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양육- 때에 맞는 수고로 얻는 행복과 기쁨

자녀 양육- 때에 맞는 수고로 얻는 행복과 기쁨

2021-01-12 0 By 월드뷰

월드뷰 JANUARY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1


글/ 김정준(총신대 교육대학원 교수)


디지털 기기의 발달이 부모의 수고를 대신해 줄 수 있을까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 경제적으로 혼란과 어려움이 가중되는 이때, 유난히 힘든 사람이 바로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모들이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장기 휴원 사태로 인해 엄마들로부터 ‘저 좀 살려주세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는 어린이집 원장의 말처럼 유아기 자녀를 둔 부모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힘든 나날을 경험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아이를 안전하게 데려가시던 유치원 기사 아저씨, 엄마처럼 맞아주고 품어주시던 어린이집 원장님과 담임선생님, 정갈한 점심밥을 따뜻하게 지어주시던 조리사 선생님, 어린이집이 끝나면 퇴근할 때까지 자녀를 맡아주셨던 조부모님—,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해볼 틈도 없이 바쁘게 살다가 문득 이분들의 수고가 새삼 귀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이제 한 아이를 키우는데, 조부모는 물론이고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교직원부터 인공지능 디지털 기기까지 도움을 준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던 4차 산업혁명 사회는 이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젊은 부모들은 그 혜택을 잘 누리고 있다. 똑똑한 앱들이 우유의 적정 온도와 젖은 기저귀를 갈아줄 타이밍을 알려주고, 자녀가 어린이집에서 지내는 모습을 전자 알림장을 통해 생생하게 전송받는다. AI 스피커는 말귀를 척척 알아듣고 날씨에 맞게 어떤 옷차림을 하라고까지 알려준다. 심지어 한밤중에 잠든 아이를 CCTV에 맡겨두고 외출을 감행하는 부부도 있다고 한다. 터치 한 번으로 엄마 아빠를 대신해서 유튜브 화면에 등장하는 낯선 선생님은 물 흐르듯 그림책을 읽어주고, TV 리모컨 클릭 몇 번이면 예쁜 캐릭터들이 화면 가득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지식을 알려준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사람이 자녀 양육의 고단함을 알아주고 지원해 주는데도 부모가 느끼는 수고는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그만큼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일하는 젊은 부부의 업무량은 증가했다.

할 수만 있으면 육아의 부담을 덜고 싶은 요즘 엄마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독박 육아!’ 아직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단어지만 배우자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어린 자녀를 돌보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이 서늘할 만큼 화자의 원망과 불평이 느껴졌다. 육아를 혼자 감당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고 불공평하다는 부정적인 정서가 깔린 말이 아닌가? 이들에게 유튜브 같은 동영상 콘텐츠는 부모 역할을 대신해 줄 상당히 유용한 매체처럼 보인다. 유모차에도 스마트폰 거치대가 달려있고 식당에서도 아이는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있다. 기기의 도움은 실제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을 완벽하게 대신해 주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끼게 한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놀라우리만큼 진보한 기술 덕분에 디지털 기기들이 양육의 크고 작은 부담을 덜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과연 부모의 수고를 대신할 만큼 가치가 있는 걸까?

유튜브 영상 보기로 대체되는 그림책 읽기를 생각해보자. 그림책은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는 책이다. 아이는 그림책의 내용 이전에, 사랑하는 엄마 아빠와 그림책을 매개로 함께 나누는 상호작용이 즐겁다. 아이가 가리키는 그림에 대해 부모도 관심을 보이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 읽다가 싫증이 나면 훌떡 접고 다른 놀이를 찾아보는 자유로움, 함께 하는 기쁨이 그 안에 있다.


양육의 본질인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상호 작용


필자의 둘째 아이는 만 5세 무렵 좋아하는 그림책들을 엄마가 읽어주는 책과 아빠가 읽어주는 책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 관찰해보니 읽어주는 방식에 있었다. 남편은 그림책의 글을 읽기보다 그림을 보면서 함께 몸을 움직이고 묻고 대답하는 놀이를 하고 있었고, 필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억양을 살려서 줄거리 전달에 집중했다. 아이는 그림책의 특성에 따라 ‘이건 아빠가 읽어주는 게 더 재미있는 책’, ‘이건 엄마가 읽어주는 게 더 재미있는 책’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림책을 읽어주는 부모와의 상호작용과 관계이지 그림책의 내용이 아니었다. 아무리 탁월한 디지털 매체라도 관계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부모와 자녀 관계의 고유성은 누구도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젊은 엄마 아빠들의 ‘나는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자기중심적인 인본주의 사고방식이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다. 크리스천 부모 중에서도 ‘나’는 부모이기 이전에 ‘나’이고, ‘나’의 인생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게다가 세상은 가시적인 성취가 인생 최대의 목표이자 성공이라고 사람들에게 계속 주입하고 있으니,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낭비이고, 자기 퇴보이고, 피곤만 쌓이는 괴로운 노동인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다. 이런 풍조가 결국 사랑하는 자녀에게 쏟는 수고와 헌신은 디지털 기기에 떠넘기고 양육의 기본마저 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일찍이 현대 교육의 아버지 코메니우스(Iohannes Amos Comenius)는 청년기까지의 교육 체계를 6년 주기로 나누고 어머니 무릎 학교, 모국어 학교, 라틴어 학교, 대학의 4단계로 제안했다. 비록 어머니 무릎 학교가 정규 학교 체계는 아니지만, 사랑하는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함께 그림책을 보고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얼굴과 가슴을 만지고, 크고 작은 놀잇감을 가지고 노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상호작용과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확인이 교육의 첫 단추라고 보았다. 어머니의 무릎은 수고이고 헌신의 상징이며 동시에 사랑이 넘치는 양육의 본질을 의미한다. 양육은 본래 수고스러운 것이며 그것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인공지능이 대신해 줄 수 없다.

