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법치주의 정신이 기본이다

진정한 법치주의 정신이 기본이다

2021-01-08 0 By 월드뷰

월드뷰 JANUARY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글/ 이호선(국민대 법대 교수, 변호사)


기본의 부재, 상식의 파괴, 가치의 전도(顚倒), 이 세 가지만큼 이 시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말이 없는 것 같다. 선동이 과학이 되고, 궤변이 일상이 되면서 침묵해야 할 자들은 떠들고, 말해야 할 자들은 침묵하며, 부끄러워해야 할 자들은 당당하다. 홍수 심판 전 인류의 모습에 대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는 평가가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준이 흐트러진 세상에 대한 인식


이 모든 현상의 중심에 기본의 실종이 있다. 기본은 무엇인가. 기본이란 기준(基準)의 다른 말이다. 기준이 있어야 우리가 어디서 출발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기준이 없으면 목소리 큰 사람, 잘 조직된 세력, 힘을 규합할 수 있는 소수가 방향을 좌지우지하게 되고, 결국 그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게 되고, 나중엔 내가 누구인지도 헛갈리게 된다. 준거가 없어지면 인간은 자기 행동에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된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동물농장> 마지막 장면은 아주 냉철하게 이 부분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을 쫓아낸 후 돼지들의 통치로 인해 삶이 더 피폐해졌을 뿐 아니라, 인간보다 더 가혹하며 위선적인 돼지 계급이 생겨나서 수탈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면서 젊은 세대는 과거를 알지 못하고, 구세대의 기억은 희미해져 무엇이 더 나아졌는지, 자신들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비교조차 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에게 던져지는 것은 선동꾼 돼지 스퀼러가 보여주는 통계 숫자뿐이라는 내용이다.

이 메시지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기준을 되찾고, 비교의 대상을 만들며, 그에 어긋나면 ‘아니’라고 외칠 수 있도록 기본을 회복하고, 그것을 모든 사회 구성원의 DNA에 각인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제는 지금의 위기가 단순하고, 우연한 사실로 인해 저절로 초래된 것이 아니라, 매우 정교하게 의도되었으며, 거기에는 동물농장의 독재자 나폴레옹 돼지와 그 옹호자들처럼 기본을 잊고, 기준을 왜곡하려는 시도가 포함되어 있기에 더욱 절실하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뒤엎고, 해체하고자 하는 의도와 그 의도의 결집이 학문, 문화, 정치, 교육, 예술에 전방위적으로 집요하게 파고든 성과가 지금의 상황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법치의 본질


우리가 되찾아야 할 기준, 되돌아가야 할 기본 중의 하나는 공동체의 뼈대를 구성하는 법치주의 정신에 있다. 주의할 것은 단순히 법치주의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 그 근본정신까지 되돌아가 생각할 때 비로소 모든 혼란을 초래하고, 재구성하려는 뿌리 깊은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할 수 있다. 이미 기본을 파괴하고, 기준을 해체한 어둠의 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용어들을 자기들만의 뜻을 내포한 새로운 의미로 각색하여 기망하고 있다. 법치주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이들에게 법치주의는 법을 도구로 삼아 통치의 채찍을 휘두르겠다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의 의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본질에서 벗어난 이 의미를 법치주의로 왜곡, 선동하면서 또 하나의 바벨탑을 쌓으려 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법은 자의적 법이다. 불법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수긍하는 기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불법은 자기들의 기준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법을 마음대로 바꾼다. 이러한 남법(濫法)은 기준에 대한 자의적 변경이어서 불법보다도 훨씬 더 악하며 사회를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기본은 형식적 법치가 아닌 실질적 법치, 기준이 사람에 맞춰지지 않고, 사람이 기준을 지켜야 하는 법치주의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이란 무엇인가, 법의 정신은 무엇이며, 법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탐색이 있어야 한다. 그럼 이 시대에 법치주의 정신을 탐구하기 위해 우리가 참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실정법은 정의를 우선적으로 꼽는데, 성경적 법의 최고 지도 원리 역시 정의이다. 이런 까닭에 법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성경에서 얻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창세기 18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정의는 소명이었다. 그 소명은 이념적으로는 하나님이 정의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신조로, 실천적으로는 바른 사회 규범의 정립, 그리고 구체적 사건의 공정한 판결로 드러나야 했다. 신약성경, 성서고고학 등의 권위자인 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같은 이는 시편 82편을 한 장으로 된 성경 중 가장 중요한 본문이라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이방신들이 쫓겨나는 이유는 단지 이방의 존재이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과 다르기 때문도 아니며, 하나님과 경쟁자이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불의, 다시 말해 신적인 능력을 남용하고 초월적인 능력을 부정하게 사용함으로 인해 자리에서 쫓겨난다. 그들은 땅 위에 사는 인간 공동체 속에서 정의를 요구하지도, 정의를 실천하지도 않기 때문에 ‘사람처럼 죽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정의를 등한시하는 행위의 유형이 변명의 여지없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다. 정의는 신성함의 여러 속성들 중 하나가 아니라 신성함 그 자체이다. 창조주의 주권적 질서에 대한 인간의 뿌리 깊은 반항심에도 불구하고 성속(聖俗)은 분리되지 않는다. 속(俗)에서의 정의와 불의는 영적 세계의 심판 결과를 좌우한다. 시편 82편은 영적 세계의 신비한 구속과 심판의 역사가, 인간의 현장에서 이뤄지는 정의를 매개로 서로 엮여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치주의 정신에서 늘 정의를 되새겨야 한다. 그런데 성경적 정의의 기준은 책임의 보편성과 권리의 등가성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통해 전 민족이 신적 정의가 무엇인지를 경험하였다.

