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하지 않는 사회
2021-01-07
월드뷰 JANUAR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6 |
글/ 황승연(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왜 한국인은 거짓말을 잘하고, 거짓말에 잘 속고, 또 그 거짓말에 관대한가? 법원에서 취급되는, 그래서 세상에 드러나는 대표적인 거짓말 범죄로 위증, 무고, 사기 등이 있다. 이와 관련된 거짓말 사범이, 선진 외국의 경우와 비교하여, 우리나라가 수십 배 많다고 한다. 최근에 벌어진 라임 펀드 사기 사건과 옵티머스 펀드 사기 사건은 그 배후가 누구이건, 시중 은행과 증권사들이 관련된 사기 사건이다. 금융감독원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편법과 불법 운용을 조사하던 중에도 특정 가입자들의 투자금을 환매해주기 위해 수천억을 빼돌려 돌려막기를 했다. 신뢰를 기반으로 존재하는 금융기관들이 저지른 일들이다. 은행과 증권회사뿐 아니라 보험사기 또한 늘고 있어서 금융시장의 신뢰 상실은 현재의 우리 사회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보험사기도 다를 바 없다. 특히 의료보험 사기가 크게 늘었는데, 작년 2019년 통계에 의하면, 5년 전인 2014년과 비교하여 허위 수술은 33배, 과잉청구는 1.98배, 허위 장해는 4.87배, 허위 진단은 3.36배, 과장 청구는 1.47배가 늘었는데, 이렇게 보험회사를 속이고 보험금을 타고, 가짜 서류를 만들어서 실업급여를 받으면, 이를 오히려 자랑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은 그의 표류기에서 “조선인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며 이를 자랑스러워한다.”라고 쓰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거짓말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사회 전체가 좌경화되면서 이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도대체 이 거짓말 근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정직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아야 할 사람들이며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국민의 공복인 정치인, 공무원, 군인들의 거짓말이 일상에 넘치고 있다. 최근에 우리 사회의 잘못을 찾아내어 바로잡자는 헌법기관의 장들인 감사원장이나 검찰 총장이, 정부나 여당의 정책을 지적하거나 혹은 그쪽 진영 사람들의 잘못을 조사하면, 충성심이 넘치는 여당의 국회의원 몇 명이 나서서, 감히 임명권자에게 반기를 든다고 윽박지르며 “대선 불복이냐”고 눈을 부라린다. “사표 내고 스스로 물러나라”라고 퍼붓는다.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혼자 버티는 감사원장의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 감사원에서 하는 감사를 앞두고 어느 부처는 자료를 통째로 폐기하기도 하고, 서류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제는 이런 일들이 일상적이다. 산자부는 장관을 비롯한 인사들이, 감사를 받으면서 이미 했던 진술은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하며, 당시에 자필로 서명한 확인서는 효력이 없다고 일제히 고백하는 비극을 본다. 이들의 서류 폐기와 조작에 대해 조사하려는 검찰 총장을 내쫓으려고 모함과 거짓말로 온갖 술수를 다 쓴다. 그들은 거짓말이 드러나도 너무나 당당하고 뻔뻔하다. 많은 선량한 공무원들을 뒤로하고, 국민의 공복이라는 겸손은 잊은 채, 국민을 배신한 그들은 권력의 충실한 주구의 모습이다. 그들이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보호하려고 온통 거짓으로 도배질하며 국민을 배신해도 조작과, 은폐가 통했는지, 아니면 거짓말에 관대한 국민성을 보여주는 것인지, 국민의 정부·여당에 대한 지지도는 여전히 견고하다. 광우병 난동사태에서부터 촛불 탄핵 사태까지 온통 거짓말로 점철된 사건의 연속이었지만, 참과 거짓을 가리려 하지도 않고, 거짓말로 밝혀져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다. 거짓이 참이 되는 세상에서 살아왔기에 거짓말 정부에 대한 지지도도 여전하다.