큰아이가 고2 때 급식 사고가 생겨 한 달 가까이 도시락을 싸야 할 일이 생겼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급식 제도가 있었으니 소풍 가는 날을 빼고는 도시락을 싼 적이 없다가, 매일 아침 6시 40분 등교 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싸놓는 일은, 전업주부가 아닌 필자에게 간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 학교 급식은 5~6교시만 지나면 금방 배가 고픈데 도시락은 든든해요”라는 아이의 말 한마디에 시작된 도시락 싸기는 고3 수능 보는 날까지 이어졌다. 그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던 작은 아이도 고3이 되니 당연히 엄마표 도시락을 기대했다. 둘째의 도시락은 점심뿐만 아니라 야간 자율학습을 위한 저녁까지 두 개였다. 한꺼번에 두 개를 싸줄 만큼 손이 빠르지도 않고, 날씨도 점점 더워져서 결국 저녁 도시락은 학교 일을 마친 후 서둘러 귀가하여 부랴부랴 싸서 직접 학교까지 배달해야 했다. 저녁 도시락을 받으려고 학교 현관 앞에 서 있던 노을에 물든 작은 아이의 해사한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온종일 도시락만 싼 것 같은 착각으로 몇 달을 보냈지만, 힘들었던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달콤한 행복감만 남아있다. 그때처럼 아이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충만한 기쁨을 누린 적이 인생에서 몇 번이나 있었을까?


하나님과 동역하며 느끼는 양육의 기쁨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도서 3:1-10).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부모 노릇도 때가 있고 자녀의 발달 단계에 따라 그 역할도 달라진다. 영유아기의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의 눈을 마주 보고(요즘은 아이와 눈을 맞추지 않고 휴대전화나 TV만 보면서 이야기하는 부모도 많다고 한다), 몸을 부대끼며 수고할 때다. 그러나 그 헌신에는 세상의 어떤 수고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이 있다. 자녀와 함께 그림책을 볼 때마다 코를 간지럽히던 매끄러운 머리카락의 촉감, 그림을 가리키는 봄날 가지에서 솟아나는 새순보다 부드럽고 고운 손가락, 허벅지를 누르는 탱탱한 엉덩이의 무게는 아이와 함께하는 수고가 없다면 절대 간직할 수 없는 보석 같은 추억들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 것은, 그때가 좋았지만, 그것도 한때라는 것, 때에 맞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이 있으며 그것은 아이와 나 사이를 오랫동안 연결해 줄 탯줄과 같은 튼튼한 유대감이라는 것이다. 고단한 몸으로 아이를 씻기고 재우는 수고, 한밤중 열이 펄펄 나는 아이에게 차가운 수건을 대주는 헌신도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 것만큼 하나님과 동역하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또 있을까? 애초에 나에게는 생명을 잉태할 아무 능력이 없었다. 하나님은 천하보다 귀한 당신의 자녀를 나의 태를 사용하여 세상에 보내 주시고, 나의 손을 통해 길러내신다. 그러나 아이의 키가 자라고 생각이 자라는 동안, 하나님은 아이를 통해 나를 자라게 하셨다. 눈물 뿌린 간절한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고, 말씀을 스스로 떠먹게 하시고, 예배를 사모하는 자로 키우셨다. 어느새 세월은 흐르고 내 눈앞에는 제 사랑하는 남편과 나란히 선 여인, 전날의 야근에도 또 하루를 시작하는 발걸음을 당차게 내딛는 청년의 뒷모습이 보인다. 성인이 된 두 아이를 볼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역에 동참하는 영광과 성장의 은혜를 내게 허락하셨다고 고백한다.

사랑의 기쁨은 그 대상을 소중히 여길수록 더욱 커진다. 신기하게도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행동에 옮길수록 내가 더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된다. 세상은 자녀 양육이 너무 힘들고 손해 보는 일이라고 세뇌하지만, 세상이 가르치는 대로 생각한다면 정말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 안에는 세상이 말하지 않는 비밀스럽고 독특한 기쁨과 환희가 있다. 젊은 부모들이 그 영광스러운 사역에 기쁘게 충성하길 바란다. 그 일을 기쁨으로 감당해 내는 많은 젊은 엄마 아빠들을 볼 때마다 대견하고 신통하다. 자녀 양육으로 수고하는 그 시간은 인생에서 너무 짧고, 돌아보면 아쉬움 투성이다. 아이는 아까울 만큼 금방 자란다. 눈물로 씨를 뿌리자. 기쁨으로 단을 거둘 날을 이미 약속하셨다.

<1211kimjj@hanmail.net>


글 | 김정준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오차노미즈 대학교에서 외국인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총신대학교 교육대학원 유아교육 전공 조교수, 한국구성주의유아교육학회 부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