유신을 시작했다. 그리고 1873년 중국과 만국공법의 질서에 의해서 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과거 중화 질서의 변두리에 있던 일본은 아시아에서 서양 문명을 가장 빨리 수용한 국가가 되었다.
원래 중국 문명은 세계 최고를 자랑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유럽은 여러 민족 국가를 만들어 상호 경쟁하고, 종교의 자유를 비롯한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해양을 개척하여 무역을 증진하고, 과학을 발전시켜 산업혁명을 일으켜 근대 문명을 주도하게 되었다. 유럽은 이런 새로운 힘을 가지고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고, 그 결과 중국은 새로운 유럽의 문명과 대립하여 패배하게 된 것이다.
2. 크림 전쟁: 러시아 vs. 프랑스, 영국, 오스만 튀르크
19세기 중엽 아시아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럽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가톨릭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나폴레옹 3세가 황제로 있었고, 러시아에서는 정교회의 수호자인 니콜라이 1세가 차르의 위치에 있었다. 이 두 세력은 당시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 튀르크에서 싸우게 되었다. 이 전쟁이 바로 1853년에 일어난 크림 전쟁이었다. 당시 부동항을 찾아서 흑해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고 했던 러시아 니콜라이 1세는 오스만 튀르크에 진군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의 패권을 놓고 서로 경쟁했지만, 러시아가 남하하여 지중해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 같이 반대했다. 그리고 항상 러시아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오스만 튀르크는 영국, 프랑스와 같은 편이 되어서 러시아와 싸웠다. 결국, 이 싸움에서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 터키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했다.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패배함으로 흑해에서 주도권을 잃게 되었고, 흑해를 통해서 지중해로 나가려던 계획을 수정하게 되었다. 그 이후 러시아는 방향을 돌려 아시아에 진출했고, 시베리아와 극동으로 강력하게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런 이유로 러시아는 1860년 연해주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크림반도에서 승리한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진을 알게 되었고, 극동에서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막기 위해서 공동으로 노력했다. 특별히 프랑스의 후원을 받고 있던 천주교는 러시아의 확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이것을 경계했다. 1860년대 한국에서 선교하던 천주교 선교사들은 러시아의 진출에 대해서 두려워했다. 큰 그림으로 러시아를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영국도 같은 입장이었으나 구체적으로는 영국은 개신교 국가이고, 종교는 개인의 자유라고 믿었기 때문에 프랑스와는 다른 정책을 취했다. 즉 프랑스는 전통적인 식민지 정책을 추구했지만, 영국은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는 것보다는 간접 통치 정책을 추구했다. 19세기 세계의 제일 강자는 영국이었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막강한 국력을 갖게 된 영국은 19세기 중엽부터는 식민지를 직접 지배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원료의 수입과 제품의 수출을 보장하는 무역 통상을 강조하는 상업 제국을 지향했다. 이런 이유로 어떤 특정한 국가가 통상을 독점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런 점에서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가 한반도로 남하하는 것도 반대했지만 프랑스가 한반도를 지배하여 영국의 국익을 해치는 것도 반대했다. (다음 호에 계속)
<mspark@stu.ac.kr>
1) John F. Fairbank, The Chinese Word Order: Traditional Chinese’s Foreign Relations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2.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대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며 미래한국 편집위원이다. 저서로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