정부의 거짓말
우리 국민이, 그것도 공무원이 공무 중에, 북한군에게 사살되고 시신이 불태워졌다는데, 청와대, 국방부, 해수부, 해경 모두 상식 밖의 얘기만 하고 있다. 신발을 벗어놓고 구명조끼를 입고 사라졌으니 의도적으로 바다에 뛰어든 것이라며 그래서 월북이라 했다. 나중에 밝혀진 신발이라는 것은, 누가 신던 것인지도 모르는, 그것도 굵은 밧줄 더미 아래 숨겨진 슬리퍼였다. 해경과 해군은 선박에서 슬리퍼를 신고 근무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 북한에 구조요청을 못 한 원인으로 북한과 통신선이 막혀 있는 현실이 아쉽다고 했다.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알고 보니 평소에도 국제상선 통신망으로 북한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부와 군과 경찰이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다. 끝까지 캐물으면 조사 중이라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대통령은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편지에 ‘해경의 조사와 수색 결과를 기다려보자’라고 하며 위로의 답변을 보냈다 한다. 두 달 이상 지났는데도 시신을 찾았다는 혹은 못 찾았다는 아무런 발표도 없다. 북한은 신분을 밝히는 우리 국민에게 총격을 가해 사살하고 부유물을 불로 태웠다고 발표했는데, 우리 군과 해경은 선박 1,300여 척과 항공기 230여 대를 투입해 수색작업을 벌였다. 수색작업을 기다려보자 했지만, 아직 어떤 결과도 듣지 못했다. 무엇을 찾을 수 있다고 그런 대규모의 선박과 항공기를 동원하여 쇼를 했을까? 이것도 국민에게 그리고 사망한 공무원의 가족들에게 한 큰 거짓말이다. 이렇게 거짓말이 우리의 일상에 늘 함께한다. 그것도 국민이 믿고 생명과 재산을 맡기고 있는 정부 최고위층들의 거짓말이다.
언론의 거짓말
KBS는 검사와 채널A 기자가 공모했다는 소위 ‘검언유착 오보’에 대해 사과방송을 하고 또 법정 제재를 받았다. 그런데 국정감사에서 이 오보가 시간이 부족해서 일어난 실수였다고 했다. 오보가 아닌 의도적 거짓 보도를 시간 부족이라 변명했지만, 이것도 즉시 거짓으로 드러났다. 정직과 공정이 생명인 언론사 특히 한국의 대표 방송사 사장의 얘기이다. 실수로 한 오보가 아니고 의도적으로 국민을 속이려고 한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감추려고 새로운 거짓말을 한다. 한국 사회가 붕괴된 단면이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얘기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실로 돌아다닌다. 오히려 거짓을 사실이라 믿으라고 강요당하는 시대이다. 우리나라 언론들이 대부분 썩어서 악취가 진동한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진실과 정의를 찾겠다며 버텨주는 기자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언론사에 얼마나 남아 있나? 그런 기자들이 이끌어가는 언론사가 아직 남아 있나? 1인 유튜브 미디어보다도 못한 공중파 방송들이나, 조작과 선동이 본업인 종편방송도 있다. 자기 진영이 불리한 기사는 아예 다루지 않는 그런 동네 정보지 수준의 신문들도 있다. 심지어 구독자가 제보한 정보를 갖고 그 기관을 찾아가서 광고와 바꾸는 그런 거래를 하는 신문사들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천박한 사회가 되었으며 왜 이렇게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거짓말이 일상화되어 있다. 진원지가 어디인가?
정의부의 거짓말
현재 거짓말의 주범은 법무부이다. 정의의 표상이어야 할 정의부(Ministry of Justice) 즉 법무부의 장관들이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들과 관련한 범법 의혹으로 수개월 혹은 수년씩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는다. 의혹에 그치지 않고 사실로 드러나도 아니라고 우기면서 정의의 칼을 휘두른다고 하니 정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범법에 연루되어 있으면서 어떻게 정의를 말할 수 있나? 그 와중에도 검찰을 지휘한다고 설친다. 법무부 장관이 서류위조에 부정청탁에 직권남용에 주가조작에 셀 수 없는 범죄에 가담한 의혹을 받고 있어도 그들의 지지자들은 이런 죄들을 감싸주느라 이성을 잃었다. 심각하게도 많은 국민은 이러한 일들을 보고도 그 정도의 범법은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게 대하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이라 불리던 시절에도 그 당시 어떤 법무부 장관이 이런 의혹의 중심에 섰던 적이 있었던가? 정의부에 정의가 없다. 버부부는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세상에 우리는 던져져 있다.
거짓말과 노비 근성
자유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신뢰’이다. 조선왕조가 500년을 이어오면서, 왕조의 존립을 위해 지속시켰던 노비제도는 뿌리 깊은 노비 근성을 낳았다. 노비 근성의 핵심은 거짓말과 무책임이다. 우리 민족이 버려야 할 가장 심각한 질환이다. 건국 이후 국민이 노비 근성에서 점차 탈피하면서, 경제발전과 함께 사회적 신뢰를 이해하고 또 신뢰 사회의 근간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사회에 이 신뢰가 급속히 붕괴되고 상스럽고 천박한 사회로 변해가는 조짐을 본다. 우리 사회의 경박함과 천박성이 어디서 오는가? 우리 부도덕과 천박성은 바로 노비 근성에서 온다는 그런 생각을 해왔는데, 최근에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조사를 하게 되었다.