따라서 성경적 정의의 특징은 ‘풀뿌리(grass roots)’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풀뿌리는 현대의 대중 민주주의의 상징적 용어와는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 민주주의의 기치로서의 풀뿌리는 권리 중심이지만, 성경적 법에서 말하는 풀뿌리는 책임의 저변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일관하여 정의에 대한 추구는 모든 사람의 손에 달렸지, 소수에게 전가되거나 위임되지 않음을 선언하고 있다. 모두를 위한 정의(justice for all)는 모두에 의한 정의(justice by all)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편을 가르고, 특정 집단에 대한 특혜를 주며, 대중을 국가 의존적으로 만드는 정책과 법은 그것이 아무리 현란한 수사와 선전으로 꾸며져 있더라도 반대하고, 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을 명백하게 표시하여야 한다.

법치주의 정신을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강조, 인간의 존엄에 대하여 성경만큼 확실하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불변의 지침을 제공한다. 성경적 법은 당사자들이 피조물로서,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지위에서 “신성하게 명(命) 받은 사회적 질서”에 맞춰 그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예컨대, 레위기 25장에서 선언하고 있는 희년은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신적 선언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산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은 미리 정해진 질서에 따라 자신의 분복을 주장할 수 있었다. 질서와 정체성의 회복에 초점을 두게 되면 현실적으로 질서의 침해가 없더라도 공동체 차원에서는 ‘있어야 할 그 무엇’에 대한 상(像)을 늘 그리게 되고, 구성원들은 이를 하나의 사회적 DNA로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권리 회복이 목적이 되어 있는 현대 법체제 아래에서 권리들은 파편화되고, 나중에 가면 동물농장의 동물들이 그러하듯,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갖고 있었는지, 이 공동체가 지니고 있었어야 할 덕목은 무엇인지 등을 잊어버리게 되고 만다. 근본적 가치를 끊임없이 회상시키고, 그 기준에 비추어 현실을 평가, 비판, 행동하도록 하지 않는 법치주의는 대중 우민화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 번째로 성경적 법은 법치주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하는 동력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성경적 법은 매우 다양한 가치들과 전제들로 구성된 사회의 법을 고유한 스펙트럼에 비춰 보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이미 확고하게 이뤄 놓은 것으로 보이는 사회적 합의에 대하여 “과연 그러한가? 당연한가?” 그리고 “그것이 정상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법치의 기본은 성경적 법의 정신


무엇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특히 존재하는 것이 잘못되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성경은 아름답게 창조된 이 우주의 질서가 인간의 원죄로 인해 왜곡되었고, 창조주에 의해 새롭고도 온전한 회복이 이뤄지기 전에는 그 왜곡은 여전히 잔존하거나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예레미야 17:9)”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만든 제도와 질서라면 그 안에 본질적으로 일정한 흠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그래서 성경적 법은 우리에게 지금 존재하는 세상이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실재한다는 것은 “그냥 있을 수 있었던 것일 뿐, 있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성경적 법의 정신이 법치주의의 기본이 될 때 바벨탑을 법치주의로 둔갑시켜 자유롭고 번성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악랄한 파괴를 막을 수 있다.

<hosunlee@kookmin.ac.kr>


글 | 이호선

국민대학교 법과 대학을 졸업하고,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수료 후, 영국 리즈대학교(University of Leads)에서 ‘EU 및 국제비지니스법’을 공부하였다. 2005년부터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총무처장과 기획처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성곡도서관장의 직을 맡고 있다. 경실련 법제위원, 대한변협 기획의원, 사단법인 전국법과대학 교수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 교수모임(정교모)’의 공동대표로 있다. 저서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정의>, <질문이 답이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 최근 출간한 밀로 반 질라스의 <위선자들>을 비롯하여 <완역 유럽연합창설조약>,<기적의 자신감 수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