지난 9월 초 필자는 우리 사회의 현 상황을 파악하고, 우리 사회의 당면 문제와 해결책을 찾아보기 위해, 전국의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500명을 표본으로 국민의식에 대한 전국 조사를 하였다. 이 조사에서 “정직한 사람일수록 더 손해만 본다”라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72.6%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아니’라고 답한 응답자는 단 6.7%였다.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고 규범이 와해 된 것으로 보인다. 규범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너무 많은 규범이 난립하여 전체 사회를 통합시킬 강력한 하나의 규범 체계가 붕괴된 상태를 의미한다. 규범이 와해되면 구성원들은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회를 ‘아노미 사회’라고 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에서 자살률이 높아진다. 이것을 아노미적 자살이라 한다. 우리나라 자살률(10만 명당 자살자)은 2011년부터 계속 낮아지다가 2017년 24.3, 2018년 26.6, 2019년 26.9로 높아졌다. 현재 자살로 숨지는 사람들의 비율이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특별히 높은 노인들의 자살률은 논외로 하더라도, 2019년 10~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었고, 40~50대 사망원인의 2위가 자살이었다. 언론에서는 치열한 경쟁 사회의 그늘을 보여주는 지표라 한다. 소외된 계층의 불안감을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경쟁 때문에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력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없어져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되면 자살이 늘어난다. 경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자살을 막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늘 보호받고, 치료(healing)받고, 위로받아야 할 존재로 취급당한다. 이렇게 점차 목표를 상실해가면서 자살률이 높아져 간다. 내일을 맞이하기를 두려워하고 노비 근성만 쌓여간다. 노비들에게 내일은 없다. 그들은 내일을 준비하지 않는다. 오로지 오늘의 편안함만 생각한다. “내일보다 오늘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라고 답하는 국민이 45.8% : 18.8%로 더 많다.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자살률이 낮고 더 건강한 사회이다. 노비 근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 잠시 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내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신뢰나 신용은 중요하지 않다.
“정직한 사람일수록 더 손해만 본다”
노비 근성의 또 다른 면은 자신의 처지를 남 탓으로, 특히 부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조사에서 “부자들의 재산은 노동자, 농민들의 피와 땀의 결실을 빼앗아 생긴 것”이라는 질문에 34.5%가 ‘그렇다’라는 긍정의 답을 했고 부정을 한 응답자는 불과 30.5%였다. 그래서 가진 사람들의 재산은 빼앗아야 한다고 본다. 최고세율 60%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속세 제도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부자들에 대한 상속세를 더 올려야 한다.”라는 질문에 무려 64.7%가 ‘그렇다’라고 답했고 14.9%만이 ‘아니’라고 답했다. 이 정부가 부자 증세와 부동산 관련 세금의 인상과 공정거래 3법을 강행하며 사회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여당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노비 근성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 국민은 그동안 감춰져 있던 노비 근성이 자극되어 공짜로 퍼준다는 수많은 복지 기금에 환호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부자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대물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조사결과이다. 복지 정책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다는 거짓말이 가장 큰 거짓말이다. 그들은 과연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노비 근성을 가진 사람들은 정작, 이 거짓말에 관심이 없다. 그저 지금 당장 공짜 떡을 받으면 그것이 전부이다. 그들에게 언제 내일이 있었던가?
자유로부터의 도피
노비는 자유를 가진 개인의 반대말이다. 노비 근성은 자유를 포기하는 마음이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말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마음이다. 이번 조사에서 우리 국민이 개인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시키는 태도를 볼 수 있었다.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다”라는 질문에 47.0%가 긍정의 답을 17.4%만이 부정의 답을 하였다. “나의 자유와 권리를 양보하더라도 동료들과 경쟁하지 않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다”라는 질문에 34.4%가 긍정, 26.3%가 부정, 39.3%가 중립의 답을 하였다.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아왔고,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강요받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 맹목적으로 개인을 희생하라는 논리에 우리 사회는 점차 전체주의로 간다. 최근의 정부의 선심성 복지 정책과 코로나 방역을 핑계로 한 집회 금지를 통해 우리나라 국민성 중 잊혀가던 노비 근성이 되살아나고 있다. 경쟁을 죄악시하고 평등을 선이라고 하는 주장에 사람들은 ‘노비의 안도감’을 느낀다. 이것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길이고 ‘노예의 길’이다. 평등, 양보, 공동체, 이웃, 행복, 이런 단어가 주는 ‘선의’에 속게 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라는 유럽 속담이 있다. 그 선의는 거짓말이다. 평등한 사회는 없다. 행복과 번영은 노력과 희생의 대가이다. 그러나 전체주의 선동에 주로 동원되는 거짓말이 평등과 행복이다. ‘한번 말하면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반복해서 말하면 결국 믿게 된다’라고 한다. 북한 주민들은 북한이 가장 행복한 사회인 줄 안다. 우리나라도 현재 훌륭한 지도자 밑에서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역사적 사실에 관한 판단을 국회에서 다수결로 법으로 정하고 법에 반하는 사실을 말하면 거짓말이라 하여 체포해서 조사하고 재판하고 징역에 처한다는 법이 통과 되었다. 이제 거짓말이 없는 너무 행복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나라가 망하는 꼴을 기어코 보게 될 모양이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21세기판으로 우리나라에서 부활하는 것 같다.
노비 근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주인의식이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내일도 없고, 자유는 귀찮고 부담스럽다. 그래서 책임도 없다. 거짓말이 일상적인 일이다. 나의 불행과 고통은 모두 남 탓이다. 자유를 갖고 사는 피곤한 삶보다, 착한 주인이 나의 삶을 책임져주면 그것이 행복한 나라이다. 한번 거지로 살면 너무나 편해서 다시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한다. 이 정부와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그런 편안한 거지의 나라로 가기를 바라고 있다. 아르헨티나, 베네주엘라, 그리스와 같은 나라로. 또 대표적인 거지의 나라가 북한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지난 3년 동안 북한 사회와 아주 비슷해져 가고 있다.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라 해야 하나? 점점 우리 사회는 그들의 목표로 가는 중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3년간 급격하게 변했다. 우리 사회의 3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 사회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조사결과로 본 우리 사회의 미래는 끔찍하다.
노비 근성과 마름 근성
여당의 선량들은 완장을 찬 기분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것 같다. 노비 중에 주인을 대신하여 노비나 소작농을 관리하는 사람을 ‘마름’이라 한다. 주인에게는 노비는 자신의 재산이지만 마름에게는 그냥 군림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마름이 주인보다 더 악랄하다. 감사원장에게 눈을 부릅뜨고 대선 불복이냐고 다그치는 여당 의원들의 모습에서 완장 찬 마름의 모습을 본다. 야당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나? 지난 총선에서 야당의 지도부라는 사람들은 완장을 찼다고, 애국심으로 가슴 뛰는 비전을 얘기하는 의원들, 불의에 분노하는 정치지망생들,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집요하게 따지고 드는 후보들을 공천 탈락시키거나 사지로 보내는 방법으로 다 쳐냈지 않나? 지금도 야당 의원이 적에게 아픈 말 한마디 했다가 공격을 받게 되면, 그것을 이유로 즉시 윤리위원회에 회부해 제명 처분을 한다고 설친다. 아군을 제거하는데 더 극성이다. 딱 마름이 하는 짓을 하고 있다. 그러니 2중대 소리를 듣는다. 산토끼를 잡는다며 그렇게 하다 보니 산토끼를 잡기는커녕 부서진 울타리 사이로 집토끼도 다 도망가고 얼마 남지 않았다. 보수 우파 야당이 극복해야 할 것도 역시 다름 아닌 노비 근성이다. 그런데 그들도 완장을 찼다고 노비가 아닌 줄 안다. 그들 역시 자유도 개인도 시장도 국가도 모르는데 누구 탓을 하겠는가? 그것을 모르니 국가의 거짓말에 순응하고, 그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완장에 먼지가 쌓일까 그 걱정만 하고 사는 것 아닐까?
대통령의 거짓말에, 정부와 여당의 거짓말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거짓말에 목숨 걸고 맞서 싸우는 국회의원들과, 교수, 교사들과, 성직자들과, 학생들과, 아이 키우는 엄마들과, 우리 아이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빠들과, 내일을 걱정하는 유권자들이 모두 나서서, 나는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각성 운동으로 우리가 신뢰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지금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지금 이렇게 고통을 겪는 것도 바로 우리가 거짓말에 관대했기 때문이란 생각을 왜 못하는가?
<lion@khu.ac.kr>
글 | 황승연
경희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독일 Saarbrücken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현재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